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기 마당/내 이야기

여시주 여시항복기심의 목표

산울림(능인원) 2024. 10. 25. 15:00

  여시주 여시항복기심(如是住 如是降伏基心)은 반야경인 금강경 중에서도 핵심 부분에 속하는 것으로서 중생의 목적인 견성 성불하는 데는 무엇보다도 반야바라밀이 근본이다. 그래서 반야(지혜)의 중심인 금강경인 것이다. 금강경 중에서도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이니 이는 대승의 골수 즉 근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여시주 여시항복기심을 잘 이해하고 심득해서 생활화하는 것이 바로 성불의 첨경이 될 것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의 물음에 대해 이와 같이 그 마음을 머물 것이며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라 하셨는데 여기서 ‘이와 같이’에 금강경 전체의 뜻이 담겨져 있다. 해도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면 여시(이와같이)가 무엇인가. 우리의 근본 마음자리를 증득하려면 무엇보다도 사상(四相 :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떨쳐 버려야 하고 사상을 제거하려면 내 마음을 먼저 항복받아야 되는데 중생이 다겁생래로 살아오면서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었던 마음으로 지은 업장으로 인하여 자기 본래 성품을 알지 못하고, 망심(妄心)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진실을 보지 못하고 망념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나에게 어떤 허물과 장애가 있는가를 알아야 고쳐 나갈 것이 아닌가. 알았으면 그 나쁜 마음을 어떻게 항복받을 것인가 하는 방법을 찾아야 된다. 우리 중생은 삼독(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악업을 짓고 전도된 생활을 하다 먼저 6근(안, 이. 비, 설, 신, 의)을 항복받아야 하는데 먼전 눈으로 무엇을 본다 하지만 눈 자체가 무엇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보는 것이고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잘 보인다.

  마음이 눈을 통해서 좋은 것을 보면 좋다 하고 나쁜 것을 싫어하니 이 분별심을 없애라 한 것이다. 눈으로 보는 일체의 것을 색(물질)이라 하는데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 물질이 아무것도 없는 공(空)과 다르지 아니하고 또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다 하여 눈의 경계에 대한 집착을 떼어 내는 것이다. 또 성즉시공(聲卽是空)이요, 공즉시성(空卽是聲)이라. 소리가 아무것도 없는 공과 같고 또 아무것도 없는 공이 소리와 다르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귀의 경계에 대한 집착을 떼어 내는 것이다. 그러면 좋은 소리면 어떻고 욕하는 소리를 들으면 어떻겠는가. 모두 텅 빈 공인데 사람이 그렇게 생각을 일으켜 그런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서 냄새는 그와 같고 맛도 그렇고 촉감도 모두 공과 같은 것이니 물체에 끌려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6근을 항복받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일체 물질은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니고 듣는 소리도 자성에 부합하는 진실한 소리가 아니다. 냄새도 촉감도 맞는 생각까지도 다 진실이 아니며 공과 같은 것이다. 이는 마치 그림자 같고 메아리와 같은 것이니 하나도 집착할 것이 못된다. 우리 중생은 진실을 보지 못하고 속아서 살고 있는 것과도 같다.

  다음은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 것인가 인데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易生基心)이라 응당 머무를 것도 없이 그 마음을 내라 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항상 어딘가에 머물너 있게 되어있다. 나라를 생각하면 나라에 머물고 불교를 생각하면 불교 속에 머물고 처자를 생각하면 처자에 머무는 것이다. 그래서 머무는 곳이 없게 하려면 사상(四相)이 없어야 한다. 사상은 먼저 ‘아상’ 나로부터 시작되는데 중생들은 대체로 ‘나’를 주관으로 세워놓고 일체 모든 것을 맞추어 나가게 되다. 그러므로 남이라는 생각, 중생 살림한다는 생각. 오래 산다는 생각이 차례로 벌어지게 되어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각이 없어야 된다.

