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기 마당/내 이야기

상(相)에 머물지 않는 보시(布施)

산울림(능인원) 2024. 10. 13. 09:02

  《금강경》 제4 〈묘행무주본(妙行無住分)〉에서 그 마음이 머무는 바 없이 불교의 오묘한 법대로 보시한다 했는데 보시는 남에게 베푼다는 말이다. 내용을 보면 “수보리야, 보살은 온갖 법에 흔들리지 말고 보시를 할 것이니 재물이나 모양에도 흔들지 말고 보시를 할 것이며 물질이나 모양에 집착지 않고 보시하되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촉감이나 이치에 집착하지 말고 보시를 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이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하지만 현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느니라.”라고 하시었다.

  중생이 마음을 깨쳐 생사를 초월하는 것이지만 원리로 보면 깨치기 전부터 마음은 안 죽는 것이고 천상 지옥 등에 윤회하고 인과응보로 갖가지 몸을 받아서 깨끗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온갖 것이 다 되지만 마음만은 어떤 몸도 아니며 질량의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일체 현상계에 걸릴 것도 없고 아무 조건도 없는 것이다. 세상에 있는 학문, 지식, 돈, 권력, 육체, 생활 등에 얽매여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 봤자 죽음만은 면할 수 없다. 그러니 하루 밥 세 그릇 때문에 밥 못 먹으면 죽는다고 착각하여 사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이다. 그런데 밥도 세끼 중 두 끼만 먹고 나머지 한 그릇은 배곱픈 사람에게 주자. 주되 준다는 생각 없이 준다. 이 육체는 내가 아니니 마음을 찾자, 그래서 우주에 자유해 보자, 그리하여 생사도 없게 되고 의, 식, 주도 필요 없는 사람이 되어 오직 남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친다는 식으로 살아야 한다.

  이것을 가지면 이익이 되고 저것을 버리면 손해가 될 텐데 하는 망상을 버리고 살아가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보살은 보고 듣고 한 것을 꼭 기억할 필요도 없다. 그저 무심(無心)이 되어 생각이 없으면 하루종일 다니고 남과 다투거나 일을 하거나 해도 하나도 마음에 남지를 안는다. 그렇기 때문에 업(業)이 녹아버리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응무소주 행어보시(應無所住 行於菩施)가 된다. 이 말은 비록 팔만 사천 계율 다 지키고 육바라밀을 다 닦고 6도 만행을 하였더라도 이런 모든 것 다 마음에 두지 말라는 것이다.

  아무 조건 없이 보시를 행하라, 아무 조건 없이 남 위해 내 것 주고 아무 생각 없이 일도 해주고 간병도 하고 봉사하되 생색을 내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중생을 위해 무엇을 했다고 해서 잘했노라는 서투른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어법(於法)이란 말은 모든 법이란 뜻이고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그런 말이 된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할 것 없이 또 사람뿐만 아니라 일체중생에게 다 잘살게 해 주되 도와주었다는 생각 없이 행동으로 임하라는 것이다. 세상에는 물 한 그릇 떠주고도 은혜를 베풀었다고 치사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래서는 자기 굴레에 다 뒤집어씌워서 구속당하는 것이 된다. 또 한 번 생각하면 원래 있는 것이니까 나를 준 것이지 네 것을 주었느냐 해도 말이 된다고 생각해야 된다.

  원래 있는 땅에다 선을 긋고 표시를 해서  압록강 건너는 중국 땅이고, 이쪽은 우리 땅이라고 하고 멀쩡한 땅에 사람들이 분별해서 둑을 만들고 담을 쌓아서 등기를 내고 이것은 내 것이고 저것은 네 것이다, 하는 것은 불교적 의미에서 원리는 맞지 않는다. 그러니 무심한 가운데 농사도 짓고 장사도 하면서 남을 도와주고 받을 때도 아무 생각 없이 받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친구 지간 냉면 한 그릇 사주고 만날 때마다 인사치레를 하는데 “그때 그 냉면 맛있었지.” 다음에 또 만나면 “자네 그때 그 냉면 생각 안 나나.”하고 다음 또 만나면 “그때 그 냉면 내가 큰 마음먹고 산거다.”한다면 이것은 사람 미치게 만드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도 “오른손이 좋은 일을 할 때 왼손이 모르게 하라.”라는 좋은 말이 있다. 이 말을 불교적 의미에서는 도와주었다는 생각까지도 잊어버려라 한다. ‘나’다 하고 내세우지 말라는 것이다. 보시에 대해서도 시주물삼륜(施主物三輪)이 있는데 시륜, 수륜, 물륜으로 남에게 남에게 무엇을 주는 사람이나 이를 받는 사람이나 또 주고 받는 물건이 세 가지가 청청하고 조건이 없어야 한다. 이 세 가지가 본래 공적하고 청정함을 알아서 주고받는 자리가 없는 가운데 행해져야 한다. 주는 사람이 있고 받는 사람이 있으면 빚 주는 사람이 생기고 빚 갚는 사람이 생기게 된다. 무엇을 남에게 주었거나 하는 생각이 있으면 사상(四相)에 걸리게 된다는 뜻이다. 받는 사람도 생각 없이 받아야 한다. 무슨 도움을 받고 은혜를 입었다. 고맙다. 하는 생각으로 받으면 그 사람은 물건 받을 줄 모르는 사람이다. 아무 생각 없이 받아야 수륜 청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내 것이고 저것은 네 것이다. 하는 생각은 생각이고, 생사를 윤회하게 되는 근본 착각으로 생각해야 된다. 나를 내세우고 남의 땅에서 주권을 행사하려는 착각이 전생을 일으키고 혼란을 가져오는 것이다. 하루 종일 일해주고 밥이나 먹여주고 차비를 달라하면 누구든지 일을 시켜 줄 것이다. 옷은 쓰레기통에서 주어 입거나 남이 안 입는 옷 얻어서 깨끗이 빨아서 꿰매 입을 요량하면 된다. 이것을 응무소주 행어보시라 하는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금강경에서 육바라밀주의 보시에 대해서만 언급된 것 같은데 어법(於法 )에 했으니 법대로 한다면 보시뿐만 아니라 보시, 인욕, 지계, 정진, 선정, 지혜가 다 해당된다. 보시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돈이나 재물로 도아 주는 것은 재보시이고, 자식을 가지고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쳐 주는 것을 지식보시이다. 또 어려움을 당했거나 외로울 때 도와주는 것을 무외시라 한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불교진리를 가르쳐 주는 법보시가 있다. 보시 중에는 법보시가 제일이다.

