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지혜/암도스님

수행 정진하면 자비심은 절로 솟아나(암도스님)

산울림(능인원) 2011. 4. 4. 17:04

암도스님께서 백양사 청량원에 계실때 한가로운 부채질 뒤로 후덕한 낯빛이 비쳤다. 천하의

알렉산더 대왕 앞에서 ‘볕을 가리니 자리 좀 비켜달라’는 ‘무례’를 서슴지 않았던 디오게네스.

평생을 통나무 속에서 산 자유와 검박의 철인을 2500년 뒤 다시 만난 느낌이다.

암도스님은 1955년 17세때 백양사로 출가했다. 정화운동의 혼란 통에 공부의 때를 놓쳤다.

스님은 수학여행 온 학생들 잠자리나 봐주던 ‘백양여관 보이’였다고 초심자 시절을 회상했다.

그러나 나이 서른 너머 시작한 공부, 득달같이 동국대 불교학과 박사과정까지 마쳤다. 무학의

설움에서 태어난 만학의 무서움은 지금껏 진행형이다.

1999년 교육원장에서 물러난 뒤 6년간은 재발심의 기간이었다.  스님은 서울의 매캐한 풍수,

도시인들과의 시비에 녹초가 된 몸을 백양사 청량원에서 추슬렀다.  몸과 마음이 어느 정도

중심을 잡으니 말도 정돈되기 시작했다.  스님은 현재 불교적 관점에서 인간학을 정립하는

작업에 몰두하는 중이다.  이른바 ‘사람과 인간(人間)과 인류(人類)의 3대 목표.’ 사람은 개인적

자아, 인간은 사회적 자아, 인류는 전체적 자아다.  “개인적 자아가 (나 그 자체로서의) ‘나는 무엇

인가’라고 묻는다면 사회적 자아는 (사회적 관계 속의)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지. 전체적 자아는

(사람을 포함한 삼라만상 속의) 나를 묻는 거야.” 사람과 인간, 인류는 각각 자유와 평등, 평화의

가치를 대변한다. “사람의 생각과 행위는 절대적으로 자유롭고, 사람 사이의 관계는 절대적으로

평등하다”는 주장이다.

아울러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반목하지 않고 공존하는 경지가 평화다. 삼대(三大)의 묘미는

부처님이 가섭존자에게 세 가지 상황 속에서 깨달음을 전했다는 삼처전심(三處傳心)에서 엿볼

수 있다. “부처님이 꽃을 든 행위도, 가섭존자가 꽃을 보이고 웃어보인 행위도(염화미소,

拈華微笑) 불성의 발현이지. 일말의 가식이나 조작, 위선 없이 마음을 여과없이 드러내보인

거야.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절대자유의 몸짓이지. 부처님이 가섭존자에게 자신의 자리를

반으로 나눠 나란히 앉은 일(다자탑전분반좌, 多子塔前分半座). 절대평등을 몸소 보인 거야.

약자의 저항에서 평등을 기원하긴 요원한 일이야. 하지만 강자가 포용하면 평등은 금세 이뤄져.

마지막으로 열반에 든 부처님이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보인 행위(곽시쌍부, 槨示雙趺). 가장 큰

공포가 뭔가.  죽음이지.  관의 안팎으로 걸쳐있는 부처님의 몸,  부처님은 생의 마지막까지 죽음은

서글픈 종말이 아니라 설레는 시작임을 가르쳤어.  생은 사의 근본이고 사는 생의 근본이야.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아.”

인간의 최종 난관인 죽음에 대한 괴로움까지 떨쳐버린 평화다.  자유민주주의 기본원리를 불교적

시각에서 확대 재생산한 사상의 완결이 기대된다. 물론 거대담론의 내용보다,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지적 상상력을 잃지 않는 노익장이 귀감이 된다.  3대 목표의 성취는 완전한 사람의

자재와 결집이라는 전제가 충족돼야 가능한 논리다.  완전한 사람은 바로 계정혜 삼학의 겸수를

통해 태동한다.

스님의 박사학위 논문주제는 ‘인도 불교의 삼학 연구.’ 계율 선정 지혜를 일컫는 계정혜 삼학은

수행자라면 세 가지 모두를 갖춰야 한다.  그러나 “선 일변도로 치우쳐 계율과 교학을 등한시한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스님은 율사와 강사에 대한 선사들의 험담을 자주 들었다. “율사는

‘멸치도 못 먹는 옹졸한 인간’이라 무시하고 강사는 ‘입만 살았다’고 헐뜯곤 했어. 가는 말이

불쾌하니 오는 말이 고울 리 만무하지. 선사들에겐 골방에 들어앉아 ‘이뭣꼬’만 중얼거리는 사람들

이라는 오명이 되돌아오는 거야.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함께 무너지는 풍토, 이대로는

안 된다 싶었지.” 스님은 신(身) 구(口) 의(意) 삼업을 실마리로 “절름발이가 된” 한국불교의

균형을 맞춰갔다.  “정신 없는 육체는 식물인간일 따름이고 정신만으로 사람은 존재할 수 없지.

그리고 말이 글자가 되어 사상과 문화가 형성되지. 인간의 핵심은 몸과 마음, 그리고 말이오.

그리고 자기완성은 몸과 마음과 말에서 빚어진 업을 녹이고 쪼개고 불태우느냐가 관건이지.

