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지혜/경봉스님

전삼삼 후삼삼 2(前三三 後三三 : 경봉스님 법문중에서)

산울림(능인원) 2025. 4. 21. 21:47

  그런 말은 모르겠기에 다시 동자에게 법문을 청하였다. “동자여 나를 위하여 법문을 해주세요”라고 청하자 동자가 법음을 들려주는데

  面上無嗔供養具(면상무진공양구 : 얼굴에 화를 안내면 공양 거리요)

  口程無嗔吐妙香(구정무진토묘향 : 입으로 화를 내지 않으면 묘한 향을 토함이요)

  心內無嗔是珍寶(심내무진시진보 : 마음 가운데 성냄이 없으면 이것이 참 보배요)

  無拓無梁卽眞常(무척무양즉진상 : 물듦과 때가 없으면 곧 항상 참됨이로다)

  잠시 후 돌아다보니 절도 사람도 모두 홀연히 사라지고 그저 깊고 푸른 산중이었다. 아하, 그 노인이 바로 문수보살, 자신이 친견하려고 이 깊은 산간을 지극한 신심으로 찾아 헤매던 바로 문수보살이었건만, 지혜(智惠)의 눈이 열리지 못하여 봐도 보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였으니 , 그곳을 향하여 무수히 절을 하고 한 번 더 친견하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염원(念願)을 하였다.

  그 후 무착은 공부를 참으로 열심히 하였다. 어느 때 오대산에서 전좌(典座)라는 소임을 맡아보고 있으면서 동지 팥죽을 큰 당구솥에 쑤고 있었는데, 풀떡 푸떡하고 끓어오르는 죽 솥에서 만(萬) 문수가 차례로 죽 속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무착이 주걱으로 이리 치고 저리 치고 막 치면서 “문수도 자기의 문수요 무착도 내 무착이다!”하자 무수보살이 방망이를 맞고 나오며 하는 말이 “네가 삼대겁(三大劫)을 수행해서 노승의 혐의를 입었구나. 쓴꼬두박은 뿌리까지 쓰고 단 참외는 꼭지까지 사무쳐 달다

  爾三大劫修行(이삼대겁수행)

  還被老僧嫌疑(환피노승혐의)

  苦瓠連根苦(고호연근고)

  甘芃徹蓆甘(감봉철석감)

  첫 귀는 무척에게 향상일로(向上一路)를 은근히 일러주는 동시에 문수 자신의 전신활로(轉身活路)를 슬쩍 보인 것이고, 둘째 귀는 무착의 깨친 것이 아직 사무치지 못한 것을 일러준 말이다. 그러니 무착이 공부가 익기 전과, 공부를 이루어서 눈이 밝아졌을 때와를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공부를 성취하기 전에는, 그저 성현을 한 번 친견하려고 원력을 세우고 깊고 깊은 오대산을 방황하다가 친견을 하였는데도 눈이 밝지 못하여 알아보지도 못한 채 헤어져서는 한 번만 더 친견하게 해 달라고 원력을 세웠는데, 알아봤던지 알아보지 못했던지 성현을 한번 더 친견하면 모든 업장과 수행의 장애가 모두 녹아지고. 성현의 가피(加被)를 입어서 마침내 공부를 성취하고 난 후엔, 문수가 나타나도 문수는 제 문수고 무착도 내 무착이다.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이리 치고 저리 치니 참으로 대단한 용기이다.

  문수대지사(文殊大智師)여

  저 법에 자재하고 살활종탈(殺活縱奪)에 자재하니 중생계(衆生界)에 밝은 빚이요 인천(人天)의 사장(師長)이로다

  山窮水盡處(산궁수진처 : 산이 다하고 물이 다한 곳에)

  柳錄又花紅(유록우화홍 : 버들이 푸르고 꽃이 붉었도다)

  여러 선남(善男) 선녀(善女)가 이렇게 많이 모였는데, 부모 밑에 학생으로 있을 때는 아무 생각과 걱정이 없었는데, 학교를 마치고 장가가면 좋다고 아버지 흉내 내듯이 장가보내고 처녀는 어머니 흉내 내듯이 무슨 좋은 일이나 있나 실어서 시집을 간다. 이렇게 해서 가정을 이루어 놓으니 죽을 지경이다. 꼼짝 못 하고 오만 걱정, 사람 아니면 물질, 물질 아니면 사람, 이 두 가지에 밤낮없이 걱정이다.

  어찌 되었든 이 두 가지에 초월해서 사바세계를 무대로 삼고 멋들어지게 연극을 잘하고, 늘 쾌활하고 명랑하고 낙관적인 기분으로 살라고 이른다.

