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려고 하는 이 자리는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일체 상대적인 것이 떨어진 자리이다. 계절은 춘삼월 호시절이라 우주에 춘광이 도래하여 시냇물은 잔잔히 흘러가고 꽃은 웃고 있고 새는 우짖는데, 선창(蟬窓)에 일주청향(一炷淸香)의 노연(爐煙)은 우리 집의 묘한 풍광이고 곧 다함없는 진리이다. 봄이 오니 새 우는 소리도 봄에 우는 소리가 다르다.
겨울에는 추워서 근근이 움츠리는 소리로 우는데 봄에는 아주 활발한 활짝 핀 울음소리다. 물은 잔잔히 흘러가고 산꽃은 웃고 들새들이 노래하는 여기에 법문이 있다. 법문은 법사의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삼라만상이 모두 법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聲前眉語傳(성전미어전) : 말하기 전에 눈썹말을 전하고
黙然眼微笑(묵연안미소) : 묵연히 눈으로 미소를 짓네
목격(目擊)에 도존(道存)이라, 눈이 마주치는 곳에 도가 있기 때문이다. 가만히 참선하고 있는 것이 극락세계 소식이고 이것이 안락처요 이것이 불경계(拂境界)에 들어가는 것이다. 탐심 진심 모든 망상을 다 쉬고 모든 생각이 붙으려고 해도 붙을 수 없는 그 경지 천진난만한 동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가 마음이 항상 편해야 하고 몸은 바쁘더라도 마음은 태연 부동해야 한다. 마음이 바쁘면 몸도 바쁘게 되니 몸은 바쁘더라도 마음은 태연해서 안락처를 얻어야 한다. 지극히 고요한 데 들어가면 편안한 것이 들어와서 몸도 편안하고 마음도 편안해진다. 그런데 속이 분별망상의 도적이 들어 있으니 항상 불안한데 그것을 없애고 가라앉히고 쉬어야 몸과 마음이 편안해진다.
지극히 고요한데 들어가면 편안할 뿐만 아니라 내 몸과 마음이 백천일월(百千日月) 보다도 더 밝아지고 백천 바닷물보다 더 많아지는 이러한 경지가 들어온다. 지극히 고요한 경지에 들어가면 맑아지고, 맑아지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통한다. 이 자리가 사람마다 다 있는 것인데, 자기가 잘못해서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픈 것이다. 마음이 바르면 모든 일이 편안하고 즐겁다.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자연히 불안이 생기고 몸과 마음이 불안해지는데, 마음이 바르고 맑으면 항상 편안하고 즐거워지는 것이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고 부처님 말씀이다. 또 바르지 못하면 위태롭고 근심이 있다. 몸을 바르게 해야 한다. 몸을 아무리 바르게 앉고 서드라도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바른 게 아니다. 몸이 바르고 말을 바르게 해야 한다.
공부하는 사람은 지혜가 있어서, 무슨 말을 들으면 그 말이 어디에 떨어지는지 그 말의 낙처(落處)를 안다. 그 말을 무엇 때문에 끄집어 냈는지 말을 다 안 들어도 안다. 정신수련을 하면 모든 면에 통찰력이 빨라지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금을 캐면 금속에 은도 들어 있고 철과 연도 들어 있는데, 잡철을 다 빼고 이십사 금이 되면 전 세계에 통용되는 보배가 된다. 보검을 만드는데도 쇠를 불에 넣어 달구어서 자꾸 두드려 쇠똥을 모두 빼내고 쇠의 정수만 남아 두드려도 아무런 잡철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두드려서 다시 불에 달구어 최후에 물에 담가 건져 낼 때에 온도가 덥지도 차지도 않는 순간에 건져내는 그것이 묘가 있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보검이 나오게 된다.
우리가 본래 천진난만해서 아무 생각도 없는데 탐, 진, 치 삼독과 팔만 사천 가지 번뇌를 일으켜서 모두 잡철이 붙듯이 붙어 있다. 우리가 불교를 믿어서 마음도 바로 하고 그 마음속에 아무 잡된 생각이 없으면 순금이 되고 보검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바른 뜻을 가지고 자비를 베푸는데, 자비는 즐거움을 주고 괴로움을 없애주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보살이 행하는 마음이다. 보살이라고 하는 것은 요달 하여 본다(了見)는 뜻이다. 그렇게 해서 욕되는 것을 참는데 머물러서, 부드럽고 화하고 착하고 순한 마음을 지닌다.