” 신구의는 각각 계정혜와 연결된다. “계를 잘 지켜 몸이 건강해지면 마음이 안정되고, 마음이

안정되면 저절로 지혜가 솟아나지.  삶이 그렇지 않나.  산란한 마음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골머리를 앓아봐야 악수만 두고 말아. 그리고 온몸이 쑤시고 아파죽겠는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사랑할 수 있나.” 

최근 ‘이뭣꼬’는 화두가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돼 선가의 논란이 뜨겁다.  화두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야 한다는 등 간화선에 대한 갑론을박이 빈번하지만, 합의가 도출되진 않았다. “옛

조사들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라고 강조했지. 한국불교가 세계불교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 그런데 마냥 손가락만 빨고 있으면, 그 날이 오나. 서로

손가락 길이나 재고 있으면 어쩌자는 노릇인가.” 스님은 “간화선의 현대화 등 현실에 맞는

수행법을 개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화두는 1000여년전 중국인들의 사유구조에서 나온 산물이야. 역사.문화적 환경이 당시와 전혀

딴판인 현대인들이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렵지.  특히 형이상학 등 서양적 사유방법에

익숙한 지성인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화두를 구체화하는 방법도 생각해볼만 하지.”

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해선 화두의 재구성도 필요하지만 화합의 재구성이 더욱 절실하다.

“겉으로는 일불제자라면서 문중과 계파로 갈려 시시비비가 끊이질 않아. 불교의 목적은 간단히

말하면 평화야.  무엇보다 의견이 다르다고 감정적으로 대립하지 말고 미래지향적인 결집이 있어야지.”

수행은 ‘개인의 완성’이고 포교는 ‘사회의 완성’이다. 성숙한 인간만이 사회를 성숙시킬 역량 그리고

자격을 갖는다.  “산문에 처음 발을 디딘 행자들에게 염불을 많이 시키는 게 다 이유가 있는 거야.

세간의 때를 채 벗지 못한 출가자는 감정이 격하기 마련이지. 삶에 대한 의문과 불만으로 가득찬

사람의 머리에 느닷없이 화두를 집어넣으면 머리가 터져버리고 말아.” 염불은 초심자의 감정을

순화하기 위한 방편이다.  심신이 정상으로 되돌아오면 강원에서 이론을 습득해 지성인이 되어야

한다.  강원에서 배운 부처님의 말씀을 통해 부처님의 마음에 도달해야 한다. 그것이 선이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기초부터 차근차근 밟아올라가는 것이 중요하다.  “울창한 삼림도 작은 풀 한

포기에서 시작되는 법이오. 올곧은 신심 없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 없이, 어떻게 광대

무변한 깨달음을 일거에 낚을 수 있겠는가.” 아울러 “상구보리가 철저해야 하화중생도 가능하다”는

것이 스님의 오랜 지론이다. “남을 가르치려면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야 한다는 건 상식이야.

그저 신도를 늘려 세력을 키우겠다는 속셈으로 가르침이 아닌 흥정만을 일삼는다면 참다운 수행자가

아니지.”

계정혜 삼학의 궁극적 목표는 해탈이다. “해탈은 자유야. 그러니 남보다 앞서 해탈을 이루려 하는

수행자는 누구보다 자유로워야지. 화쟁을 주창한 원효스님도 대승불교를 창시한 용수보살도 대자유인

이었어. 성인은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자가 아니라 조직을 변혁하는 자야.” 직접 칠판에

글씨를 써가며 스님은 당신의 삶과 생각을 풀었다. 즉석강의의 결말은 ‘자유.’ 스님의 황혼을 이끄는

동력도 자유다. 자기자신을 더없이 사랑하기에 남도 흔쾌히 포용할 수 있는 자유, 곧 불성이다.

※ 암도(岩度)스님은 지난 30년간 6000회에 달하는 법문을 한 설법의 달인이다. 풍부한 비유와

경전 문구의 현대적 해석, 불자들의 눈높이에 맞춘 쉬운 언어는 누구에게나 쉽게 다가간다. 예컨대

〈금강경〉에는 성인의 단계를 지칭하는 단어로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란 말이 나온다.

범어를 소리 나는 대로 번역한 통에 일반인이 그 뜻을 알기란 쉽지 않다.  이해를 돕기 위해 암도스님은

 ‘지성인’ ‘철인’ ‘현인’ ‘성인’이라고 뜻을 푼다.  지성인은 말그대로 기본적 지식과 소양을 갖춘

사람이다. 철인은 어느 한 분야에서 일가견을 이룬 거장을 지칭한다.  현인은 여러 분야에 걸쳐 두루

식견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대중의 의식을 계도하는 단계다.  성인은 한 시대를 바꿀 수 있는 전지

전능한 지혜의 소유자를 일컫는다.

스님은 풍류도 아는 분이다.  “불자로서 바르게 사는 것과 동시에 멋지게 살라”고 권유한다. 불자로서

바르게 살려면 팔정도를 잘 지키면 된다.  그리고 멋지게 사는 방법으로 체력 법력 재력 권력 매력 등

오력(五力)을 소개한다.  행복하게 살려면 건강한 육체와 정신, 어느 정도의 돈과 권력이 필수적이다.

아울러 남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술도 터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끊임없이 자기자신을

탁마하고 남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중생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며 불교의 본뜻에 대해 정확히

새기는 스님의 법문은 인기가 높다. 1938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난 암도스님은 1955년 백양사에서

출가했다. 1972년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해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1980년 백양사 주지, 1990년

중앙승가대 불교학과 교수, 1997년 조계종 교육원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