얘기 마당/내 이야기 225

삿된 것을 버려라

부처님께서 말씀하기를 “어리석은 사람은 무슨 수를 써든지 화를 면해 보려 하고 또 삿된 스승을 섬기며 삿된 짓을 하는 이들은 바른 도가 아닌 것을 말하되 이렇게 하면 옳고 저렇게 하면 그르다고 하면서 삿된 신(귀신)을 구하고 아귀에게 절하다가 오히려 재앙을 부르고 괴로움을 받든 것이니, 그런 사람들은 하늘에 배반되고 진리에 어긋나고 해와 달의 밝은 빛을 등지고 항상 어두운 곳으로 가는 것이며 바르고 넓은 길을 버리고 항상 나쁜 길을 찾는 것이므로 뒤바 낀 소견이 심한 까닭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은 당연히 받게 되어 있는 화를 면하려고 삿된 스승을 섬기고 아귀(귀신)에게 절해서 화를 오히려 부른다 하셨는데 불신 인과는 대죄다. 인과를 믿지 않으면 죄가 된다는 것이다. 정업은 난민이라 꼭 ..

암도스님 글중에서{3. 마음(心)}

맘은 정신세계의 근본이고 마음은 무엇이나 보고, 듣고, 말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주인이다. 본래 마음은 크고, 넓고, 깊고, 높으며 깨끗한 것이다. 마음이 크다는 것은 심령(心靈)을 말하고 마음이 넓다는 것은 심량(心量)을 말하며 마음이 깊다는 것은 심사숙고(深思熟考)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마음이 높다는 것은 뜻(心志)이 높다는 말이고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심성(心性)을 말한다.  인간의 심성은 제10식 ˙ 흘리다야식(訖利陀耶識)(=眞心˙堅實心)으로 마음의 핵심인데 불성광명(佛性光明)이다. 마음의 핵심(核心)이 빛(光)을 발하면 제9식 ˙ 암마라식(菴摩羅識)(=無垢淸淨心)인 심령(心靈)이 부흥하여 밝아지고 지혜가 나온다. 그러나 제8식 아뢰아식(阿賴耶識)(=藏識 ˙잠재의식)에 탐진치(貪瞋癡) ˙ 삼..

한용운 스님 말씀

한용운스님은 소개하지 않아도 잘 아실 것 같아 스님 생전의 일화를 소개한다. 일제 치하의 조선후기 불교는 조선 총독부의 사찰령에 따라서 어용화의 길을 걷게 되는데 어느 해 태고사 대법당에서 주지 대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한용운 스님은 그 자리에 나와 강연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다. 몇 번의 거절 끝에 전국에서 모인 중진 승려 앞에 선 한용운 스님은 좌중을 바라보며 큰소리로 첫마디를 하게 되었다.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무도 그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은 똥이 올 시다. 똥! 그런데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습니다. 무엇 이겠습니까?” 이번에는 좌중은 얼어붙은 듯 침묵이 흘렸다.  “내 경험으로는 똥보다 더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게 ..

여시주 여시항복기심의 목표

여시주 여시항복기심(如是住 如是降伏基心)은 반야경인 금강경 중에서도 핵심 부분에 속하는 것으로서 중생의 목적인 견성 성불하는 데는 무엇보다도 반야바라밀이 근본이다. 그래서 반야(지혜)의 중심인 금강경인 것이다. 금강경 중에서도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이니 이는 대승의 골수 즉 근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여시주 여시항복기심을 잘 이해하고 심득해서 생활화하는 것이 바로 성불의 첨경이 될 것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의 물음에 대해 이와 같이 그 마음을 머물 것이며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라 하셨는데 여기서 ‘이와 같이’에 금강경 전체의 뜻이 담겨져 있다. 해도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면 여시(이와같이)가 무엇인가. 우리의 근본 마음자리를 증득하려면 무엇보다도 사상(四相 : 아상, 인상, 중생상, 수..

자기 마음을 항복 받으려면

금강경에 무위복승(無爲福勝)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아무 생각 없이 무심으로 중생을 위해 짓는 복이 제일 거룩하고 비교할 수도 없이 크다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보시하고 아무리 훌륭한 생활을 하게끔 도와주었더라도 그것은 다함이 있는 것이며 얼마 아니 가서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 마음자리의 극히 일부분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또 마음이 물질에 머무는 한 그것은 생사심이고 중생의 세계이므로 이는 참다운 복이라 할 수 없다. 우리의 본 성품은 이와 같은 물질적 현상을 다 초월한 번뇌 망상의 세계로부터 영원불멸의 진리의 세계로 나가고 생사윤회의 고통으로부터 열반의 광명세계로 중생을 인도하여 마침내 나고 죽는 문제를 해결하고 우주의 주인공으로서 대자유인이 되도록 하는 이 금강경의 진리를..