  어떤 사람이 산에 갔는데 큰 곰이 나타나서 잡아먹으려고 덤빈다. 하도 큰 놈이 덤벼서 우선 급하여 큰 나무 뒤에 숨으니, 미련한 곰이 나무 뒤로 와서 사람을 잡아야 할 텐데 나무를 껴안은 채 다리를 들어 사람을 잡으려 한다. 사람은 지혜가 있어서 곰 다리를 꼭 움켜 잡았다. 곰이 사람을 물려고 하니 나무가 있어 못 물고 이리로 달아나려고 해도 사람이 두 다리를 꽉 잡아서 못 가고 꼼짝 못 하고 있는데, 사람은 곰이 자기를 잡아먹으려고 하니 곰 다리의 냄새는 누린네가 나지만 다리를 놓으면 죽을 터이니 그것이 생명선이라 밥도 굶고 아주 죽을 지경인데 곰도 죽을 지경이다.

  필사적으로 곰다리를 거머쥐고 있기를 사흘만에 어떤 나무꾼이 큰 도끼를 지게에 얹어 왔는데 누가 큰 곰 다리를 거머쥐고 있는게 아닌가, 아이고 여기 있다가는 저 곰한테 죽겠구나 하고 달아나려고 하자, 곰 다리를 거머쥐 이가. ”여보게, 그 도끼로 이 곰을 잡자, 이 곰 쓸개는 금보다 비싸다네, 이 곰이 쓸모가 많으니 이 곰을 잡자.“고 하니 나무꾼이 그 말에 귀가 솔깃해서 도끼를 가지고 오자 ”여보게 이 다리를 쥐고 있게나, 나는 곰을 많이 잡아봤는데 도끼로 요긴통을 바로 딱 때려야 잡지, 만일 잘못해서 설 때려 놓으면 자네도 죽고 나도 죽네. “ 그러니 많이 잡아 봤다고 하자 슬며시 곰다릴 거머쥐었다. 곰다를 잡고 있던 사람은, 사흘씩이나 굶고 곰에게 시달리다가 곰 다리를 다른 이에게 전가시켜 놓으니 어찌나 좋던지 ”휴유.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앉아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실컷 쉬고는 한다는 말이 ”여보게, 내가 말은 그렇지만 실은 곰을 잡아 보지 못했다네, 그러니 내가 잘못 섣불리 곰을 치다가는 자네도 죽고 나도 죽네, 그러니 누가 오거든 나처럼 자네도 곰다리를 전장시키고 가게나 “하고 달아났다.

  그러나 처녀로 있고 총각으로 있을 때에는 아무 걱정 없었는데, 장가가고 시집가니까, 마치 곰다리 거머쥔 것과 같다, 꼼짝없이. 그러나 이 곰 다리, 집안 살림살이의 곰 다리는, 아들 자성시켜 며느리를 맞아서 살림 넘기고, 그러면 되지 않겠는가? 본래 없는 것을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어 놓으니 마치 곰 다리 거머쥔 것과 같은 처지라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모든 일에 당기면 늘어지고 놓으면 오그러 지는 신축성을 가지고 마음을 쓰게 하는, 폭울 넓게 하고 남에게 관대하게 포용하고 물질과 사람에 초월한 정신을 가지고 멋들어지게 살라고 하는 말이다.

  부모 태중에서 나올 때 남편을 업고 나왔나, 마누라를 안고 나왔나 나식들을 안고 아왔나 빈 몸 빈손으로 나왔는데 이것에 애착이 붙어서 놓으려 해도 놓을 수 없고, 밤 낮 없이 걱정만 한다. 그런 망상 다 버리고 어려움이 있으면 본연의 천진면목 부모미생전(傅母未生前) 본래면복(本來面目), 그 망상(妄想) 없는 경지에 가서 생각하면 올바른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니 현실(現實)을 실상(實相) 그대로 소중하게 여기긴 여겨도, 너무 집착하지 말고 물질과 사람에 모든 사람들이 집착하지 마는 초연히 생각하고, 초월한 정신으로 사물을 대하면 모든 일에 달관할 수 있는 것이다.

  반야 바라밀이 반야 바라밀이 아니라  이 름이 반야 바라밀이요, 오늘 설법이 설법이 아니라 이 이름이 설법이어야 한다. 반야경(般若經)에 반야 바라밀이 반야 바라밀이 아니라 이 이름이 반야 바라밀이라 하였으니 이 이름 뿐이라는 말이다. 일상생활에 있어서 김 아무개다 박 아무개다 이 아무개다 하고 이름도 있고 성(性)도 있지마는 어디 본래 이름이 있나, 부모 태중에서는 이름도 성도 없는 것인데 다만 몸에 대명사로 붙여서 부르기 편리하게 한 것이다. 그와 같이 진리법(眞理法)은 말로써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부처님과 조사(組師)가 말을 붙여서 이렇게도 말하고 저렇게도 말한 것일 따름이다. 그러니 반야 바라밀이 반야 바라밀이 아니라 이 이름이 반야 바라밀이요, 오늘 설법이 설법이 아니라 다망 이 이름이 설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