아무리 중생들이 수행을 잘하고 인욕을 잘해도 부처님의 과거 인행(因行) 당시와 비교할 수가 없다. 누가 와서 너의 눈을 꼭 쓸데가 있으니 빼달라고 조르니 쪽 빼주었다. 그러나 눈을 쓰지도 않고 발로 땅에 문질러 버렸다. 그러니 얼마나 괘심 하겠는가. 태연부동해서 동(動) 하지 않으셨으니 부동지(不動地)에 이르러 그렇게 되기가 참 어려운 일이다. 마음이 졸복 하지 말고 또한 놀라지도 말아야 되는데, 산에 풀밭 길을 가다가 꿩이 푸드덕하고 날아가면 깜짝 노란다. 길을 가더라도 마음을 모아 집중하는 공부가 있으면 푸드덕할 때 꿩인 줄 알아서 놀라지 않는다.
우리가 알려고 하는 이 자리는 마음을 두어서 구하지도 못하고 무심으로써 얻지도 못한다. 무심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망상(妄想) 없는 그것이 무심(無心)이다. 언어(言語)로 짖지도 못하고 말로써 어떻다고 말할 수도 없고, 문자로 이 자리를 어떻다고 형용할 수도 없고 적묵(寂默)으로 통할 수도 없는 자리다.
사원서원(四弘誓願)은 네 가지 큰 선원인데 가 없는 중생을 서원하고 건지리라. 다함없는 번뇌를 선원코 끊으리다. 무량한 법문을 서원하고 배우리다. 위 없는 불도를 선원하고 이루리다. 이것은 네 가지 큰 서원인데 흔히 요새 말하는 서원이고, 선가(禪家)의 서홍서원은 어떤가 하면 배가 고프면 요긴히 밥을 먹고, 추우면 옷을 더 입고, 몸이 고단하면 발을 쭉 펴고 누워 자고, 더우면 시원한 바람을 사랑한다. 이것이 선가의 네 가지 큰 서원인데 우리 일상생활을 제쳐 놓고 무엇을 하겠는가. 일상생활이 그대로 불법이고 도다. 눈만 끔적이고 소리 한 번 지르고 여기에 도가 있고, 밥하고 옷 만들고 농사짓고 장사하는데 도가 있고, 밥 먹고 대, 소변보는데 모두 도가 있다. 도를 모르니까 도를 찾아 도를 찾지 그곳에 다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금강경” 첫머리에, 부처님이 밥 먹을 때를 당해서 가사를 수하시고 발우를 가지고 사위대성(舍衛大城)에 들어가서 차례로 걸식해서 본처(本處)에 돌아와서 밥 잡수기를 마치고 옷과 바루를 거두시고 발을 씻고 좌를 펴고 앉으셨다고 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그 소중한 경전에 밥 얻어먹고 밥을 다 먹고 발 씻고 좌를 펴고 앉는 것을 경초(經初)에 다 넣었겠느냐 말이다. 진리(眞理)가 거기에 다 있다. 이것을 경 읽는 사람도 예사로 넘기고 배우는 학인(學人)도 예사로 그 대목을 넘긴다. 무엇 때문에 밥 먹고 발 씻고 좌를 펴고 앉는 것을 넣었는가를 모르고 그냥 넘어간다.
극(劇)으로 멋있게 도를 편 일이 있다. 누가 창안을 했는지 몰라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주 멋진 도인이 구상을 한 것이다. 극으로 불법을 편 셈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보았을는지 모르겠는데, 우리 젊었을 때에 산두 박첨지라는 허수아비 놀이가 있었다. 동네 한 복판에 빈 터가 있으면 기둥을 네 개 세우고 포장을 치고 사람들이 모이면 산두 박첨지 놀이가 시작되는데, 기둥 넷은 우리 몸이 땅, 물, 불, 바람의 네 가지 요소로 크게 나뉘어 구성되어 세상에 사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박첨지 놀이가 시작할라치면 포장을 둘러친 위로 허수아비들이 탈바가지를 뒤집어쓰고 나와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는데, 그 허수아비들을 줄로 조정하는 것은 포장 밑에 사람들이 한다. 밑에 사람들이 줄로 당겨서 하지만 허수아비들이 말할 때는 입도 열고 춤도 추워서 정작 허수아비들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에 부채가 흔들흔들하며 나타났다가 지나간 뒤에, 한 영감이 나오는데 아주 털보 영감이다. 탈바가지 털보 영감이다.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오늘 사람 참 많이 모였다.”하는데 여기 남녀들이 이렇게 많이 모이는 것이 너희들이 아니라 모두 나처럼 부모의 탈바가지를 쓴 것이란 말이다. 