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눈을 뜨면 청천백일이고 마음의 눈을 감으면 캄캄한 밤중이다. 일체 만법이 나지도 않고 일체만법이 없어 지지도 않는다. 만약 이와 같이 알 것 같으면 모든 부처가 항상 나타나리라 생각된다.
이 우주의 본체는 불생불멸이다. 불생불멸 이든 우주의 근본원리이며 대각(큰 깨달음) 자체여서 일체 제법이 불생불멸의 기반 위에 서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원리는 좀 어려워서 지혜의 눈 아니면 보기 어렵고 불교 외에의 종교나 철학에서는 거론하지 못하며 불교의 전문 용어가 되다시피 했다.
보통의 상식으로 보면 생자필멸(生者必滅)인데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데 어째서 부처님께서는 나지도 않고 멸(없어짐) 하지도 않는다. 하셨을까. 이것을 바로 알면 마음의 눈을 뜰 수 있고 도를 깨우치게 된다. 우리들은 금강경 같은 마음의 법문을 어렵게 생각하는데 가만히 생각하면 아주 쉬운 것이다. 바로 불생불멸은 우리 마음을 말한 것이다. 나의 본마음을 빼놓고는 모두가 무상한 것 아닌가. 변하고 없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본래 마음은 부모가 나를 낳아주기 전부터 있었고 천지가 생기기 전부터 있어 왔던 것이다. 우리가 인연따라 나고 죽고 한 것은 모두 몸뚱이가 한 것이다. 그리니까 진짜 나는 마음이니 불생불멸인 것이다. 나아가 이 우주가 다 불생불멸이라 하는데 일체만법이 불생불멸이라면 이 우주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상주불멸(常住不滅)이다. 그래서 이 우주를 상주법계(常住法界)라 한다. 항상 머물러 있는 법의 세계라고 법화경에 이르기를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물러서 세간상 이대로가 상주불멸이라.”라고 했다.
세간상이란 시시각각으로 생겼다 없어졌다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겉보기에 그렇고 실지 내용은 상주불멸이다. 이것이 화엄경에 제법실상론(諸法實相論)이니 ‘모든 것의 참모습’이다. 화엄경에서는 무진연기론(無盡緣起論)이라 하는데 불생불멸인 동시에 전체가 또 융화해서 온 우주를 구성하고 아무리 천 번 만화 하더라도 불생불멸 그대로이며 상부법계(常住法界) 상주불멸(常住不滅) 그대로인 것이다. 이것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러나 육체 본위의 생활을 버리고 마음 본위의 생활이 본래의 인생이다. 요는 마음자리 하나 밝히자는데 수많은 정이 나오고 수많은 비유와 방편이 동원된다. 중생들이 못 알아들으니까 구구절절 반복되는 것을 경들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나를 찾는데 예로서 먹물은 본래 검은 것이기 때문에 지구상의 먹을 다 모아 갈아도 하얗게 될 수는 없는 것같이 물질이나 허공은 아무리 천 층 만 층높이 쌓아 보아도 그것이 듣고 보고 행각(행동으로 깨우치는 지혜) 할 줄 모르니 역시 ‘나’는 아니다.
그와같이 물질적 요소로 이루어진 육체도 무엇을 보고 듣고 생각할 줄 모르니 오직 이 마음이 보고 싶어야 보고 듣고 생각할 줄 모르니 오직 이 마음이 보고 싶어야 들을 수 있다. 눈으로 본다. 하지만 눈은 하나의 카메라 렌즈 같은 존재다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확실히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장에서 수많은 사람과 물건이 널려 있지만 보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건성으로 보게 되고, 보아도 무엇인지 모른다. 보고자 마음을 먹어야 5미터 앞에 기어가는 개미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듣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대중 가운데 수많은 사람이 말을 해도 듣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무슨 소리인지 모른다. 그러니 마음이 보고 듣는 것이다. 육체는 내가 아니고 나의 것일 뿐이다. 마음은 육체도 아니고 모든 것을 다 초월한 자리, 차원 이전이고 태초 이전이다. 물질을 초월한 것이며 온갖 생각의 주체이다.
