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기 마당/내 이야기

전삼삼 후삼삼 1(前三三 後三三 : 경봉스님 법문중에서)

산울림(능인원) 2025. 4. 18. 17:02

  開門今日看平野(개문금일군평야 : 문을 열어 평야를 바라보니)

  四月南風大麥黃(사월남풍대맥황 : 사월 남풍에 보리는 누렇고)

  燕子雙雙傳密語(연자쌍쌍전밀어 : 제비는 쌍쌍이 날아 밀어를 전하는데)

  山高水碧萬花紅(산고수벽만화홍 : 산은 높고 물은 푸르러 오만가지 꽃이 향기롭네)

  예전에 어느 선비가 제비들이 강남에서 날아와서 반가운 듯이 지저귀는 것을 보고 자문자답(自問自答)으로 지은 시(詩)다

  燕燕來耶消息好(연연래야소식호 : 제비야 제비야 너 왔느냐 소식이 좋구나)

  江南風景近如何(강남풍경근여하 : 강남의 풍경이 요즈음은 어떻니)

  제비의 답이

  作夜東風作夜雨(작야동풍작야우 : 어젯밤에 동풍 어젯밤 비에)

  紅桃花發主人家(홍도화발주인가 : 붉은 복숭아꽃이 주인댁 뜰에 흐트러지게 피었습니다)

  산이 평등하기 때문에 어디든지 항상 푸르고, 물이 평등하기에 물과 물이 서로 만나면 합하고 길이 흐른다. 해와 달과 별이 평등하기에 네 계절이 언제나 밝고, 사람의 마음이 평등하기에 눈은 가로 열리고 코는 내리 붙어서 빛을 보고 소리를 듣는 것이 모두 다 같은 것이다.

  진리(眞理)가 평등하기 때문에 예와 이제가 한결같다. 예도 없고 이제도 없는 항상 그대로인 것이다. 온갖 경계가 평등하기에, 꽃은 웃고 새는 노래한다. 이 법이 평등하므로 높고 낮음과 길고 짧음과 옳고 그름과 밝고 어두움과 선과 악과 생과 사가 없는 것이다.

  이 이름이 아뇩다라삼막삼보리이다. 한참 있다가 이르시기를 “이후 긴 말은 내일 다시 올지어다.” 예전에 항주에 무착 문희선사(無着文喜禪師)라는 분이 오대산에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친견(親見)하러 갔었다. 성지(聖地)인 오대산 금강굴 앞에 앉아 있는데 노인이 소를 몰고 오다가 말을 건넨다. “자네는 어떤 사람인데 무엇하러 이 깊은 산중에 앉아 있는가?” “예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왔습니다.” “문수보살을 가히 친견할 수 있을까... 자네 밥은 먹었는가?” 여기부터 법담(法談)의 시작이다. 법으로 한 번 집적거려 본 것인데 무착이 말하기를 “안 먹었습니다.”한다. 밥을 먹고 안 먹고를 말한 것이 아니라. 법으로써 한 번 이 사람이  도가 좀 익은 사람인가 싶어서 찔러본 것인데 “밥 안 먹었다.”라고 했다.

  우리 일상생활에 밥 먹고 옷 입고 대 소변보고 하는 모든 우리 주변에 불교의 진리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있건마는 사람들이 모른다. 있다고 해도 모르니 말이다.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르고 깜깜하다. 무착이 “밥 안 먹었다.”라고 하니, “생짜로구나.”하고는 그 노인이 그냥 간다. 그래도 눈치가 빨라서 비록 그 노인이 소를 몰고 기지마는 말하는 태도라든지 얼굴 표정이 범상치 않은 그 무엇이 있음을 보았던지, 그 노인을 따라간다. 얼마쯤 가니 절이 나타났다. 노인이 “균제야!”하고 시자(侍者)를 부르니 시자가 나와서 소를 받아 매었다. 잠시 후 차(茶 )가 나왔는데, 다완(茶椀)이 무엇이더냐 하면 금, 은, 유리, 자거, 마노, 호박 등 일곱 가지 보배의 하나인 파려(玻瓈)로 된 훌륭한 잔이었다.

  차를 마시니 보통 세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소락제호(酥酪濟醐)의 차였다. 몸과 마음이 형언키 어려울 지경으로 아주 상쾌한 향기로운 차였다. 노인이 물었다. “자네 어디서 왔는가?” “남방에서 왔습니다. “ 노인이 찻잔을 들고 ”남방에도 이런 물건이 있는가 “ ”없습니다. “ ”이런 물건이 없으면 무엇으로 차를 마시는가? “ 그러니 찻잔을 들고 ”남방에도 이러한 물건이 있는가? “ 할 때에 묻는 뜻도 모르고 찻잔을 물은 줄 안다.