그리고 또 너희들 마음 가운데 번뇌 망상이 마치 내 수염같이 붙어 있다는 말이다. 그다음에는 여자 남자 허수아비들이 한패거리가 나와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며 세상의 애정에 집착하는 인간상을 펼쳐가며 입도 맞추고 옆의 놈을 쥐어 박기도 하며 한참 재미있게 놀다가 사자 호랑이 등 뭇 짐승들의 탈이 출연하여 놀다가 이번에는 스님네가 무엇이 나와서 절을 짓는데 흥겹게 노래와 장단을 맞추어 가며 절을 짓는다. “에루 화산에 절을 지어 뚝딱, 에루 화산에 절을 지어 뚝딱” 노래를 부르며 뚝딱뚝딱하다가 절을 순식간에 하나 지어 놓는다. 절을 다 지어 놓고 법상을 차려 법사가 나와 법문을 한다. 법상에 올라앉아 주장자로 법상을 탁 치고 게송을 읊기를
但盡凡精(단진범정) : 다만 범부의 생각만 모두 비우거라
別無聖解(별무성해) : 별로 성현의 지해(知解)란 게 없느니라
간단한 법문이지만 그 법문이 참으로 좋다. 범부의 생각만 비우면 되는데 그것이 붙어서 아무것도 안된다. 법문을 그렇게 간단히 끝내고 주장자를 또 한 번 탁 친다. 누가 이런 법문을 냈는지, 법문 하는 허수아비도 모르고 듣는 사람들도 모르지만 참 좋은 법문이다. 무슨 소리인지 알지도 못하는 소리를 한마디 해 놓고는 법문 다했다고 법상을 치운다.
용도 나오고 사자도 나오고 별별 구경거리를 다 보여주다가 나중에는 홍동지라는 일곱여덟 살가량 어린아이가 발가벗고 나오는데 자지가 어찌나 크던지 제 키보다도 더 큰 자지를 어깨에 올러 메고 나와서 그것으로 이 리 치고 저리 치고 하는데 춤추고 노래하던 놈도 때리면 어디로 갔는지 없어지고 법사도 치면 없어지고 용이고 사자고 모조리 때려서 다 없애는데 자지로 때리면 없어지니 구경꾼들이 웃고 야단 법석이다.
우습지만 홍동자의 자지에 의해 인생의 근본 문제가 붙어 있고 그것이 법의 법장이요, 지혜(智慧)의 방망이인 것이다. 이 방망이로 사람도 치면 없어지고 짐승도 치면 없어지고 절도 없어지고 무엇이든지 치기만 하면 없어지는, 부처도 치고 조사도 치는 법방망이인 것이다.
巍巍落落裸裸(위위낙낙라라) : 높고 높아 아이가 발가벗고 씻은 듯 맑아
獨步乾坤伴我(독보건곤반아) : 홀로 하늘과 땅을 거니는데 누가 나를 벗하랴
이 게송이 우리가 찾으려 하는 자성(自性) 자리 그 당체를 바로 드러내 놓은 것이다. 그것을 아는 이가 없다. 이 게송이 홍동지가 발가벗고 나온 소식이다.
看取棚頭弄傀儡(간취붕두농괴뢰) : 산두틀에 허수아비 놀리는 것을 보아라
推牽全借裸頭人(괴견전차라두인) : 밀고 당기는 것이 전부 속 사람의 것이다.
속 사람은 곧 사람들이 주인공 이다. 그러니 자기들이 춤추고 노래하고 오고 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밑에서 사람이 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고 오고 하는 것도 속 사람이 하는 것이고, 눈이 보고 귀가 듣고 발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전부 속의 사람이 하는 것이다.
속의 사람을 모르고 그냥 물질에 집착되어서 매일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프다고 하니 세상에 나와서 그렇게 고통스럽게 살바에야 무엇하러 나오기는 나왔느냐 하는 것이다. 여러분들도 내가 세상에 살다가 죽어서 언제 땅 밑으로 들어가겠나, 그것을 알아야 한다. 설령 칠십팔십 산다고 해도 인생의 일도(一度)는 욕심이니, 사십이 남았구나, 이렇게 회계를 해야 된다. 이렇게 해야 도 닦는 발심도 되고 용기가 난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면서 계획은 그저 천년만년 사는 것과 같이 생각하니 틀린 일이다.
無影雁飛千澗月(무영안비천간월) : 그림자 없는 기러기는 일천 시내 달에 날고
石獅東吼斗移西(석사동후두이서) : 돌사자가 동으로 향해서 울부짖는데 하늘에 두우별은 서쪽으로 옮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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