  이제 《대방광불화엄경》 〈보현행원품〉에 나타난 법보시에 대해 알아보겠다. “보현보살님은 모든 공양 가운데 법공양이 가장 으뜸이니 이른바 첫째로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하는 공덕이며, 둘째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공양이며, 셋째로 중생을 섭수하는 공양이며, 넷째로 중생의 고통을 대신 받는 공양이며, 다섯째로 선근을 부지런히 닦는 공양이고, 여섯째로 보살 업을 버리지 않는 공양이며 마지막으로 보리심을 여의지 않는 공양이니라. 선남자야, 앞에 말한 물질적 많은 공양으로 얻는 공덕을 일념 동안 닦는 법공양의 공덕에 비한다면 백분의 일도 되지 못하며 백천구지 나유타분의 일에 되지 못하느리라. 무슨 까닭이며 말씀대로 행한다면 많은 부처님이 출생하시는 까닭이며 또 보살들이 법공양을 행하면 곧 여래께 공양하기로 성취하나니 이러한 수행이 참된 공양이 되는 것이니라.”하셨다.

  보시를 나누어서 불입색성향 미축법보시(不入色聲香 味觸法布施)가 있는데 첫 번째 먼저 색은 물질이다. 무주색보시란 눈에 의해 이끌리지 말고 보시하라는 것이다.

  둘째, 부주성(不住聲)이란 소리에 흔들리지 말고 보시하라는 것인데 내가 남을 도와주면 고맙다고 칭찬해 주겠지 하는 생각 없이 하라는 뜻이며 또 부주향은 향기 냄새에 흔들리지 말고 보시하지 말라는 것이고, 부주미보시는 맛을 따져서 보시하지 말라는 것이며, 부주촉 보시는 촉감에 흔들림 없이 보시하라는 것이다.

  다음은 부주법보시로 일체만법을 다 설해주고 좋은 방편으로 제도해 주지만 진리가 꼭 이런 것이다라고 결정적 고집을 버리고 가르쳐 주고 인도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설법해 줘서 도움받은 사람이 있겠지 하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

  누구든지 상(相) 애 머물지 말고 객관의 현상에 대해 집착 없이 보시하면 그 복덕은 불가사랑이 된다. 이와 같이 부주성향미촉법(不住聲香味觸法)하고 보시하면 이런저런 생각 다 없어지고 정말 무심도인이 되는 것이며 사람 사는 방법을 알게 되어 어떤 직업에 종사하던지 편히 잘살고 자연히 충효도 되고 상대를 위해 조건 없이 봉사하게 되는데 이는 인아상(人我相)이 무너져 버렸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위와 같이 보시한 공덕을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동쪽 허공을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하시고 “남서북방 위아래 허공을 헤아릴 수 있느냐.”하고 수보리에게 물으셨다. 허공은 무한대의 제일 큰 공간이고,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대이니 감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상(相)에 머물지 않고 하는 보시도 이와 같아서 그 복덕이 한량이 없다 하신 것이다.

  중생이 다겹생래로 얼마나 많이 집착해 왔는가. 엄청나게 상(相)에 끌리면서 자기가 현제 얼마나 많이 집착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집착하고 있으니 한심한 것이다. 우리는 먼저 내가 얼마나 물질 등에 집착하고 있는가를 살펴서 알아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실상반야 아공(我空), 법공(法空) 구공(具空 )을 깨달으면 다음에는 보시하라, 그리고 육바라밀을 행하라. 그냥 실상반야만 지키고 있으면 소승 나한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요즈음 참선하는 수자승들이 보시 지계 인욕 정진은 하지 않고 참선 하나만 제일이라고 해서 복도 짓지 않고 중생제도도 안 하는 것은 문제라 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반야가 제일이지만 보시하고 계행도 지키고 인욕도 하여 남이 뭐라고 육을 보이더라도 다 참아야 되는데 참았다는 생각까지도 없이 참아야 된다. 업장 녹이는 데는 인욕이 제일이다.

   칭찬을 해도 들은 체 만 체 남이 욕을 하며 때려서 반 죽음이 되었더라도 왜 그러느냐고 말할 것도 말할 필요도 없다. 몸이야 천만번 죽더라도 진짜 나하고는 관계가 없는 일이니 공연히 성내어 생사심만 더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물질이나 소리나 냄새나 촉감이나 생각에 흔들리지 말고 보시하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