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만법이 나지도 않고 입체만법이 없어지지도 않는다. 만약 이렇게 알 것 같으면 모든 부처가 항상 나타나 있느니라. 이 말은 ≪화엄경≫에 있는 말씀인 동시에 불교의 핵심이다. “불생불멸(不生不滅)” 이는 우주의 근본원리이며 붓다의 대각(大覺) 자체에서 모든 불법이 불생불멸의 기반 위에서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생불멸의 원리는 매우 어려워서 선지식의 혜안이 아니면 이 원리를 볼 수 없어 불교 이외의 종교나 철학에서는 거론하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불교의 전용어가 되어 왔다.
그런데 보통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세상만물 전체가 생자필멸(生者必滅)이다. 난 자는 반드시 죽는다 없어진다는 것이다. 세상에 생자필멸 아닌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러면 어째서 부처님은 모든 것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하셨을까. 그 말이 거짓말이 아닌가. 이것을 바로 알면 마음의 눈을 뜨고 도를 깨우치게 되는 것이다. 일체만법이 다 불생불멸이라면 이 우주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것은 상주불멸(常住不滅)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불생불멸인 이 우주를 상주법계(常住法界)라 한다. 항상 머물러 있는 법의 세계란 뜻이다.
또 ≪법화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시법주법위 세간상상주”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물러서 세간상 이대로가 상주불멸이다. 세간상이란 언제나 시시각각으로 생겼다 없어졌다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겉보기에 그렇고 실지는 상주불멸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제법실상(諸法實相), 모든 것의 참모습이라고 하며 화엄경에서는 그것을 무진연기(無盡緣起)라고 한다. 모든 것이 다 불생불멸인 동시에 이 전체가 또 융화하여 온 우주를 구성하고 아무리 천변만화(千變萬化)하더라도 불생불멸 그대로이며 상주법계 상주불멸 그대로인 것이다.
가령 바닷물이 아무리 큰 장마가 져 물이 많이 내려가도 바닷물은 크게 불어나지 않는다. 또 아무리 가물어 물이 말라도 바닷물은 크게 줄지 않는다. 안쪽에서 없어지면 한쪽에서 그만치 생겨난다. 이것을 바로 알면 우리 불교를 바로 아는 동시에 문자 해결되는데 이것을 모르면 역시 불교를 모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누구든지 산중에 들어가 참선을 하든지 도를 닦아 가지고 결국에 깨우쳐야지 그렇지 않으면 모를 테니 그것 또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설사 도를 깨쳐서 불생불멸하는 이 도리를 확연히 자기가 알고 보지는 못하더라도 과학적으로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옛부터 여러 가지 철학도 많고 종교도 많지만 이 불생불멸에 대해서 불교같이 분명하게 주장한 철학도 없다. 그러나 과학이 고도로 발달됨에 따라 원자물리학에서도 이 자연계는 불생불멸의 원칙 위에 구성되어 있음을 증명하여 불교 이론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것은 아인슈타인 상대성 이론의 등가원리(等價原理)로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고전 물리학에서는 자연계를 구성하고 있는 근본 요소인 이너지와 질량에 대해 각각 에너지 보존법칙 및 질량 불변의 원리로써 질량과 에너지는 각각 존재하며 질량이 에너지가 될 수 없고 에너지가 질량이 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현대물리학에 와서는 질량이 곧 에너지가 될 수 있고 에너지가 바로 질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래서 고전물리학에 질량 불변의 법칙을 고쳐서 통합하여 등가원리(等價原理) 또는 에너지 보존 법칙으로 호칭하게 되었다.
자세히 말하면 질량 전체가 에너지로 전환되고 에너지 전체가 질량으로 전환되어 전환 이전이나 이후에 질량과 증감이 없다는 것이다. 즉 질량이 에너지로 전환될 때 질량의 손실이 없이 에너지로 전환되고 또 에너지가 질량으로 전환될 때도 에너지의 손실이 없이 질량으로 전환되어 질량 즉 에너지 또 에너지 즉 질량임이 실증된 셈이다.
그러니 질량이 에너지로 전환되었다고 해서 질량이 아주 없어진 것이 아니며 또 에너지가 새로 생긴 것도 아니다. 또 에너지가 질량으로 전체 전환되었다고 해서 에너지가 없어지고 질량이 새로 생긴 것이 아니다. 그러니 불교의 근본원인 불생불멸 불구부정 그대로이다. 이것을 비유로 말하면 얼음은 질량, 물은 에너지와 같은 것이다. 얼음 한 그릇이 녹아서 물이 될 때 얼음이 아주 없어지고 물이 새로 생각 것이 아니며 물이 얼음이 될 때도 물이 아주 없어지고 얼음이 새로 생긴 것이 아니다. 그러니 물 한 그릇이 얼음 한 그릇이며, 얼음 한 그릇이 물 한 그릇이 되어 늘거나 줄거나가 없으며 물이 곧 얼음이며 얼음이 곧 물이다. 그러니 여기서도 불생불멸 부증불감이 된다.
이렇게 현대물리학자들은 자연계에 불생불멸 부증불감을 공인하는 것으로 우주의 상주불멸은 자연히 성립되며 불교의 상주법계(常住法界)를 성명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이 과학이 불교에 접근해 오고 동시에 불교의 원리를 설명하는데 많은 재료를 설명해 주고 있다. 또 반야심경에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 있는데 색이란 유형의 물을 말하고 공이란 텅 빈 무형을 말한다. 그러니 물질이 공이 되고 공이 또 물질이 된다 하니 유형이 무형으로 통한다는 것이다.
