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지혜/참 지혜

한송이 눈과 같다/용아거둔 선사

산울림(능인원) 2011. 9. 8. 14:01

 

 

직지심경 209 /용아거둔 선사 1/한 송이 눈과 같다


居遯禪師自嶺南來어늘 巖頭問曰嶺南一尊 功德還成就也未遁曰成就久矣只欠點眼在니다 頭曰要點眼麽遁曰要니다 垂下一足커늘 禮拜한대 頭云 汝見箇甚麽道理遁曰據我所見인대 如紅爐上一點殘雪이니다 頭曰師子兒善能哮吼로다 師頌云 此生不息息何時息在今生共要知心息只緣無妄想이니 妄除心息是休時로다


거둔 선사가 영남으로부터 왔는데 암두 선사가 물었다.

“영남의 한 어른은 공덕을 성취하였는가?”

거둔 선사가 대답하였다.

“성취한 것은 오래이나 다만 점안하지를 못했습니다.”

“점안하고자 하는가?”

“점안하고자 합니다.”

암두 선사가 발 한쪽을 드리우거늘 거둔 선사가 예배하였다. 암두 선사가 말하였다.

“그대는 무슨 도리를 보았는가?”

거둔 선사가 말하였다.

“저의 소견을 말하자면 마치 붉은 화로위에 한 송이 눈과 같습니다.”

암두 선사가 말하였다.

“사자의 새끼가 크게 부르짖을 줄 아는 구나.”라고 하였다.

거둔 선사가 게송을 읊었다.

“금생에 쉬지 않고 어느 때에 쉬리오. 쉰 것을 금생에 함께 알고자 하네. 마음을 쉰 것은 다만 망상이 없는 것이니 망상이 제거되고 마음을 쉰 것이 이것이 쉰 시절이로다.”


해설 ; 거둔(835-923) 선사와 암두 선사의 문답은 깨달음을 얻은 뒤 인가를 받는 내용이다. 암두 선사가 거둔 선에게 “그대는 깨달음을 얻었는가?”라고 물으니 “깨달음은 얻었으나 인가를 받지 못했습니다.”라는 뜻이다. 이 문답은 마치 6조 혜능 선사가 5조 홍인 선사의 회상에서 깨달음을 얻고 난 뒤에 방아를 찧고 있는데 5조 선사가 방아를 찧는 일에 빗대어 “쌀을 다 찧었는가[米熟也未]?”라고 물으니 혜능 선사가 말하기를 “쌀은 다 찧은 지는 오래이나 키질하는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米熟久矣猶欠篩在].”라고 말하여 “깨달음은 얻었으나 인가를 받지 못했습니다.”라고 표현한 것과 매우 흡사하다.

세상의 어떤 분야든지 공부를 하고 수련을 하여 어떤 경지에 이르렀으면 가르쳐준 스승으로부터 “하산을 해도 좋다.”는 인가를 받아야 한다. 하물며 출세간의 공부이겠는가. 거둔 선사는 자신의 공부를 “저의 소견을 말하자면 마치 붉은 화로위에 한 송이 눈과 같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즉 자신도 텅 비어 공[我空]하였고 바깥 경계도 모두 텅 비어 공[法空]하여 없어졌다는 뜻이다. 또한 게송으로서 거듭 “금생에 쉬지 않고 어느 때에 쉬리오. 쉰 것을 금생에 함께 알고자 하네. 마음을 쉰 것은 다만 망상이 없는 것이니 망상이 제거되고 마음을 쉰 것이 이것이 쉰 시절이로다.”라고 하였다.

전통적인 선정의 수행은 어느 경지에 이르렀으나 요익유정(饒益有情)하는 자비의 실천은 보이지 않는다. 불교의 궁극은 깨달음이 아니라 그 깨달음을 중생을 위해 회향하는데 있다. 대승불교에서 소승불교를 불법 안에 의지해 사는 외도라고 비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대 선사들의 행적을 보면 어떤 분들은 중생들의 안목을 열어주기 위한 지극한 자비심으로 일생을 헌신하면서 살아간 분들도 있으나 그 외의 많은 분들은 자신만의 안녕을 위하여 그림과 같고 신선같이 살면서 아무런 회향도 없이 일생을 보내버린 이들이 적지 않다. 일생을 통하여 피나는 공을 쌓아서 자기 한 사람만 제도하고 떠난다는 것은 옛 사람들의 지적대로 외도라고 비방을 받아 마땅하리라. 그동안 시주에게 진 빚은 어떻게 갚고 세상에 진 빚은 어떻게 갚을 것인가.  


 


 


                           대한불교진흥원 무비스님 


                     

 

一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