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기 마당/내 이야기

사상(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없애는 방법

산울림(능인원) 2024. 10. 4. 11:34

  석가모니께서 말씀하시기를 “수보리야, 약보살이 ‘나’라는 생각, ‘남’이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 오래 산다는 생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니라. 한없이 많은 중생을 실제로 내가 제도했지만 제도했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기만 하면 보살이 아니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중생을 제도했다는 생각이 있으면 사상(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에 걸리기 때문이니라.”라고 하셨다.

   여기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은 불교에서 대단히 중요한데 역시 이것을 바로 알면 마음을 깨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착한 일을 했다는 생각 이것도 ‘아상’이고 ‘나’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아무 조건 없이도 이것이 주관이 되어 다른 사람을 인정하게 되고 유정(有情) 무정(無情) 등의 온갖 객관이 나타나게 된다.

  객관(客觀)을 전제로 인정하는 것 이것이 인상(人相)이다. 또 ‘나’ 아닌 모든 것 현상계 공산주의 자본주의 물질도 허공도 다 ‘나’는 아니니 이것들이 ‘인상’이다.

  중생상(衆生相)이란 결혼하겠다. 돈 벌고 살림살이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중생상이며 나도 남들처럼 좋은 곳에 취직하고 대우받고 아들 딸 잘 길러야겠다는 생각이 ‘중생상’이다. 즉 중생의 살림살이가 번뇌 망상이 중생상이다.

  수자상(壽者相)이란 오래 살겠다는 생각 남도 80 ~ 90살 사는데 나도 그 정도는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수자상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면서 항상 오래 살 준비를 하느라고 온갖 애를 쓰다가 준비도 다 못하고 죽어가는 것이 중생인지라 사람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죽어가고 있다는 말과 같다. 하루를 살면 수명이 하루씩 줄어가는 것이고. 1년을 살면 자기가 살 기간 중 1년을 까먹는 것이다. 그러니 듣기 좋게 말하느라고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이지 사실을 죽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도 생각을 하니까 내가 현재 숨을 쉬고 살고 있구나 하지 잠만 들어도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잠자는 것도 이것이 죽는 연습이고, 잠도 오래 자면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영면하소서 하는 것이다.

  가끔 산사에 가보면 10년 자는 사람, 50년 100년 자는 사람 누가 깨우길 하는가. 오래 자면 죽는 것이다. 우리가 영원히 살려면 잠도 적게 자고 마음공부를 철저히 해서 사상(四相)을 없애야 번뇌 망상이 없어지고 번뇌 망상이 다 사라져야 내 본래의 마음이 맑고 밝게 나타나서 해탈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성불하는 길이다.

  또 우리가 80세 살았다 해도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몇 천년 살고 싶어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큰 병들어 누워 있을 때 이 약을 먹어야 한다고 하면 쓴 약이라 해도 자주 받아 마실 것이다. 이것이 삶에 대한 애착이고 수자상인 것이다.

  일붕 서경보 스님은 사상을 이렇게 해석을 하셨다. “수보리야, 만일 보살의 마음이 이기적인 우월감에 젖어 있으면 ‘아상’이요. 배타적인 독선감에 젖어 있으면 ‘인상’이고. 우유부단한 마음을 가졌으면 ‘중생상’이다. 그리고 권위주의적인 아집에 젖은 것 같은 것이 ‘수자상’이다.”라고 하셨다.

   불교를 배우는 사람, 누구나 이 사상(四相)을 없애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살림살이 걱정 자식걱정 조금 안 하거나 덜하고 중생이 모두 우리 아버지 어머니이고 우리 아들 딸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야 잘 사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이 사상을 중시하는 것은 이것만 떨어지면 마음이 드러나게 되고 참 나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즉 ‘아상’이란 이 육체를 ‘나’라 하고 생각을 ‘나’라고 하는 가짜 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가짜 ‘나’인 아상이 있기 때문에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차례로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불교를 안다는 것은 인생을 바로 안다는 것이며 인간(人間)의 본성품을 바로 보아서 자기가 가야 할 길을 바로 가는 이는 궁극적인 우리의 목표인 보리심(개우치는 마음)을 발한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런 사람은 어떻게 그 마음을 가지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는 것일까? 간단히 말하면 사상(四相)만 없으면 된다. 인생 자체가 꿈이란 것을 알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해관계가 앞설 때는 욕심도 나고 남녀 이성끼리 만나면 이상한 생각이 일어나고 쓸데없는 꿈속 같은 일에 시달리게 된다.

   태평양 한 바다의 파도보다 더 복잡한 망상이 일어나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잘 안 되는 옳지 못한 이 마음을 어떻게 항복받느냐. 문제는 사상만 없으면 되는 것이다. 결국 사상이 있으면 중생이고. 사상이 없으면 성인이 되는 것이다.

   사상은 ‘나’로부터 벌어지는데 ‘나’란 생각은 본래부터 있는 생각이 아니고 객관을 생각할 때 ‘나’라는 생각을 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이 사람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며 우리의 주체가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지금은 어떤 물건에 대하여 좋아하는 생각을 내다가도 얼마 안 가서 싫어하고 버리게도 되는데 이와 같이 종잡을 수 없는 생각이 ‘나’ 일 수도 없는 것이다. 좋다 싫다 하고 생각을 내게 하는 근본 바탕이 ‘나’ 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물질도 허공도 아니며 산 생명이다. 따라서 이것을 둥글거나 모나거나 크기가 작다고 하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며, 모든 형상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해가 떠서 한낮이 되어 온 천하를 다 비추면 천지를 훤히 볼 수 있는데 안 보인다. 안 보인다 하는 사람은 눈을 감은 사람이다. 육체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해서 그렇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려면 전 글에서도 한 이야기지만 이 육체는 ‘내’가 아니고 본래의 마음이 진짜 나인줄을 확실하게 알아야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