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靈鷲山兮여 (영축산혜 : 영축산이여)
山隱隱水潺潺하고(산은은수잔잔 : 산은 은은하고 물은 잔잔히 흘러가는데)
風飄飄水冷冷한데(풍표표수냉냉 : 바람은 산들산들 불고 물은 냉랭하네))
雨過靑山雨散太虛하니(우과청산우산태노 : 비는 푸른 산을 지나 큰 허공에 개니)
頭頭毘盧物物華藏이로다(온갖 것이 비로자나요 모든 것이 화장세계로다)
이곳을 찾은 여러분은 부처님의 정법인장(正法眼藏)을 듣기 위해 모인 것이다.
늘 하는 말이지만 흘러가는 시내 물가에서 물소리를 많이 듣고 자란 대(竹) 나무를(竹) 베어서 통소나 젓대를 만들면 그 소리가 여느 대밭의 대보다 배가 크게 나고 곱다. 그리고 오동나무도 보통 산중에서 자란 것보다 물가에서 물소리를 듣고 자란 것을 베서 거문고나 가야금을 만들면 소리가 배나 크고 곱다.
사람도 많이 보고 들으면 견문에 훈습되는 것이 있다. 참된 이치는 말이 없는 것이다. 이 말없는 진리를 입으로 여러분들에게 말해 주는데 이것을 모르더라도 그중에는 조금 알 수 없는 것도 있고 무슨 말인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말이라도 귀에만 지나가면 누구에게나 있는 여래장(如來藏)으로 통하게 되는데 이 여래장을 통해서 지나가면 언제든지 나오게 된다.
반야심경에 이런 구절이 있는데
無眼界乃至 無意識界 (무안계내지 무의식계)
안계(眼界)도 없고 의식계(意識界)도 없다.
육근(六根)으로 안(因)해서 육식(六識)과 육진(六塵)이 나온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인 육근과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인 육식 그리고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인 육진(六塵)을 합하면 모두 십팔계(十八界)가 된다.
이 십팔계가 모든 불별을 유출해 내는데 각각 분별을 지어 내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계(界)라 한다. 눈은 볼 수 있지만 듣거나 혹은 냄새를 맡거나는 하지 못하는 이치와 같다. 사람은 무량겁(無量劫)을 쫓아서 망령된 꾀를 내어 선악 간의 업을 짓는다. 빛과 소리를 따르고 쫓아서 깨닫거나 알지 못하고 생각을 따라서 유전(流轉) 한다.
젖는 것은 물의 성리(性理)이고 뜨거운 것은 불의 성리이며 짠 것은 소금의 성리이듯이 중생의 성리가 원래로 부처와 다름없이 깨달아 아는 것이건만 중생이 어두워서 믿지 않을 따름이다. 모든 생각을 없앨 줄을 모르고 모든 분별에 사로잡혀서 항상 괴로움을 면치 못하고 그것을 확 벗어 버릴 줄 모른다.
무무명(無無明) 무명(無明)이 없는데 밝지 못한 이 한 생각이 십이인연(十二因緣)을 지어 내어 모든 죄악과 그릇된 것을 하게 된다. 십팔계가 사람들의 본래 성품을 가리고 있어 본래 광명을 보지 못하게 하기에 무명이라 한다.
이 본래 마음을 깨달아서 근진(根塵)이 본래 공한 줄을 알면 아무런 장애 될 것이 없기에 무명은 없는 것이다.
亦無無明盡(역무무명진) 또한 무명이 다했다는 것도 없다. 이것은 손을 모래밭에 눌렀다가 빼면 손자국만 생기는데 이 자국마저 없애 버리는 말이다.
乃至無老死(내지무노사) 내지 늙고 주는 것도 없다.
철저하게 근본적으로 생각 없는 그 자리에 들어가기는 어렵더라도 우리 불자들은 실하게 수행해서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생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천 번 만 번 죽더라도 그 마음자리는 본래 불생불멸(不生不滅)해서 생로병사가 없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십이인연을 다만 한 가지 인연만을 들어 말하는데 모든 그 인연이 전부 무명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늙고 죽는 것이 설사 있는 것이라 해도 무명이 본래 없는 것이라서 늙고 죽는 것이 없는 것이다.
이 몸을 끌고 다니는 소소령령(昭昭靈靈)한 것이 불생불멸인지 그 자리가 없어지는 것인지 안 없어지는 것인지 이것도 모르고 불교를 믿는 이들이 많다. 이 몸을 가지고 백 년도 못 살지만 이 자라는 마음대로 자유스럽기 때문에 부처님은 생각에 자유자재하고 무량겁으로 이 몸을 가질 수도 있지만 세상을 따라 열반에 드는 것이다. 경전에 보면 몇 천년 몇 만년 사는 부처님이 많다.
