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여시주(如是住) 여시항복기심(如是降伏基心)이라 하셨는데 여기서는 이와 같이 여시(如是)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또한 여시가 핵심이며 제일 중요하다. 이는 본래의 맑은 마음 그대로 살아라 한 것으로 다시 말하면 반야의 지혜대로 살아라라고 하신 말씀이다.
그러면 반야(般若)가 무엇인가? 칠흑 같은 한밤이 어둠이 한순간 태양에 의해 맑아지듯이 부처님의 깨달음이 만고의 어둠을 일지에 밝히는 것이다. 그러나 귀먹은 이는 듣지 못하고 눈먼 이는 보지 못하니 슬프다. 보리도량의 일대 광명이 봄눈이나 아지랑이와 무엇이 다를까?
우리 중생이 무명 업장으로 눈과 귀가 가리어져서 진리가 눈앞에 있지만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부처님께서는 여시를 설명하기 위하여 중생들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선방편을 지어 중생의 근기에 따라 제도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상근기자에게는 여시주 여시항복기심하면 금강경 설명은 다 끝난 것이나 중하근기자를 위하여 구구절절 분별하여 설명했던 것이다.
금강경을 교리상으로 보면 진공무아의 공사상에 해당된다. 또한 소승불교를 타파하고 생각도 없고 머무는 바도 없고 얻을 것도 업는 청정불심을 개별 하여 대승의 일성원통(一性圓通)의 도리에 바로 들어가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로운 깨달음이 웬만한 도리를 성취할 수 있도록 교도 한 경이다.
반야(지혜)는 모든 성전의 연원이고 역대 불보살님의 마음이다. 따라서 작은 법을 버리고 바른 도에 나아가는 지침이며 세상을 구하고 고해를 건너는 어진 배도 되며 또 마귀를 물리치고 법도를 부르는 싱그러운 주문이 되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는 “여시주, 여시항복기심(내 마음을 항복받아야)”으로 전체를 대할 수 있기 때문에 여시(如是)의 크 반야는 풀어서 조건 없는 참마음의 생활이라 할 수 있다. 진리는 하나지 둘일 수 없고 우주의 핵심이 아나지 둘일 수 없고 그 진리는 허공일 수도 진리일 수도 없으며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그것(참마음)이 물질도 허공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을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하느냐 인데 허공을 아무리 찾아보아야 찾을 수 없는 일이고 또 물질을 아무리 살펴보아야 생명은 안 나올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말하고 듣고 좋다 싫다 하는 이 생명 나에게서 찾아야 될 것이다. 이 말이 이론에 맞나 안 맞나 생각하는 그 마음의 주체이다.
부처님께서는 한량없는 중생을 내가 제도했다 하더라도 내가 그들을 제도했다는 생각이 있으면 바로 “나”라는 생각, “남”이라는 생각, 중생살이라는 생각, 오래 살겠다는 생각에 걸리는 것이기 때문에 제도받은 중생이 하나도 없다고 한 것이다. 제도했다는 생각이 있기만 하면 보살이 아니다고 하신 것이다. 모든 것에 집착 없이 상(相:표정)을 내지 말고 살아라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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