사상(四相)과 인간 생활

불생불멸하는 이 마음자리는 어제는 이 모양이고, 오늘은 이 모양이고 내일도 천만년 전후에도 지옥에 갔을 때나 천당에 갔을 때나 성불한 뒤나 똑같은 마음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본래의 성품에 두 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 생겨나고 하는 허망무상한 것이지만 이 마음자리는 중생 때나 부자가 되었을 때나 다 같이 여여부동한 자리이기 때문에 온 중생이 다 평등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부처님의 말씀을 정말 따르는 사람이라면 남을 위해 조건 없이 희생하는 것이 내가 부처되는 방법이고 번뇌를 해탈하는 방법임을 알아야 한다.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거나 무심한 가운데 하고 실패하거나 성공하거나 그것에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 이 현실은 마음에 생긴 꿈이니 집착하지 말고 살아야 된다. 사람이 마음속에 공포증이 조금이라도 있거..

틱낫한 스님 말씀

틱낫한(베트남어 :  Thích Nhất Hạnh , 1926. 10. 11 ~ 2022. 1. 22) 스님은 베트남 출신의 불교 지도자 이자, 평화운동가였다. 생전에 100여 권이 넘는 책을 낸 작가이기도 하고, 2000년대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출간된 《화》가 대표적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유럽 및 미국 등 서방세계에 불교 교리를 전파하고 참여불교 운동을 전개한 스님으로 유명하다.  1960년대 초 미국 대학에 초청되어 불교 강의를 하였고 이후 1963년 베트남에서 반전운동을 주도한 그는 남,북베트남정부 모두 귀국을 거부하여 장기간의 망명 생활을 하였으며, 1982년 프랑스 남부에 명상 공동체인‘플림 빌리지'를 세웠다. 2005년 베트남정부는 귀국을 허용하였고, 뇌졸중으로 병약해진 틱낫한 스님은 2018..

상(相)에 머물지 않는 보시(布施)

《금강경》 제4 〈묘행무주본(妙行無住分)〉에서 그 마음이 머무는 바 없이 불교의 오묘한 법대로 보시한다 했는데 보시는 남에게 베푼다는 말이다. 내용을 보면 “수보리야, 보살은 온갖 법에 흔들리지 말고 보시를 할 것이니 재물이나 모양에도 흔들지 말고 보시를 할 것이며 물질이나 모양에 집착지 않고 보시하되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촉감이나 이치에 집착하지 말고 보시를 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이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하지만 현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느니라.”라고 하시었다.  중생이 마음을 깨쳐 생사를 초월하는 것이지만 원리로 보면 깨치기 전부터 마음은 안 죽는 것이고 천상 지옥 등에 윤회하고 인과응보로 갖가지 몸을 받아서 깨끗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온갖 것이 다 되지만 ..

나를 찾는 법

마음의 눈을 뜨면 청천백일이고 마음의 눈을 감으면 캄캄한 밤중이다. 일체 만법이 나지도 않고 일체만법이 없어 지지도 않는다. 만약 이와 같이 알 것 같으면 모든 부처가 항상 나타나리라 생각된다.  이 우주의 본체는 불생불멸이다. 불생불멸 이든 우주의 근본원리이며 대각(큰 깨달음) 자체여서 일체 제법이 불생불멸의 기반 위에 서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원리는 좀 어려워서 지혜의 눈 아니면 보기 어렵고 불교 외에의 종교나 철학에서는 거론하지 못하며 불교의 전문 용어가 되다시피 했다.  보통의 상식으로 보면 생자필멸(生者必滅)인데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데 어째서 부처님께서는 나지도 않고 멸(없어짐) 하지도 않는다. 하셨을까. 이것을 바로 알면 마음의 눈을 뜰 수 있고 도를 깨우치게 된다. ..

사상(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없애는 방법

석가모니께서 말씀하시기를 “수보리야, 약보살이 ‘나’라는 생각, ‘남’이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 오래 산다는 생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니라. 한없이 많은 중생을 실제로 내가 제도했지만 제도했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기만 하면 보살이 아니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중생을 제도했다는 생각이 있으면 사상(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에 걸리기 때문이니라.”라고 하셨다.   여기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은 불교에서 대단히 중요한데 역시 이것을 바로 알면 마음을 깨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착한 일을 했다는 생각 이것도 ‘아상’이고 ‘나’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아무 조건 없이도 이것이 주관이 되어 다른 사람을 인정하게 되고 유정(有情) 무정(無情) 등의 온갖 객관이 나타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