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살이를 하면서 못 가진 것이 많은 것 같아도 가진 것 또한 많기 때문에 가진 것만 잘 운영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항상 원하는 것을 누릴 수가 있다. 오히려 가진 것을 다 못 누릴 경우도 많다. 그러니 항상 못 가진 것만을 위해서 노력하는 습관 때문에 못 가진 것을 갖게 되는 순간 괴로움이 살아져야 하나 또 다른 못 가진 것을 갖기 위한 괴로움에 스스로 빠지기 쉽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가진 것부터 우선 바로 써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바로 쓰게 되면 가진 것은 즐거움을 부르고 즐거움은 또 즐거움을 가져오게 된다. 즐거움이 커지면 선한 힘이 되어 못 가진 것을 구하는 괴로움을 지우는 새 에너지로 변하여 편안한 길을 가게 하며 못 가진 것을 쉽게 얻을 수 있게 한다. 항상 가진 것을 쓰면서 누리는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못 가진 것도 못 가진 그대로 긍정적으로 쓸 수 있게 된다.
아는 것을 쌓아서 이를 바탕으로 모르는 것을 얻어야지, 만약 모르는 것만에 집착해서 괴로워하다 보면 즐거움마저도 잃어버리고 소멸하게 된다. 내 속에 모든 것이 다 있으나, 내가 모르는 것은 그것을 드러내는 기술, 즉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기술을 연마하여 닦아가듯 지혜도 불법을 통하여 열심히 닦아 나가야 한다. 즉 커다란 틀 속에는 부처님도 있고 탑도 있고 각양각색의 모양들이 다 있지만 이를 조각하여 드러낼 기술이 없다면 그냥 한낱 돌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것과도 같다.
남편이 화를 내면 화내는 모습 보기를 원치 않는 나는 화내는 것이 싫을 뿐인데 잘못 착각하여 화를 내는 남편 그 자체를 싫어하게 되어 남편을 버릴 수 없기에 대신 죽을 때까지 남편이라는 괴로움 덩어리를 부둥켜안고 살게 된다. 남편이 싫은 게 아니고 남편의 화내는 모습이 싫은 것이니 화내는 모습을 지우는 지혜를 배우면 될 것이다. 즉 얼굴에 검정이 묻었다고 얼굴 그 자체를 더러워하며 머리를 잘라 버리는 그런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는 것처럼 그 자체를 더럽히는 감정, 그것만 없애면 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열 개 중 한 개만이 나쁜데 이 한 개를 좋게 하기 위해서 괴로운 생활을 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열 개중 세 개가 나빠도 있는 일곱 개를 가지고 세 개를 좋게 만드는 노력을 하기도 한다. 이는 자기 마음속 입자가 실체적이고 객관적인 현상과는 달리 자기 욕심의 지표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즉 열 개중 한 개가 모라자면 마음속 입자의 90%는 만족하고 10%만 불만족한 괴로운 상활을 이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반대로 밖으로 나오는 신, 구, 의의 삼업은 90%가 괴로운 모양을 짓고 90%의 시간이 괴로움 속에 잠길 때도 있다. 때로는 아직 열 개 중 한 개만 이루고 나머지 아홉 개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마음의 입자는 이와는 반대로 90%가 기쁨과 보람과 자신감으로 차 있고 10%만이 불안과 초조와 의심으로 남아 있게 된다. 이에 따라 90%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긍정과 긍지를 키우는 업을 짓고, 나머지 10%만이 조심하며 자중하는 업 속에서 부정적인 상황에서 벗어나려 하기에 쉽게 보람을 증장시키고 이룰 수 있다.
문제는 있는 것에서 비롯하여 키우고 나아가서 없는 것을 채우며 가꿀 것인가? 아니면 없는 것에서 없음을 찾아내어 없는 것을 메꾸며 살아갈 것인가? 하는 데 있다. 예를 들어, 건강하고 착하며 형제와 친구 간에 우애가 좋으며 말 잘 듣고 예의가 바른데 다만 공부 한 가지 잘못하는 아이가 있다 할 때 그 부모가 다른 좋은 장점은 다 놔두고 아직 이루지 못한 공부에만 집착하여 그 부족한 점을 메꾸려고 아이에게 “공부해라, 공부부터 해라라고 성화를 한다면 아이는 얼마 못 가서 아이는 성격이나 행동 까지도 나빠져 버릴 수도 있다 우선 형제간에 있어서 형이 공부를 잘하기 때문에 나보다 더 대접받는다 하여 우애에 금이 갈 수 있으며, 또 학교 가서는 집에서 부모로부터 공부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에 의해 그동안 잘 사귀던 공부 잘하는 아이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시기 질투하고 반목하게 돼서 결국에는 미래에 사회적인 밑천이 될 교우관계를 잃어버리게 될 수도 있다. 날이 갈수록 점점 부모 보기를 피하고 두려워하여 부모가 무슨 말을 하여도 한 번에 바로 ”예“하고 대답하기는커녕 대들거나 뒤틀리기 일쑤일 줄도 모른다. 아마 어른도 똑같은 일을 가지고 하루에도 수십 번 반복되는 소리를 듣는다면 그 말이 천만 번 옳다 해도 옳은 감정으로 들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변하게 되면 이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공부도 못하는 주제에 말썽만 피운다며, 아예 착했던 아이를 문제아로 만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문제아가 되지 않는 내성적이고 음성적인 아이들은 이제 걸핏하면 아파서 부모를 괴롭히기가 쉽다. 즉 공부 못한다는 하나의 괴로움을 없애려다 오히려 그 괴로움을 전체적으로 확산시켜 버린 결과가 오게 된다. 그러나 만약 거꾸로 아이의 좋은 점을 칭찬과 격려하며 희망과 용기를 북돋우면서 키운다면 좋은 점이 훨씬 많기에 나쁜 점 하나 정도는 쉽게 극복될 수 있다. 설령 공부를 끝내 부모 욕심만큼은 못했다 하더라도 부모가 정성을 들인 만큼 스스로 노력하게 될 것이고, 또한 좋은 점은 더욱더 신장되어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오히려 공부를 잘했던 아이보다도 더 잘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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