마음이 뭐냐고 한다면 정확히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말과 글로써는 정확히 표현할 수 없다. 설명하자니까 할 수 없이 말과 글로써는 정확히 표현이 불가할 수 있다. 설명하자니까 할 수 없이 말과 글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방향을 제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 불보살께서 제시하신 방향에 따라 우리 스스로가 이해하고 깨달아 들어가야 된다.
‘달’이 저기 있다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달을 보아야지 손가락만 보면 안 된다. 또 깨달았다. 견성(見性)했다 하는 것은 소위 밥 먹고 자고 일어나 일할 줄 아는 자기를 깨우친 것이니 사상(四相)을 없앤다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부처님께서 깨우치고 보니 출가하려고 할 때 애쓰던 그 마음 그대로이고 싣달다태자 때 그대로의 마음이다. 다 그대로인데 단 그전에는 까맣게 몰랐던 것을 깨친 것이다.
이 육체 말고 본래의 마음 그대로 사상을 떠난 진실상이 마음이겠구나 하고 이해가 될 때 그래서 우주의 대자유인이 되고 전지전능한 부처님이 될 수 있다고 믿어지는 이 마음을 깨쳤다고 하는 것이다.
악한 것이나 선한 것이 인간의 본 성품일 수는 없으니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은 망상이 일어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깨치지 못한 것만 걱정하면 된다. 그렇다고 빨리 깨치기를 바라는 마음도 망상이다. 망상을 일부러 안 일으키려면 오히려 더 일어나니 망상이 일어나는 것은 내버려 두고 망상도 내가 일으키는 것이지 망상 저 혼자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아무 생각 없이 참선이든 명상이든 그것만 계속하면 망상이 살아질 것이며 언젠가는 깨치게 될 것이다.
사람이 전생에 공을 많이 닦아 놓았으면 금생에 깨치고 공이 적으면 태생이나 그 후생에 깨치게 되는데 하여튼 깨치는 날까지 참선이나 명상을 끊임없이 해야 된다. 그러면 내생에도 이어져 결국 깨치게 될 것이다. 또한 복도 많이 지어서 내생에는 큰 복인으로 태어나고 머리도 총명하게 될 것이다.
육조 대사께서는 응무소주 이생기심(𥌾無所住 而生其心)하는 소리를 듣고 깨치셨는데 이것은 번뇌망상 없이 살아라. 사상(四相)에 매달려 살지 말고 그저 상(相) 내지 말고 살라 한 것이다. 아무 모양 주의 주장 그런 것 개의치 말고 지금까지 세속적으로 배운 것 다 청산해 버리고 깨끗하고 빈 마음으로 살아라 하는 뜻이다.
욕심이 없어지고 아무 생각이 없게 되면 사물이 제대로 보일 것이다. 우리가 염심(染心 : 물든 마음)을 가지고 사람과 물질을 대하니 진리대로 보이지 않는다. 남의 말을 들어도 자기가 기분 좋을 때는 그 말이 좋게 들리고 기분 나쁠 때는 나쁘게 처리되는 수가 있으니 이것은 마음이 물들어 있어 그렇다.
나는 물질도 허공도 아니니 자살할 수도 없다. 누가 나를 죽일 수도 없으니, 죽으래야 죽을 방법이 없게 된다. 그 주체가 이렇게 글도 쓰고 말도 하고 있는 이것이 내 마음이다. 거듭 말하니 항상 육 근에 매여 살지 말고 나다 남이다 하는 생각 내지 말고 걸림 없이 살아야 중생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마음이 일체 객관을 상대하지 말아야 하니 부처는 사바도 생각이 없으며 있고 없는 겁도 떠나 좋고 나쁜 것도 상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경지에 들면 자신마저 없는 무아의 상태가 된다. 내가 없으니 모든 대상을 초월해서 본마음만 있는 것이 된다. 무상(無常)이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란 말이 아니고 마음이 객관을 상대하지 않는 것인데 일체 잠재의식까지도 끊어진 상태이다. 그러면서도 살아 있으며 모든 것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상(相)을 여의는 이야기를 하고 아공(我空) 내가 없고 법공(法空) 이치도 없으니 법에 집착하지 말고, 구공(俱空) 공했다 잊어버렸다는 생각까지 또 잊고 떠나야 완전하게 된다. 그러니 생로병사도 진짜로 있는 것이 아니고 거짓되고 그림자 같고 꿈같은 것이다. 상이 없어 지내는 도인을 오늘 만났다. 내일 다시 만나면 또 첫인사를 하게 된다. 옛날에 참선하는 스님이 3년간이나 같이 공부하다가 헤어지고 몇 달 안 되어 다시 만났는데 처음 만난 사람같이 초면 인사를 했다는데 어디 한번 본 사람 같은데 잘 모르겠다고 하는 그런 식이다. 이것은 아무 생각 없이 사람을 보아 왔기 때문에 보아도 본 것이 아닌 경지가 되어 그러한 것이다. 무슨 일을 해도 생각 없이 하면 지나고 나서 그 일을 했든지 안 했든지 잘 모르게 된다.
