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지혜/암도스님

담양에 둥지 튼 암도스님

산울림(능인원) 2011. 4. 27. 10:25

南山 아래 남촌 대나무숲에 ‘마하무량사’ 개원



가는 곳마다 재미있는 법회를 이끌어 ‘설법의 달인’ 으로 유명한 조계종 前교육원장 암도스님이 潭陽에 둥지를 틀었다.
불교계에서 차지하는 암도스님의 위상은 참으로 높고 위대하다. 佛法이 넓고 커서 깊이를 헤아리기 어렵고 說法에 탁월한 慧智를 갖고있어 종단에서는 큰 스님으로 우러러 존경받는 스님이다. 그런 스님이 담양에 둥지를 틀었으니 담양의 佛子는 물론이고 모든 이들에게 큰 복이요, 행운이 아닐 수 없다. 

 



10년전 조계종 교육원장을 끝으로 종단의 소임을 모두 놓고 백양사 청량원에 주석하며 전국을 누비며 ‘행복법문’을 계속하던 암도스님은 담양에 마련한 새 도량에서 여생을 보낼 참이다.
새 도량은 ‘성모사(聖母寺)’ 라 하여 담양읍 남산리 南山 아래 南村에 마련했다. 금년 6월 이곳에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 지종스님을 모신 가운데 삼존불을 봉안하고 개원식을 봉행했다. ‘성모사’는 ‘대성자모 관세음보살’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개원했지만 앞으로 아미타불을 모신 도량으로 ‘마하무량사’로 가꾸어 갈 요량이다.

첫 출가인연도 있고 최근에 머무르던 백양사도 있지만 스님이 굳이 담양의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많은 대중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함이라고 한다.
스님은 아침에 나갔다 늦게 돌아오는 일이 많아 대중생활을 제대로 못하는데다 너무 돌아다녀 대중들에게 미안하다고 한다. 스님은 요즘도 한 곳에 3일을 머무르기 어려울 정도로 바쁘다. 정기법문 외에 2,3일에 한번꼴로 법문을 나간다. 수첩은 더 이상 메모할 틈이 없을 정도로 법문 일정으로 빼곡하다. 그 회수만 해도 6000회가 넘었다.

스님에게 發福을 부탁하면,
“복을 받으려면 먼저 지어야지. 간단해. 기도도 하고 좋은 인연을 자꾸 쌓아가야지. 육바라밀이지 자비보시로 지계정청으로 복을 짓는 거야. 남을 상대할 때 부모가 자식 사랑하듯이 조건 없이 주는 것, 자비심 갖고 보시하는 것이지. 계를 지킨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자기행복을 위해 지키는 것이야. 건강해야 복도 지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 기본이 오계에 다 들어있어” 라는 답이온다. 여기에서 ‘오계’란 유교에서 말하는 오상(五常) 즉,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말함이다. 이것을 실천덕목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南山은 예로부터 潭陽의 좋은 氣가 모여있는 곳이라 했다.
이곳에 도량을 짓고 법력이 출중한 스님이 은거 하였으니 큰복이 아닐 수 없다. 특히나 암도스님의 온화한 인품에 철학적 깊이가 느껴지는 혜안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담양사람들로서는 크나큰 행운이 될것 같다. / 장광호 국장

 

암도스님은....

 




불교식 용어로 말하자면, 전국을 돌아 다니며 포교하는 ‘부루 나존자’ 이다.
1938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난 스님은 집안 사정으로 초등학교 5학년인 13살때부터 신문배달을 해야했다. 그러던 중 종단에서 운영하던 정광중학교에 진학, 원효스님 원광스님 등 고승들에 대한 책에 재미를 붙이는 한편 백양사 출신 교사들과 접하는 기회가 많아졌다.
자연히 불교와 출가에 대한 생각이 깊어갔다, 17살 되던 1955년 백양사를 찾았다. 첫 은사는 서옹스님. 하지만 고등학교는 다녀야 한다는 주변 분위기에 밀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학원’지에 낸 소설이 입선하는 바람에 소설가 별명을 달고 다녔고 기자가 되고 싶어 속기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신문배달을 하며 다져진 체력이 바탕이 되어 군복무 시절에는 태권도 교관까지 할 정도로 매사에 열심이었다. 하지만 무슨 일을 하던 뇌리를 떠나지 않는 가난에 대한 고뇌는 한 집안의 장남을 결국 산으로 향하게 했다. 서옹스님 이외에 은사를 두분 더 만나는 인연이 됐다.
4급 공무원시험 준비를 한다며 부모를 속이고 재출가 했다. 화순 용암사에서 지금의 은사인 원로의원 천운스님(대흥사조실)을 만났지만 다시 백양사로 갈 수밖에 없었다. 훗날 태고종 종회 의장을 역임한 월하(月河)스님을 잠시 은사로 모시기도 했다.

인재가 아쉬운 시절 “ ‘절’ 집에도 현대교육을 받은 스님들이 절실하니 대학에 진학하라”는 권고에 서른이 넘은 나이에 동국대에 들어가 대학원까지 마치고 그 어렵다는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조계종 중앙상임포교사로 전국을 다니며 분주한 가운데도 총무원 감찰국장, 총무부장을 비롯한 포교부장, 포교원장, 백양사 주지 등 25년간 종단 내외의 크고 작은 소임을 맡아 정성을 다하는 가운데  ‘종단의 지킴이’란 말을 듣기도 했다.
중앙승가대와 동국대 강단에서 후학 양성에도 힘을 쏟았으며 제2대 교육원장 소임을 마친 후에는 다시 백양사로 돌아가 운문암 선방에서 3년을 나고 청량암에서 정진한 후, 올해 6월 담양 남촌에 조성한 새 도량 ‘마하무량사’ 에 주석하고 있다.  (불교신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