無老死塵(무노사진) 늙고 죽는 것이 다했다는 것도 없다.
진(盡)이란 멸(滅)인데 십이인연이 만약 생기는 것이라면 늙고 죽는 것도 다함이 있다고 하겠지만 근본적으로 나는 것이 없고 인연이 본래 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늙고 죽는 것이 없다.
부처님이 육근인 눈·귀·코·혀·몸·뜻의 여섯 가지 공덕을 말씀하셨는데 눈은 팔백공덕이다. 온갖 것을 보지만 종이 한 장 만 가려도 멀리 보지 못하므로 천이백 공덕 중에서 사백 공덕이 부족하다. 귀는 천이백 공덕인데 눈은 종이가 가려 있으면 못 보지만 귀는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코는 숨을 들이쉴 때는 온갖 냄새를 알지만 내쉴 때는 중간이 단절되기 때문에 팔백 공덕이다. 혀는 눈을 감고 있어도 온갖 음식을 분별할 수 있고 입으로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천이백 공덕을 갖추었다.
몸은 팔백 공덕인데 부드럽고 깔깔한 것을 대 봐야 알지 종이 한 장이라도 가려져 있으면 모르기 때문이다. 뜻은 천이백 공덕인데 온갖 것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리적인데 누가 분석해서 이것을 과학적으로 설명을 할 수가 있겠는가.
십이인연에서 무명이 모든 과거 번뇌를 일으키는 지위를 가지고 있다.
무명(無明)으로부터 행(行 )이 생긴다. 과거 선악의 업을 모두 이 행이 짓는데 일념초동(一念初動)이라 한 생각이 처음 움직인 것이 행의 뜻이다.
분별하는 식(識)은 어머니 태중에 의해서 현재 생활하기까지 그 최초의 심식(心識)이다.
명색(名色)이란 사람이 태중에 들어 있으면 태중오위(胎中五位)가 있는데, 이 오위의 심식(心識)을 가지고 명색이라 한다.
대중오위는 그 식이 태에 들어간 뒤 초이레가 지나면 이름을 범어로 갈라람(羯羅藍)이라 하고 혹은 갈랄람(羯剌藍), 가라라(歌邏羅)라고도 쓰고 응활(凝滑 )이라 번역한다. 부정모혈(父精母血)이 응결되지만 아무 형태도 없다.
이칠일만 지나면 그 이름을 범어로 안부담(頞部曇)이라고 하며 거품과 같이 아주 엷은 피부가 생긴다. 삼칠일이 지나면 이름을 폐호(閉戶)라고 하는데 피가 살덩어리 모양으로 점차 응결하여 굳어진다.
사칠일이 지나면 이름이 건남(健南)이라 하는데 살이 보드라운 것이 점차 액체상에 고체상으로 변한다. 오칠일이 지나면 즉 삼칠일부터 삼십사주일간에는 이름이 발라사카(鉢羅奢佉)라고 하는데 그때 지절(佉節)이 생기고 두 손과 두 발 피부와 골격이 생겨 서서히 발육한다.
이와 같이 태중오위가 생긴다.
십이인연의 육입(六入)은 모태 중에서 육근이 완성되는 신심(身心)을 말한다.
촉(觸)은 출태(出胎)해서 삼세에서 사세 동안 제근(제근)이 발달되지 않아서 단순한 지각심(知覺心)만 있는 것을 말한다.
수(受)는 오 세에서 십오 세까지 의식(衣食)과 장난감만 찾고 다른 생각이 없는 때를 말한다.
애(愛)는 십오 세 이후 욕심과 사랑을 일으켜서 재물과 색에 탐착 하는 것을 말한다. 나이가 장대해서는 재색식명수(財色食名睡)의 오욕의 경지를 탐착 한다..
취(取)는 오욕락을 탐착 하는 마음이 증장(增長)하면 무엇이든 취하려고 하는 생각이 생기는 이것을 말한다.
마음 가운데 모든 업이 일어나는 것이고 그것을 유루(有漏) 즉 샘이 있는 이 업이 들어서 미래의 선악과(善惡果)를 초래한다. 그것을 취해 들이면 유(有)가 생기는데 지은 업을 쫓아서 그 결과를 얻는다. 자기가 지은 선과 악을 연속하여 미래의 업을 일으켜서 자꾸만 그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
열한째는 생(生)인데 사람이 그 미래의 결과를 일으키는데 업을 쫓아서 오온(五蘊)을 일으켜서 세상에 태어난다. 온(蘊)이 익어지면 늙는데 사람의 몸도 오래되면 쇠약해져서 늙어 죽는 것이다.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오온이 무너지면 사람은 죽는다.
