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기 마당/내 이야기

내 마음을 항복 받아야(탐,진,치심의 항복)

산울림(능인원) 2024. 9. 21. 01:28

보살이란 깨친 중생을 말하는데 부처도 중생도 아닌 도인이란 뜻이 있다. 중생이 크게 나누어 네 종류인데 알로 낳는(卵生) 것, 태로 낳는(胎生) 것, 습기에서 낳는(濕生) 것 불에 의해서 낳는(火生) 것인데 이 중생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번뇌망상이 떨어진 상태가 아닌 이름 그대로 범부중생이다. 그러면 이 못난 중생을 벗어버리고 성인이 되려면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이 삼독(三毒)을 어떻게 없앨 것인가. 부처님께서는 내가 수많은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여 열반을 얻게 했다. 하더라도 나에게 제도받은 중생이 하나도 없다고 하셨다. 왜 그러냐. 내가 중생을 제도했다는 생각이 있으면 그것이 바로 “아상” 나라는 생각에 빠지기 때문이다.

번뇌망상이 다 떨어져서 열반의 경지에 마음이 이르게 되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 중생이나 선이니 악이니 하는 것이 다 중생의 생각이고 편협한 생각일 뿐이다. 혜가스님이 달마대사께 질문하였다. 무명(無明)의 마음이 비록 말만사천 번뇌와 정욕이 있어서 황하의 모래같이 많은 온갖 악(惡)이 수요도 끝도 없으나 간추려 말하건대 모두가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이 근본이 되느니라 하시고 탐, 진, 치 삼독심이 본래부터 온갖 악을 갖추고 있는 것이 마치 큰 나무가 뿌리는 하나이지만 거기에서 생긴 가지와 잎은 무수한 것처럼 이 탐, 진, 치 삼독의 뿌리에서 온갖 악업을 내는 것은 앞의 비유보다 백천만 배나 더하여 비유할 수도 없느니라. 그래서 우리는 악업의 뿌리인 삼독은 내 것이란 소유관념이 강하다.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자기의 몸이다. 중생들은 보통 아 몸뚱이가 참“나”인 줄 잘못 알고 있다. 몸은 내가 아니다. 왜, 버리고 갈 것이니까. 빌려 입은 옷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 육신의 생활을 버리고 마음만이 참“나”인 줄 알 아야 될 것이다. 몸을 위해 아무리 살아 보았자 모두 꿈이고, 물거품이다. 헛것이다. 이 세상에 내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쓰다가 버리고 가는 것뿐이다.

세속적으로 제일 중요하다는 ‘몸’도 결국 버리고 갈 것인데 하물며 다른 물질 재산이야 말할 것 있겠는가? 한국 땅이 전부 내 것이라고 내 앞으로 등기를 해놓아도 관리하느라고 신경만 쓰지 마지막 갈 때도 가지고 갈 수 있겠는가. 자식을 훌륭하게 키우고 가르쳐서 아들을 벼슬을 하게 만들었다면 내가 가는 길에 따라가겠는가. 따라 나와 인사도 못할 것이다. 유아 한 중생이 먹어 보아도, 옷을 사서 입어 보아도 소유해야 하는 데는 모두가 한계가 있는 것이다. 잠실 운동장은 등기문서는 서울 시장으로 되어 있지만 관리하는 관리자일 뿐이고 그곳에서 운동하는 선수의 것이고 관람하는 방청객 것이다. 태양의 임자는 누구인가 누군가 쳐다보는 사람이 주인이요, 햇빛의 혜택을 보는 자가 임자다. 이와 같이 물질은 사용자의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 때문에 욕심(貪心)을 내며 자신을 망치고 악을 지어 악도에서 큰 고통을 받을 것인가. 이제 탐심을 제거하는 방편은 근본적으로 몸뚱이는 내가 아니고 버리고 갈 것이고 꿈과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와 같은 줄을 확실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둘째, 진(嗔)심이다. 성내는 일인데 보통사람은 나라는 존재를 먼저 인식하고 들어가기 때문에 누가 욕을 하든지 뭐라고 말을 하면 나쁘게 생각하고 화를 낸다. 무아(無我), 나 없는 경지에 들어가면 누가 나를 해롭게 하거나 사기를 치거나 몸애 부상을 입히거나 심지어 죽이더라도 이 몸은 내가 아니니 어차피 버릴 것이며 또 이 몸은 무명으로 이루어진 가짜 나이니 죽어도 진짜 나(마음인 나)와는 관계가 없다. 이렇게 생각해야 된다. 이렇게 되면 어떤 고통이나 해를 받더라도 성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이것은 잘 안 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 몸은 내가 내가 아니다고 이론상으로 그렇게 보지만 실제의 경계에 들어서면 탐내고 성내는 것이 중생의 심리이다. 일제 감점기시 독립운동하신 독립투사가 일본의 형사에게 잡히어 고문을 받는데 고문이 대단했었다. 전기고문을 하고 불젓가락으로 얼굴도 가슴도 지지고 살이 지글지글 타고 손가락이 부러지고 가진 고문을 받으면 비명소리가 요란했다. 순서대로 고문을 받는데 이 중 한 사람은 불교를 잘 믿는 사람으로 “더런 놈들아 너희들이 마음대로 다 해봐라. 이 몸뚱이는 내가 아니니까 지지든 볶든 나와는 직접 관계가 없으니 마음대로 해봐라. 죽는 것 하고는 관계가 없는, 죽으면 몸이 죽는 것이지 마음인 내가 죽을 수는 없다.‘라고 결심하고 있는데 자례가 되어 고문장에 들어갔다. 그리고 악독한 고문이 시작되었다. 지지고 살이 찢어지고 하는데도 아무리 너희들 마음대로 해봐라 하고 비명소리 하나 없이 견디어 냈다. 그랬더니 일본 형사가 ”이놈 아주 지독한 놈이다. 귀신이 있다면 지독한 귀신일께다. “라고 하면서 하다 하다 그만 내보냈다. 상처가 많이 났지만 무심한 가운데 당했기 때문에 낫기도 잘 나아 평상시 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이 참는 법을 잘 알아야 된다. 속이 나쁜데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이치가 그러하니 몸뚱이는 내가 아니니 관계가 없다 하고 참으면 옳게 참는 것이다. 또 나를 기쁘게 하는, 손해 부치는 사람에게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 성낼 원인을 미리 제거하니 성낼 필요가 없다.