불교 공부를 하는 사람은 이제까지 보고 들은 것은 나에게는 다 쓸데없는 것이고 거짓말이다라고 알아서 과학이니 철학이니 종교니 뭐니 뭐니 하는 것들은 다 떠나서 오직 이것 마음하나 깨칠 때까지 다른 생각 전혀 없어야 한다. 이것이 상(相)을 떠나는 방법이다. 이 마음 하나 깨치면 인생 문제를 통째로 해결한 것이고 근심 걱정 노, 병, 사가 없어져서 열반적정의 대해탈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래와 같이 세상을 볼 것이다. “화엄경” 제6권 (주 : 해탈장자를 찾자)에 보면 ‘선남자야 내가 능히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과 나라의 장엄과 신통한 일들을 보지만 쫓아오는 데도 없고 머무는 곳도 없으며 나가는 데도 없고 행하는 곳도 없느니라. 그것은 모두 부처님이나 나의 마음이 모두 꿈과 같음을 아는 까닭이다. 하시고 꿈속에서 보는 것이 모두 분별로부터 나는 것처럼 모든 부처님을 보는 것도 자기의 마음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또 자기 마음은 그릇 가운데 물과 같고 모든 법은 아는 것이 물 가운데 그림자와 같은 줄을 알며, 자기 마음은 환술과 같고 모든 법은 환술로 만든 것과 같은 줄을 알며 또 자기의 마음과 부처님과 보살이 모두 메아리와 같은 줄 아니 이렇게 부처님을 보는 것은 모두 메아리와 같은 줄 알아야 되니 이렇게 부처님을 보는 것은 모두 자기의 마음에서 비롯된 줄을 알아야 한다 사람의 말나식(末那識)은 생각하여 행동하며 뜻으로는 분별하고 눈, 귀, 코, 입, 몸이 오관으로는 바깥 경계를 알아 분별하는 것이니 범부들은 노병사(老病死)를 무서워하고 열반에 들어갈 줄 모르며 생사와 열반을 알지 못하고 온갖 경계에 허망하게 분별을 일으키게 되니, 불보살은 스스로 증득할 적에 ’아뢰아식‘을 돌려서 본각의 지혜를 얻는 것이다.
범부들은 삼계가 모두 마음으로 인하여 생긴 것인 줄을 모르며 다시 말하자면 삼세제불이 모두 자기 마음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것인 줄을 알지 못하고 밖에 있는 다섯 경계(물질, 소리, 냄새, 맛, 촉감)를 보고 참으로 있는 것이라고 고집하니 소와 양들이 깨달을 줄 몰라서 생사에 헤매며 뛰어날 줄 모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선남자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모든 법은 아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삼(三)세도 없다 하셨으니 왜냐하면 자기의 마음으로 다섯 경계를 나타내는 것이어서 본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마치 토끼의 뿔과 같은 것이다. 성현들의 깨달은 경계가 이러한 것이거늘 범부는 허망하게 분별을 일으켜 없는데서 있다 하고 있는데서 없다고 고집하는 두 가지 소견에 떨어지게 된다. 이것은 모두 자기의 마음으로 분별을 일으킨 것인 줄 알아야 할 것이다. “ 위 내용은 화엄경에 나타난 ’나‘를 찾는 방법을 일부 살펴보았는데 중생이 사상(四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망심(妄心)으로 세상을 보는 까닭에 진실을 보지 못하고 마음의 작용에 따라다니면서 이것이 옳고 그른 줄을 모르니 시시때때로 마음을 성찰해야 될 것이다. 그래서 상(相)이 있음을 인정하고 상을 버리는 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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