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인의 나들이/나들이 지혜

괴산(무량약수사, 흥천사, 수옥폭포,마애이불병좌상)

산울림(능인원) 2026. 6. 15. 11:50

무량약수사

   옛말에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다. 천냥의 빚을 지고 갚지 못하면 극형을 감수하여야 했던 봉건시대에도 채무자의 정성스럽고 진정한 말 한마디가 채권자를 감동케 해서 마침내는 채권자가 자비심을 일으키게 한다는 뜻일 것이다. 성심성의를 다한 말이 듣는 사람을 얼마만큼 감동시키며, 금전으로는 도저히 그 말의 값을 정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항상 성실하고 친절하고 겸손하고 예절에 맞는 말을 쓰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우리가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나 차속에서나 길을 가다가도 거칠고 천하고 험한 말을 다른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속에서 많이 듣게 되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가정에서나 이웃끼리도 거친 말이 오가고 부실하고 허망한 말을 주고받을 때가 있고 심지어는 부모형제간에도 불미스러운 말을 주고받는 경우가 있다.

  특히 요즈음 젊은이들의 말이 조악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거칠고 천한 욕설이 대화 중에 섞이고 뜻을 분간할 수 없는 말이 우리들을 어리둥절하게도 한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걸핏하면 말을 함부로 하게 되니까 그 점을 경계하여 여러 경전에 말의 중요성을 거듭 가르치고 있다.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 속에 “악한 말을 멀리하라. 자신을 해치고 남을 해치고 나와 남을 함께 해치기 때문이다. 착한 말을 하라. 자신을 이롭게 하고 남과 나를 함께 이익되게 한다.”라고 하시고 바른말에 대해서는 《대경(大經)》에 “온화한 얼굴로 상냥하고 자애에 찬 말을 하라.”라고 했다. 또 ‘보시’ 다음으로 ‘애어(愛語)’를 말씀하셨는데 ‘애어’는 실없고 허망하고 듣기만 좋은 말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칠종(七種)의 애어(愛語)를 설명하시였다.

  ① 가희어(可喜語) : 상대의 입장에서 말을 함

  ② 가미어(可味語) : 뜻이 있고 맛이 있는 말

  ③ 가애어(可愛語) : 친애의 말, 먼저 부드럽게 말을 붙이는 말

  ④ 선래어(善來語) : 새로 만나는 벗을 위로하고 먼저 말을 붙이는 것.

  ⑤ 선언경위어(洗言慶慰語) : 길흉화복에는 지체 없이 경위의 말을 보내는 것.

  ⑥ 함소전행어(含笑前行語) : 부드러운 웃음을 품고 앞에 나가서 이야기할 것.

  ⑦ 서안평시어(舒顔平視語) : 부드럽고 평화로운 얼굴, 자애 넘치는 눈, 조용한 시선은 무언의 애어가 된다.

  무량약수사 주지스님은 수행하는 마음으로 평생 돌탑을 쌓아 올리면서 아름다운 말뿐만 아니라 행으로 모든 것을 실현한 스님은 불우이웃 돕기 등 사회적 봉사활동도 활발한 분이다. 이제는 70 성상의 몸이지만 마음만큼은 청아하고 이곳의 약수만큼 깨끗하다.

 흥천사

  청산은 나를 두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성냄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 따라 바람 따라 살다가 가라 하네. 

  나옹선사가 기도 중 참선곡을 지었으며 그 유명한 오도송이 지어진 곳. 문경새재의 마패봉 아래 자리 잡고 있는 천년고찰 조령산(鳥嶺山) 흥천사(興川寺)이다. 

  흥천사는 그 옛날 영남지방의 선비들이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를 보러 가는 길목이었다. 선비들이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과거(科擧)를 보러 한양으로 가는 길에서 남쪽의 추풍령으로 넘으면 추풍낙엽과 같이 떨어지고 북쪽의 죽령(竹嶺)을 넘으면 미끄러진다는 금기가 있어 이곳 조령산으로 향했고, 새재(鳥嶺) 중턱에 있는 흥천사에서 기도를 하고 가면 과거(科擧)에 합격했다고 한다.

  문수보살 가피로 태어났다고 하는 박문수는 장원급제 후 영조대왕(1727년)으로부터 숭유배불이 정책의 기조였던 조선조에 영남 선비들이 과거 길에 흥천사에서 과거급제 기도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와 그 내용을 알아보라는 영조의 밀명을 받고, 영남 암행어사로 제수된다.

  새재를 넘어오는 유생들이 하나같이 흥천사에 들려 법당 부처님께 기도를 하는 것을 본 박문수는 한 유생을 잡고 그 연유를 물으니 '자신은 흥천사 호법신중이니 한양 과거 길에 꼭 흥천사에 들려 기도해야 소원을 성취한다'는 새재 산신의 현몽 때문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날 밤 꿈에 박문수 앞에 새재 산신이 나타나  "흥천사 부처님께서 나라의 인재를 위해 가피를 주는 것인데 어찌 편을 가르는가. 불법은 원융무애하여 진속(眞俗)을 가리지 않으니 그대 또한 나라와 억울한 백성을 위해 공평무사하게 어사 임무를 수행하기 바란다." 며 홀연히 사라졌다.

  이튿날, 영조대왕에게 사실을 그대로 상소를 올린 박문수는 친필로 흥천사(興天寺)란 비문을 표지석으로 세운 뒤 출두하여 공평무사하게 탐관오리를 척결하여 경상우도 관찰사라는 큰 벼슬을 제수받았다. 그래선지 박문수 어사의 친필 표지석이 지금도 남아있고, 흥천사에서 고시, 행시, 공무원 등의 시험공부를 하거나 산신기도를 위해 찾는 이들이 많다. 

