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기 마당/내 이야기

신령스러운 광명 1(경봉스님 법문중에서)

산울림(능인원) 2025. 4. 10. 19:33

  법좌에 올라 주장자를 세 번 내리치고는

  雨過山靑(우과산청 : 비 개인 뒤 산빛이 새롭고)

  春來花紅(춘래화홍 : 봄이 오니 꽃이 붉다)

  帶月寒松(대월한송 : 달이 차가운 솔가지에 걸리고)

  搖風庭栢(요풍정백 : 바람은 뜨락 잣나무를 흔드네)

  비가 오기 전보다 비가 지나간 뒤의 산빛이 곱고, 봄이 오니 꽃만 붉은 것이 아니라 만물이 모두 봄빛을 띠어 찬연하다. 화가의 눈에도 산빛이 하루라도 몇 번씩 변하고, 바다 물빛도 몇 번이나 바뀐다. 바뀐다고 한다. 바람이 잣나무를 흔들고 달이 차가운 솔가지에 걸려 있는 풍광을, 잘 아는 것이지만, 부처님의 진리 법문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누었던 주장자를 여러분들에게 보이고 법상을 세 번 쳤는데, 이것이 법문이다. 이 주장자를 보아라 죽은 송장에게 아무리 보인들 송장이 볼 수 있나, 주장로 법상을 “탁” 치는 이 소리를 귀로 들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귀로 듣기를 사람 소리, 말소리, 물소리, 새소리 등 온갖 소리를 듣고는, 저 소리가 무슨 소리라고 분간을 할 수 있지만 “탁” 치는 이 소리는 분간할 수 있겠는가. 이 무슨 도리인가? 공부를 해야 알지 그렇지 않고는 수없이 들어도 모른다. 우주 만물이 사람들에게 편리하게 만들어져 있는데 푸른 산에는 초목이 있고 꽃이 피고 새도 울고 온갖 것 물과 돌, 이 모든 것을 사람들이 수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는데 그 수용하는 근본 자체는 모른다.

  모든 상대적인 이변(二邊)을 떠나서 대자유 대자재(大自由 大自在)를 얻어 온좌(穩坐)하여 영원히 살 수 있는 진리가 분명히 있건마는, 그러한 진리가 있는지 없는지 조차도 모른다. 우주 만물에 불법이 다 있는데 어떤가 하면, 생활이 불법이요 우리의 모든 행동이 불법이지 불법이 어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공기 가운데 전기와 전자는 사람에도 통하고, 나무에도 통하고 돌이나 물에도 통하고, 삼라만상 어디에도 통하지 않는 곳이 없듯이 불법의 진리도 그렇다. 이렇듯 진리는 보편화한 우리 일상생활 주변이 온통 그대로인 것을 자기의 지혜가 넓지 못하고 안목이 어둡기 때문에 통찰하지 못하는 허물이 있는 것이다.

  백천 시냇물은 모두 바다로 향(極)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삼라만상은 허공으로 극함을 삼는데 천삼라지삼라(天森羅地森羅)의 모든 만물은 허공으로 극칙(極則)을 삼는 것이다. 육범사성(六凡四聖)은 부처님으로 극함을 삼는다. 명안납자(明眼納子)는 이 주장자로 극함을 삼는다. 종사(宗師)가 짚고 다니는 납자(衲子)가 들고 다니는 이 주장자로 극함을 삼는다. 그러니 이 주장자가 어찌 극함이 되는가? 만약 어떠한 사람이 이 도리를 얻으면, 나는 그 사람에게 두 손으로 이 주장자를 분부(分符) 하겠다.

  不如閑倚禪床畔(불여한의선반 : 한가로이 선상에나 기대고 있을 것을)

  留與兒孫指路頭(유여아손지로두 : 주장자를 말함은 후학에게 길을 가리키기 위해서다)

  처음 출가하여 고향의 대중사(大中寺)에서 은사님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님은 늘 경정(慶典)만 보고 있지 참선은 안 한다. 글을 아무리 들여다보고 있어 봐도 그래가지고는 부처님이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꽃을 들어 보인 소식과, 그리고 오늘 내가 법상에서 아무 말 없이 있다가 주장자로 법상을 “탁”하고 친 이 소식은 알 수 없는데 문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격식 밖의 것이다. 그래서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선지식(善知識) 스님을 찾아 은사를 하직하고 떠났다.

  행각을 하고 다니다가 대선지식인 백장화상(伯丈和尙)을 만나 도를 깨닫고, 본사(本寺)에 돌아오니 은사가 물었다. “그대는 내 곁을 떠나가서 무엇을 익히고 왔는가?” “아무런 일도 익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중과 함께 머물며 일을 돌보고 있었고, 은사는 여전히 예전 그대로 경을 펴놓고 조백(糟粨)만 씹고 있었다. 조백이란 말은 깨로 기름을 짜고 남은 깻묵을 말하는데 문자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기름은 안 먹고 깻묵만 씹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 스님이 문자에만 끄달려서 매일 경만 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은사가 목욕을 하다가 선사에게 등을 밀라 하니 선사가 등을 밀면서 말하였다. “좋은 불전(佛殿)인데 부처가 영검치 못하는구나.” 그의 스승이 고개를 돌리니 선사가 또 말하였다. “부처는 영검치 못하니 광명은 놓을 줄 아는구나.” 그의 스승이 창가에서 경을 읽는데, 벌이 들어왔다가 창문에 부딪치면서 나가려고 애쓰는 것을 보고 선사가 게송을 지었다.

    靈光獨露逈脫根塵(영광독로형탈근진)

    體露眞常不拘文字(체로진상불구문자)

    眞性無染本自圓成(진성무염본자원성)

    但離妄綠卽如如佛(단란망록즉여여불)

  신령스러운 광명이 홀로 빛남이여 영원히 곤진(六근六塵)을 초월한 자리어라

  마음 본체가 진상을 드러내어 무엇엔들 거리끼랴

  참된 성리란 더럽혀지지 않아 본래부터 뚜렷이 이루어졌네

  다만 허망한 인연만 떨쳐버려라 곧 여여(如如)한 부처이다.

  아무 생각도 없는 소소령령(昭昭靈靈)한 그 자리는 홀로 드러나 있다. 육근(六根)과 육진(六塵)에 무슨 때가 있겠는가. 이 당체(當體)가 아무 망상 없는 이 자리를 늘 노축시키고 있으니, 비단 문자에만 걸림 없는 것이 아니라. 생사(生死)에도 걸림이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