  가끔가다가 찾아오는 손님들이 자식도 그렇고 사업도 그렇고 살림살이도 그렇고 마음 편할 날이 없다고 하면 이런 말들을 해주는데 먼저 세상살이에 대한 생각을 다 버리고 고요하고 청정한 마음으로 살라고 한다. 생각이 많으면 병이니 무심한 가운데 밥도 먹고 일도 하고 이야기도 하면서 어떠한 시간이나 모든 장소에서 모두 무아(無我)의 상태에서 행하여야 되고 밥을 먹어도 먹는 것이니까 그냥 먹고 맛이 좋으니 나쁘니 분별치 말고, 간다는 생각 없이 가고 온다는 생각 없이 오는 것이니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거나 무심한 가운데서 하고 하다 보면 가도 그만 와도 그만 아주 호호 탕탕한 자리인데 공연히 중생들이 생각을 지어서 망상을 일으키니 그것이 도통이라고 말해준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살고, 그래서 보시를 해도 내가 남에게 무엇을 주었거니 하고 생각하여 상(相)이 생기지 않으니 상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해야 된다. 이같이 보시를 행하면 그 공덕은 허공과 같이 무변무량한 것이다.  마음이 삼매에 들어 일념이 되면 눈에 보이는 물질도 형체가 아니고, 소리를 들어도 소리가 아니다. 냄새를 맡아도 냄새가 아니니 이것이 6근을 항복받는 것이며 마음을 항복받는 것이다. 백만의 적군을 항복받기는 쉬워도 오히려 쉽게 보여도 자기 마음 하나 항복받는 것이 어렵다 했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무량무변 중생을 다 내 가족으로 삼고 이 가족을 모두 불문에 들어오게 하여 생사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아 주어야겠다고 크게 서원해야 된다.

  이와 같이 하여 본래 성품을 깨달아 놓고 보면 아무 근심걱정 없고 나에게 세상 나쁜 귀신 다 대들어도 전 세계 깡패들이 다 모여들어도 겁날 것 하나 없다. 진짜 나는 이 몸뚱이와는 관계가 없으니 겁날 일 하나도 없다. 이 육체가 ‘나’라고 생각을 하니까 전생도 있고 내생도 있는 것인데 불생불멸하는 이 마음이 진짜 ‘나’인 줄 깨달아 놓으면 과거 현재 미래도 없고 전체가 마음 하나뿐이다.

   허공은 무한하지만 이 마음한테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아주 작은 것이다. 그러니 근심 걱정 일어날 조건이 없어지고 번뇌가 일어날 이유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이 불생불멸인 마음만이 진실한 진실한 나이며 몸뚱이를 포함해서 일체 현상 있는 것은 무상한 것이며 ‘나’인 것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마음만 깨치고 나면 의, 식, 주도 걱정 없고 권리도 돈도 필요 없고 꼭 살아야 할 필요도 안 느낀다.

  이것은 죽을 수 없는 산 것이니까 영원히 자유한 것이다. 이렇게 안전무정한 것이 ‘나’인 줄 확신하고 우리 육체 생활을 조금씩 축소시켜 나가야 한다. 하루 밥 세끼 먹던 것 두 끼만 먹고 남겼다가 배고픈 사람 보면 아무 생각 없이 주는 것이 육체 생활을 줄여 나가는 것이며 생각이 없으니까 조금씩 먹어도 건강이 유지되고 육신은 내가 아니라는 생각이 굳어지면 잘 먹고 못 먹고 가 없어지고 마음이 편안 해진다.

  스님들도 원래는 집도 없이 남이 해놓은 밥 얻어먹고 그저 오는 대로 가는 대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마음을 일러주고 알았으면 또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주고 하나를 모르면 하나를 일러주고 죽어도 네가 죽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죽을 수 없다는 것이 불교의 모든 것이다. 

  다음은 마음을 찾는 생활을 해야 하는데 모든 것이 다 허망한데 이 마음 아나만 꼭 허망하지 않다 하니 이것을 꼭 알아야겠다고 강요하면 이것이 이미 견성에 연결되는 생각일 것이다. 오직 마음을 알아야겠다고 하고 경문을 잃든지 이것이 공안(화두)을 생각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육체가 내가 아니며 우주도 실재가 아니며 아버지 어머니 아들딸 하는 것도 다 허망이다. 오직 이 마음만이 작년에나 금년에나 천만년 후에도 마찬가지로 진실이다.

  천당을 가도 지옥을 가도 개 돼지가 되어도 마음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 경지에 들어야 한다. 사람이 되나 짐승이 되나 이 송장을 끌고 왔다 갔다 하고 배고프면 밥 먹고 배설하는 이 주체 이것이 바로 마음임을 확실히 깨달아야 한다. 지금까지 세상 학문 다하나 마나가 되는 것이다. 세계 제일의 박사가 되어도 바로 생사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강조하다면 ‘사상(四相)’을 잊어버린 본래의 자기 마음 이것만이 진짜 '나‘인 것을 분명히 알고 새로운 각오로 인생을 살아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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