다음은 치심(痴心) 어리석음이다. 이는 진리를 모르고 삿된 생각이 많아 전도된 마음 어두운 마음이다. 이것은 탐심과 진심을 제거하고 육바라밀을 닦으면 자연히 없어질 것이다. 이 같은 삼독은 하나의 본체에서 스스로 되었거니 하는 생각과 만일 육 근(眼耳鼻舌身意)에 나타나면 육적이라 하는데 예를 들어 첫째 눈이 도둑의 눈으로 여러 가지 현상을 보게 되면 좋은 것은 좋다 하고 나쁜 것은 버리려고 하고 자기가 필요한 좋은 물건이 다른 데 있다 하면 가지려고 하는 마음이 생긴다. 좋은 것을 보고 탐내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눈의 도둑이고 영화든 책이든 보아서 욕심을 채울 수 있는 것이면 취하려는 생각이 도둑인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만일 1 백만 원이 생겼다면 이것을 장래를 위해 저축하려는 생각과 당장 아쉬운 것 사고 향락을 즐기려는 생각이 있었는데 저축하러 은행에 가는 도중 좋은 물건이나 음식을 보고 구미당겨 먼저 써버리게 되었다면 눈의 도둑에게 당한 것이다.

둘째, 귀의 도둑.  사람이 귀로써 가지가지의 소리를 들되 좋은 소리 해로운 소리로 구분하고 즐거운 소리에만 이끌려 착한 일을 못하였다면 귀의 도둑에게 당한 결과이다.

이와 같이 해서 코로 맡은 냄새의 맛과 향기 촉감과 뜻도 모두 마찬가지다. 이 여섯 가지 도둑이 몸과 마음을 어지럽힘으로 인하여 생사에 빠져들어 여섯 가지 갈래에 헤매면서 온갖 고통을 받는 것이 마치 큰 강이 작은 샘이 쉬지 않고 흐름으로 인해 마침내 철철 넘겨 흘러 만리에 파도가 출렁이는 것과 같다.

이것을 끊는 방법으로 어떤 사람이 그 뿌리와 근원을 끊으면 모든 흐름이 다 쉬게 된다. 해탈을 구하는 이가 탐진치 삼독을 돌려 삼취정계(三聚淨戒)를 만들고 육(六)적을 돌려 뮥박라밀(六波羅密)로 만들면 자연히 모든 고통을 여의게 된다. 삼(三界)의 근본은 탐진치 삼독이니 탐욕이 육계이고. 성냄은 색계이며, 어리석음이 무색계이며 삼독에 의해서 나쁜 업을 짓는 까닭에 업보가 이루어져 6도에 윤회하기 때문에 삼계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나쁜 업이 마음에 의해 생긴 것이니 마음을 잘 거두어 모든 악을 여의면 삼계에 윤회가 자연히 사라져 고통도 사라지고 이를 해탈이라 한다. 달마선사께서 지금의 탐진치를 제기한 이가 있으면 곧 큰 아승지겁을 뛰어넘는 것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