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지혜/참 지혜

세가지 버려할 것들

산울림(능인원) 2011. 9. 1. 21:50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부처님의 위신력을 이어받아서 다시 크나큰 뜻을 말하고자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

하셨다.“설해보라.”

승만 부인이 부처님께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드리는 일에 대하여 사뢰었다.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드리는 일(攝受正法)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드리는 일는 사람은 올바른 일을 받아드리는 일과 다르지 않으며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드리는 일은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드리는 일을 받아드리는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곧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인 선남자 선여인이 곧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드리는 일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만약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인 선남자 선여인이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드리고자

한다면 세 가지를 내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몸, 목숨, 재물이 그것입니다.

 

선남자 선여인이 몸을 버릴 수 있다면 생사, 윤회의 맨 마지막과 같아질 것이며, 늙음, 병, 죽음을

떠나며 부서지지 않으며 항상 머무르며 변화가 없으며 가히 생각 할 수 없는 공덕을 갖춘 여래의

법신을 얻을 것입니다.

 

목숨을 버릴 수 있다면 생사, 윤회의 맨 마지막과 같아질 것이며 모든 중생과 함께 하지 않으며

다함이 없으며, 줄어들지 않으며, 마침내 항상 머무르며 가히 생각할 수 없는 공덕을 얻어서

모든 깊고 깊은 부처님 법을 통달하게 될 것입니다.

 

재물을 버릴 수 있다면 생사, 윤회의 맨 마지막과 같아질 것이며 모든 중생과 함께 하지 않으며

다함이 없으며, 줄어들지 않으며, 마침내 항상 머무르며 가히 생각할 수 없이 구족(具足)한

공덕을 얻으며 모든 중생의 뛰어난 공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세 가지를 버리는 선남자 선여인은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드려서 언제나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예언을 받게 되며 모든 중생으로부터 우러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승만경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드리는 일는 사람은 올바른 일을 받아드리는 일과 다르지 않으며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드리는 일은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드리는 일을 받아드리는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드리는 일이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이렇게 복잡하게 말하고 또한

세 가지를 버려야 해야 하는지 현대를 사는 우리로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목숨을 버려야 하고, 몸을 버려야 하고, 재물을 버려야 하고,

인간에게 있어 소중하고 재미있다고 생각이 되는 것은 다 버리는 마음으로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드려야 한다는 말인데. 지금 우리의 생각으로는 ‘올바른 가르침은 이런저런 것이고, 정신

차려서 잘 외우고 간직하면 되는 것 아닌가?’이런 정도로 인지되는데 과연 여기서 말하는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드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기에 이렇게 복잡하고 거창하며,

비장하게 말하는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상태면 이 말이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드리는 일는 사람은 올바른 일을 받아드리는 일과 다르지 않으며’

간단히 말하면 올바른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앉아서 고민하지 말고, 즉 부처님 앞에 앉아서 법문만 듣고서 깨달으려 하지 말고 일어나

움직여 현실에 주하며 그 과정 속에서 깨어있으란 말입니다.

그 일을 직접 행하고 그것을 관(觀)하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금방 이런 질문을 합니다. “스님 먼저 알아야 실천을 하죠?”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여러분은 몰라서 실천을 안 하셨습니까?

 

인간은 보는 순간 대부분 압니다. 아니 오히려 육체는 머리가 인지하기 전에 그것이

자신에게 좋은 것인지 아닌지를 먼저 압니다. 이런 사실은 과학적 실험을 통해 이미

검증됐으며, 우리도 흔히 현실 생활에서 많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위와 같은 질문을 하는가?

결론적으로 심하게 말하자면 실천하지 않고 앉아서 어떻게 한번 해 보겠다는 얘깁니다.

(이런 현상의 극치-인터넷) 즉 알음아리, 상(相)으로, 관념적으로, 논리적으로 해결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작용이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이며 우리를 어리석게

만드는 가장 큰 습관입니다. 이런 체계를 가지고 경을 읽고 도를 닦는 것은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또는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려는 용기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물론 과거에도 이런 용감한 사람이 무척 많았나 봅니다.

자료를 근거로 하면 최소한 팔만 사천 명은 됐을 것입니다.

 

이 무지한 용감함에서 벗어나는 일이 얼마나 힘들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일에 비유

하겠습니까? 나머지 몸뚱이 재물은 생각지 않더라도. 옛 말에 도를 깨우치기는‘세수하면서

코 만지기보다도 쉽다고’했습니다.

세상에 정상인 이라면 오히려 코 만지지 않고 세수하기가 더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쉬운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자신의 목숨을 버려야 하는 것만큼 현실에

깨어있고 실천하기가 어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드리는 일이‘올바른 가르침’이란 특정한 이미지(상, 생각)를 갖고

접근하는 이는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드리는 일이 무척 쉬운 것이라고 아애 흘려보낼 것이고

'올바른 가르침'을 상(相)으로 받아드리지 않는 이는 지금 행을 하려 할 것이고, 실천함에

여념이 없을 것입니다.

 

 

 

첨부파일 lake.m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