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동안 교편을 잡고 있던 선생님 한 분이 계셨는데 그만 어쩌다 남의 물건을 훔쳐 팔다가 잡혀서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은 분노하고 증오하고 미워하면서 온갖 궂은소리들을 다하게 된다.
“왜 그처럼 그를 증오하십니까?”
“아니, 선생님이 그럴 수가 있어요?”
“선생님이 왜 도둑질을 합니까?” 도둑놈이 도둑질을 하는 사람은 도둑일 따름입니다.
그런데 속마음에서는 선생님이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도둑질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 착각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도둑을 도둑으로 바로 보지 못하고 오히려 이 일을 이용해서 평소 자기 욕심에 차지 않는 선생님에 대한 불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복이 많아서 인연 있었던 자기 아이들의 선생님들이 자신의 욕심에 만족하였다면 아마도 “왜 선생님께서 그랬을까? 거기에는 필경 말 못 할 남모를 사정이 있을 거야.” 하며 동정을 할지도 모른다.
신문에 난 기사를 본 어떤 사람이 “아니 스님이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고 여자랑 여관에서 잠을 잘 수가 있어요?” “어떻게 스님이 그럴 수가 있습니까?”하며 마치 자기 남편이 바람피우고 못된 짓 한양 진심으로 분노하기도 한다.
“스님이 아니니까 그렇겠지요.”
또 신문 기사에 난 살인사건을 보고
“목사가 사람을 죽여도 됩니까?” “목사가 그래도 됩니까라고 하기도 한다.
스님이 어떻게 계행을 어기고 술 먹고 나아가 남의 여자와 잠까지 잘 수 있으며, 목사가 어떻게 사람을 죽이겠습니까? 목사 아닌 사람이 밥 벌어먹기 위해 목사인 양 하며 살다가 그런 것이고 스님이 아닌 사람이 스님 행세하며 밥 벌어먹고 살다 일반인처럼 그런 것이겠지라는 생각을 한다면 쉬운 이야기가 된다.
이는 마치 도둑놈이 도둑질을 하기 위해 위장으로 경찰옷 입고 못된 짓하는 것을 그 본질은 보지 못하고 끝까지 경찰로만 보고 ”경찰이 이래도 되나? “하고 분노하는 것과도 같다. 수행자가 계를 어기면 그 지위를 잃게 되어 마치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선생님도 도둑질을 하여 그 사회적 공분에 맞지 않는 모습을 지니면 스스로 선생님의 지위를 버리고 도둑으로 전업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선생님이라도 도둑질을 했으면 도둑일 따름인데 굳이 선생님이라고 못 박아 놓고 선생님이 도둑질까지 한다며 분개하고 더 나아가 세상 원망과 세상 탓까지 하며 자기 뜻대로 못 살아온 세상에 대한 감정풀이를 마구 하게 된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스스로 착각 속에서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의 어리석음(痴闇重罪 : 어리석어 문을 닫은 무거운 죄)을 바로 보아야 한다. 왜 병이 생겼는지를 모르는데 어떻게 병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스스로 악을 선이라 정해놓고 그 속에서 괴로워하는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선하게 살려는 자기 의지와는 달리 선을 그어 놓고 자기도 모르게 짓는 악업을 바라보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까운 사람끼리 다툼이나 언쟁을 벌일 때 그 목적을 보면 서로 더 좋아지고, 더 잘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짓는 업들은 서로 얼굴 구기고 큰소리치며 서운한 말이나 나아가서는 원심을 쌓을 말조차도 서슴지 않을 때가 많다. 이는 스스로 선한 목적 뒤에 악업을 숨기는 어리석음을 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다 보면 어떤 것이 선인지 어떤 것이 악인지 혼돈이 생기게 된다. 내 마음이 착하니 짓는 업이 악해도 나는 착한 사람인가? 아니면 내 마음이 사악해도 짓는 업이 선하니 나는 착한 사람인가?라는 생각으로 옳지 못한 마음을 바탕으로 두거나, 바르지 못한 업을 지으면서도 여기서 어리석게도 착한 인간 놀음을 하려고 한다. 이는 착한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이 착하면 짓는 업도 착하고 짓는 업이 착하면 모든 것이 원만하고 구족(舊族 :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온 지혜 높은 집안) 된다.
친구가 내 귀중한 돈 천만 원을 떼어먹고 소리도 없이 도망을 가서 자취조차 없을 때 ”어떻게 믿었던 친구가 나를 그렇게 배반할 수가 있나 “하며 마구 원수를 대하듯 원망을 하기 시작하게 되면 어찌하여 친구가 나를 배반합니까? 친구가 아닌 원수이니까 은해를 갚기는커녕 나를 수렁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큰일 날 뻔한 줄 알아야 한다. 그를 끝까지 친구로 알고 속았다면 더 큰 것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끝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이때는 빠르게 친구가 아니고 사기꾼임을 인식해야 된다. ”내가 사기꾼을 친구로 잘못 알았구나. 그 돈만 떼인 것이 다행이구나. “라고 해야 된다. 정말 친구로 생각한다면 돈 천만 원을 어떻게 가져갔든 그 돈 때문에 친구를 원수로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친구를 돈 천만 원에 팔아먹는다면 그 사람이 진짜 원수가 된다. 그것은 모든 것을 초월한 절실한 친구가 아니다. 돈 때문에 만났든지 사업상으로 만나 서로 욕심과 잇속의 뜻이 맞아떨어져 친구라는 명분을 앞세워 서로 짝짜꿍으로 지내오다가 차츰 욕심을 들키고 속셈이 맞지 않아 이제 별 볼 일 없다고 하나는 천만 원 챙겨서 도망가고, 하나는 그 돈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래도 조금 더 미련 두는 어리석은 욕심놀이를 하고 잇는 것이다. 애초에 친구 속에 돈이 있었다면 돈이 없어도 친구는 그대로일 것인데, 돈 속에 친구를 담았으니 돈이 사라지면 친구도 함께 사라지고 다만 내 돈 훔쳐간 도둑놈만 친구 대신 남게 된다. 돈은 있다가도 없는 것이니까 언젠가는 다시 생길 수 있지만 친구란 한번 잃으면 그만이니, 이 사람은 자기 돈욕심 때문에 돈 잃고 돈으로 얻을 수 없는 귀중한 친구까지를 잃는 것이니 정말 바보 같은 인생을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태껏 같이 살아왔던 좋은 시절, 좋은 사람이 아깝다면 스스로 이를 버리지 않는 배려와 지혜를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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