곤란한 말이지만 바위가 허공하고 통할 수 있을까? 그러나 자연계 현상을 보더라고 유형인 질량이 무형인 에너지로 변하고 무형인 에너지가 유형인 질량으로 변한다는 것이니 불교의 “색즉시공 공즉시색” 그대로인 것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불교에서는 “중도법문”이라 한다. 부처님께서 처음 성불하시고서 녹야원에서 5비구를 찾아서 첫말 씀으로 “나는 4중도(中道)를 정등각(正等覺)했다.”라고 하셨다. 중도를 깨쳤다는 것이니 중도는 바로 불교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그럼 중도란 무엇인가? 양변(兩邊)을 여윈 것 즉 상대를 떠난 것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양변이 대립되어 있는 것이다. 앞에 말한 생과 멸이 양변인 것이다. 생과 멸은 서로 반대인데 그런 양변을 떠난 것이 생도 아니며 멸도 아니니 결국 어떻게 되느냐, 질량이 생겼다는 것은 에너지가 없어졌다는 것이고, 에너지가 없어졌다는 것은 질량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이 즉 멸이고 멸이 즉 생인 것이다.
중도는 상대 양변을 떠나서 그 상대 양변이 융합되는 것 바로 모순이 융합되는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흔히 중도를 중간이라고도 하는데 중도는 중간이 아니다. 선과 악이 대립되어 있는데 중도에 의하면 선과 악을 초월하여 선악이 서로 융통되는 것이다. 선과 악이 서로 통해지는 것 그래서 선이 즉 악이고 악이 즉 선이다. 고전 물리학에서는 질량과 에너지를 두 가지로 보고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현대문리학에 와서는 에너지가 즉 질량이고 질량이 즉 에너지다. 에너지와 질량이 서로 통해 버리는 것으로 되었다. 이것이 불교의 중도의 원리이다. 그래서 중도법문이란 일체 만물이 서로서로 융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모순과 대립을 완전 초월하여 서로 융합해 버리는 세계를 말한다. 이상의 이야기를 종합해 볼 때 불교의 근본은 불생불멸인데 그것이 중도법인 것이다.
요즈음 학자들이 말하는 4차원의 세계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설 이론에서 제시된 것이지만 이것을 완전히 수학적으로 증명한 사람은 ‘민코프스키’라는 사람이다. 민코프스키는 4차원의 공식을 완성해 놓고 첫 강연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모든 존재는 시간과 공간을 떠난다.” 시간과 공간은 그림자 속에 숨어버리고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는 시대가 온다. 3차원의 대립은 소멸되고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는 세계가 있다. 결국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는 세계를 4차원 세계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에 무애법계(無碍法界)는 양변 상태를 떠나서 서로 통해 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4차원 세계가 불교의 무애법계 그대로는 아니지만 시공(時空)을 융합한다는 것만으로도 중도법문을 설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중도(中道)란 모든 대립을 떠나서 그 대립이 융화되어 서로 합하는 것이다. 대립 중에서도 있고 없는 대립이 제일 큰 것이다. 유와 무가 서로 합하는 것을 중도라 한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유(有) 무(無)의 대립 관계에 대하여 좋은 일화가 있다.
변증법으로 유명한 헤겔이 대문호 괴테를 찾아갔다.
괴테 : 참 질 오셨습니다. 당신의 그 변증법이란 무엇입니까?
헤겔 : 변증법이란 모순의 논리입니다.
괴테 : 모순의 논리라고요. 그렇다면 선이 악이 될 수 있고 비(非)가 시(是)가 될 수 있습니까. 또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될 수 있습니까?
그러니 헤겔이 당황을 했다.
헤겔 : 아! 그거야 판단하는 사람의 두뇌여하에 달린 것 아닙니까?
괴테 : 그렇다면 당신의 변증법을 연구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우생학을 많이 연구하여 두뇌 좋은 사람을 자꾸 만들어 내면 그게 좋지 당신같이 변증법을 연구할게 뭐 있습니까.
이래서 헤겔이 괴테한테 크게 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다.
헤겔의 변증법은 모순의 대립이 시간의 간격을 두고서 발전적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이렇게 불생불멸의 중도의 원리에 보면 모든 것은 서로서로 생멸이 없고 동시에 서로 융합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고 모든 것이 무애자재(無碍自在) 안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상대를 떠나서 융합되는 것이다. 그래서 있는 것이 즉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이 즉 있는 것이다. 모든 상대 모순투쟁은 완전히 사라지고 싸움할 내야 싸움할 것이 없다. 이렇게 되면 이것이 극락세계이며 절대세계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4차원의 절대 영원한 세계에 살고 있으면서 3차원의 상대 유한의 세계로 착각하여 살아가고 있으니 착각한 망견만 버리면 원대로 우리는 4차원 세계의 절대 영원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마음의 눈을 감고 살면 상대 생멸의 세계이며 마음의 눈을 뜨고 살면 모두가 불생불멸의 절대세계에서 사는 것이 된다.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태양이 온 우주를 훤히 비추고 있는데 자꾸 어둡다 어둡다 하면서 갈팡질팡하지 말아야 된다. 바로 알고 보면 우리 앉은자리 선 자리 이대로가 절대의 세계 극락세계인 것이다. 우리 모두 마음의 눈을 뜨고 여유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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