  흥천사는 원래부터 기도처였다. 신라 선덕여왕 11년(643년)에 창건된 신라불교 사찰로 원효대사가 100일간 수도 정진하였으며, 고려 태조 왕건이 다녀가고, 고려 말에는 무학대사가 큰 뜻을 품고 기도하는 등 많은 고승들이 모여 기도하였던 유래 깊은 고찰이었기에 마을 이름이 고사리로 불리어 오다 최근에 원풍리로 바뀌었다.

  조선시대 흥천사가 번창하였던 시절에는 소속 암자가 30여 곳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며 6.25 사변 때 금강산에서 수도 정진하던 지산 스님이 주석했다. 그 후 태백산 토굴에서 자연을 벗 삼아 남북통일을 기원하던 동봉 스님(전 일붕선교종 총무원장, 현 일붕신문사 사장)이 이곳에 자리를 잡고 산신각, 극락전, 단군전, 영전각을 증축하고, 종각, 사천왕, 부처님 진신 사리탑, 문수보살 석불조성, 선방, 극락교, 주자장, 객승실, 불교회관(2층, 200여 평) 불사를 완료해 대가람의 위용을 찾게 됐다.

  소원성취를 빌면 하늘에서 복을 내려준다는 의미의 천복궁(天福宮)에는 13m 높이의 동양 최대의 비노자나 석불 부처님이 석물로 조성된 단에 모셔져 있고, 법당 외벽의 기둥과 대들보등도 모두 석재로 되어있는 독특한 건물이다.

  특히 우리 민족의 뿌리인 단군전이 모셔져 있는 유일한 사찰이기도 하다. 경내를 둘러보면 극락전 내 천정과 벽면이 태양아래 우주법계를 이해하기 쉽게 동봉스님이 직접 단청그림과 함께 전면에 세계 각국의 진귀한 500불의 부처님이 눈길을 끈다.

  동봉 스님은 “공부하는 불자들이 우주법계를 보고 500불 부처님 한 분 한 분을 친견하면 불교 교화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며 “이 우주 안에 존재하는 삼라만상 다 불성이 있으니 빈부귀천 남녀노소 누구나 다 평등하게 소원성취하여 하늘(도솔천)의 복을 받았으면 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수옥폭포

  수옥폭포는 조령 제3관문에서 소조령을 향하여 흘러내리는 계류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면서 이루어진 폭포다. 폭포는 3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류의 두 곳은 깊은 소를 이루고 있다. 고려 말기에는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이곳으로 피신하여 초가를 지어 행궁을 삼고, 조그만 절을 지어 불자를 삼아 폭포 아래 작은 정자를 지어 비통함을 잊으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폭포 아래 언덕진 곳에 정자가 있었는데 1711년(숙종 37년)에 연풍현감으로 있던 조유수가 청렴했던 자기의 삼촌 동강 조상우를 기리기 위해 정자를 짓고 수옥정이라 이름 지었다. 또한, 상류의 2단에서 떨어지는 깊은 소는 조유수가 사람을 시켜 물을 모아 떨어지게 하기 위하여 파놓은 것이라 한다.

  흐르는 세월과 함께 정자는 낡아 없어졌으나 1960년에 괴산군의 지원을 받은 지역주민들이 팔각정을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옥폭포는 3단 폭포로 위쪽은 계단처럼 층을 이루며, 폭포와 정자가 어우러지는 절경은 영화와 역사 드라마 제작 시 자주 찾는 장소이다. 

마애이불병좌

  충북 괴산군 연풍면에 있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이불병좌상 형태의 마애불로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충주에서 경상북도 상주로 가는 국도변 산마루턱에 암벽을 뚫어 만든 감실(龕室) 안에 불좌상 2구와 화불(化佛) 등이 조각되었다. 전체적으로 많은 손상을 입었는데, 특히 하부는 마멸이 심하여 형체가 불분명하다.

  두 불상은 옷주름이 대칭으로 표현되는 등 동일한 형태를 보여주는데, 이불병좌상(二佛幷坐像)의 일반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넓적하며 평면적인 불상의 얼굴에는 가는 눈, 뭉툭한 코, 꽉 다문 입 등이 묘사되어 있어, 건장한 인상을 준다. 직사각형의 신체는 넓은 어깨와 굵은 팔로 인해 매우 강건해 보이면서도 가슴이 들어가서 움츠린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두 손은 무릎 위에 포개놓았는데, 그 위로 옷자락이 덮여 흘러내렸다.

  배 부근까지 깊게 파인 U자형의 통견의(通肩衣)는 굵은 선각으로 평행하게 처리되었으며, 가슴에는 옷깃 모양(y형 또는 Y형)의 승각기(僧脚岐)가 표현되었다. 복부 아랫부분은 마멸이 심해 형태를 알아볼 수 없다.

  불상 좌우의 좁은 여백에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보살상 같은 것이 새겨져 있고, 머리 주위에는 각 5구씩의 화불(化佛)이 새겨져 있다. 또한 불상의 군데군데에는 채색을 가했던 흔적이 엿보인다.

  이불병좌상은 중국에서는 5-6세기 북위시대에 크게 유행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발해 조각 가운데 여러 구 전해온다.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는 경주 황룡사지출토 금동이불병좌상이 전하며, 고려시대에는 청송 대전사(大典寺)에서 출토되었다고 하는 금동이불병좌상이 있다. 괴산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은 고려초 10세기 중후반에 제작된 귀중한 작품으로 그 규모로 보아 왕실이나 거대 호족의 발원으로 조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  무량약수사

◎  흥천사

◎  수옥폭포

◎  마애이불병좌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