  어리석은 개에게 흙덩이를 던지면, 흙덩이가 자기를 때렸다고 흙덩이를 쫓지만, 사자한테 흙덩이를 던지면 흙덩이는 어디 갔든지 바로 던진 사람을 문다. 사자하고 개 하고 비교하면 천지 차이다. ”남방에도 이런 물건이 있느냐? “하니 없다고 하자 뜻은 다른데 있지만 슬쩍 돌려서 ”그러면 찻잔이 없으면 무엇을 가지고 차를 먹느냐? “하고 물었다. ”남방에도 이런 물건이 있는가? “는 그 말에 좋은 뜻이 있지만 모르니 어찌하겠나. 여러 수좌 들은 좌에 앉기 전에 있는 그 소식을 알아야 한다. 그낙처(落處)가 어디에 떨어진 줄을 알아야 된다.

  무착이 그 절의 방을 둘러보니 벽과 방안의 모든 장식물들이 모두 순금으로 휘황찬란하게 이루어져 있었다. 노인이 다시 물었다. ”남방 불법은 어떻게 주지(住持) 하는가? “ ”말법비구(末法比丘)가 재물을 지켜 유지합니다. “ ”대중(大衆)은 얼마나 되는가? “ ”어디는 300명 정도 되고 혹은 오백명도 됩니다. “ 그러니 노인이 묻는 뜻은 다른데 있건만, 사실 그대로만 말한다. 법을 모르니 혹은 삼백 명, 혹은 오백명도 된다고 한 것이다. 무착이 노인에게 묻는다. ”여기 불법은 어떻게 주지합니까?‘ “범부(凡夫)와 성현(聖賢)이 함께 살고, 용과 뱀이 혼합되어 있느니라.” 무착에게는 무슨 말인지 막연한 말 뿐이다. 그저 듣고만 이었지, 어디에 떨어지는 말인지 모르는 말 뿐이다.

  또 물었다. “여기에 대중이 얼마나 됩니까?” “앞도 삼삼(三三)이요 뒤도 삼삼(三三)이니라.” 대중의 수효를 물었는데 앞도 삼삼이요 뒤도 삼삼이라니, 마치 까치가 뒤집혀 날아가는 소리다. 무슨 수리인지.....

  날이 저물어지니 무착이 하룻밤 자고 가기를 청(請)하자 노인이 말하기를 “염착(染着)이 있으면 잘 수 없다.” 즉 마음에 번민과 집착이 있는 사람은 여기 쉬어 갈 수가 없다는 말이다. 노인이 또 묻는데 묻는 방법이 묘하다. 조금 있다가 묻기를 “자네 계행(戒行)을 지키는가?” “예 어릴 때부터 지키는데 지금까지 지켜 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염착이 아니고 무엇인가?” 자칫 잘못하면 계행을 지키지 말라는 소리로 오해할 우려가 있는데, 계행을 지키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닦아도 닦음이 없고 행해도 행함이 없고 가져도 가짐이 없는 경지(境地)에 들어가야 되는데 아직까지 꼭 거머쥐고 있으니까 집착이라는 말이다. 줄타기를 하는 광대가 줄을 타는데, 지팡이를 짚고 줄을 낮게 매고 왔다 갔다 하는데, 지팡이를 놓고 줄을 타야 조화가 생기지, 그렇지 않으면 조화가 생기지 않는다. 그 노인이 무착을 시험대에 올려놓고 한 가지 한 가지 묻는 것이다. 그러니 참으로 가질 것이 없는 것을 가지고 있다 하니, 아직까지 가져도 가짐이 없고 닦아도 닦음이 없는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말이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노인이 무착더러 “자네가 염착이 있어서 여기서 못 잔다.” 하고 시자 균제 동자를 시켜서 내 보낸다. 밖으로 나와서 균제 동자에게 절 이름이 무엇이냐고 하니, 반야사(般若寺)라 한다. 무착이 생각해 보니, 다른 말은 그만두고 대중 수효를 물었는데, 앞도 삼삼이요 뒤도 삼삼이라고 한 말이 걸려서 동자에게 물었다. “동자여, 내가 노인에게 대중 수효를 물었는데 앞도 삼삼이요 뒤도 삼삼이라 하니 그 뜻이 무슨 도리요?” 동자가 말하기를 “대덕(大德)아!” “예” “이 수효가 얼마나 되느냐?” 바로 가르쳐 주건만 깜깜하다. 대덕이란 말은 존친어(尊稱語)이다. “대덕아!”하고 불러놓고, 대답하니 “그 수요가 얼마나 되는가?”하니 천리만리나 아득하여 모르겠다. 하나가 통하면 백천 삼매(三昧)가 모두 통할텐데, 그것을 모르니, 바로 가르쳐 주어도 안 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