무제무한(無際無限)이라 짬도 없고 한도 없이 삼계(三界)에 생멸(生滅)하며 출몰유정(出沒有情)이라 일체 준동함령(蠢動含靈)이 자기 업대로 생멸하는 것이 삼계의 혼미한 중생의 모습인 것이다.
부처님은 중생을 위해서 십이 인연법이 이렇게 된다고 하였다. 화엄경(華嚴經) 팔십 권 중 궐자권(闕字卷)에는 십이인연을 설한 것으로 책이 한 권이나 되며 원각경(圓覺經)과 아함경(阿含經)에도 이 십이인연을 말하였는데 사람의 태어나는 근본이 여기에 있는 까닭이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에든 태어난다. 이 태어나는 식(識)을 제팔식(第八識) 혹은 아뢰야식(阿賴耶識)·합식(合識)·화장식(化藏識)·훈식(熏識)·훈변식(熏變識)·출생식(出生識)·금강지식(金剛智識)·적멸식(寂滅識)·체식(體識)·본각식(本覺識) 죽고 사는 가운데 있다고 하여 중유식(中有識)이라고도 한다.
십이인연과 식에 대해서 말하였듯이 이렇게 허망한 것이 인생이다. 이 허망한 가운데 허망하지 않은 것이 있다. 이것을 좀 알아보아야 한다.
사람은 선행을 많이 하여 복을 많이 지어야 한다. 부잣집에 태어나면 공부도 잘할 수 있으나 박복한 이는 의식주가 넉넉지 못한 집에 태어나서 공부도 못하고 인간대사를 치르려면 비가 오는 등 애를 먹는다.
복을 지어 놓으면 자기가 받는다. 은행에 예금하여 놓으면 예금한 이가 찾지 다른 사람이 찾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부처님도 복과 지혜를 함께 닦아서 복혜(福慧)가 구족 하듯이 사람은 복만 지을 것이 아니라 지혜도 닦아야 한다.
당태종(唐太宗)이 사람으로서는 최상의 지위인 만승천자(萬乘天子)가 되었건만 땅이 넓고 백성이 많을 뿐 아니라 오랑캐가 사방에서 침입하면 진압하여야 하는 등 날마다 마음이 편치 못했다. 이러니 내가 복을 받아서 천자는 되었지만 자기 팔자가 걱정이 많아서 죽을 지경이다.
중국에는 음양꾼이 많은데 자기와 같은 사주(四柱)를 가진 자를 천하에 조사를 해보니 두 사람이 나와서 둘 다 불러 사는 형편을 물었다.
한 사람은 잠만 자면 꿈에 천자 행세를 하는데 천하 재물이 제 것이요 만조백관(滿朝百官)과 삼천궁녀를 거느리지만 잠만 깨면 먹는 것도 어려워 근근이 지낸다고 한다. 땅 위에 천자가 둘이 되어서는 안 되니 하나는 꿈속에서 천자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한 사람에게 형편을 물으니 신(臣)은 아들이 여덟 명인데 모두 만석꾼이 되어서 팔만석꾼이라 정월 초하루부터 이레씩 아들 여덟이 번갈아 가며 좋은 비단옷과 진수성찬으로 지성스러운 대접을 받는 단다. 그래서 이 사람이 천자인 나보다 복이 더 나으니 걱정을 좀 주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자는 야광주(夜光珠) 구슬 두 개를 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하는 말이 “우리가 동갑이고 그러니 봄에 꽃도 피고 좋은 시절에 내가 부르면 와서 화전도 하며 하루 잘 놀아 보세. 그때는 가져갔던 야광주를 다시 가져오너라.”라고 하였다.
부자 동갑의 집은 황하수 건너에 있었다. 천자는 신하를 보통 옷으로 갈아입히고 부자가 돌아가는 배를 같이 타게 하였다. 그리고는 나라에서 하사(下賜)한 야광주를 사정사정해서 본 뒤 물속에 풍덩 빠뜨려 버렸다. 부자는 그 사람을 죽일 수도 없고 큰일 났다 하고 이젠 내가 죽게 되는구나 하며 태산 같은 걱정을 하며 있는데 사흘이 지난 어느 날 황하수 강변에 사는 소작인이 잘 보이려고 큰 잉어를 사가지고 그 집에 왔다. 그 잉어의 뱃속을 갈라 보니 그 속에 야광주가 들어 있지 않는가. 그래서 사흘 만에 걱정이 없어져 버렸다.
복을 워낙 많이 지어 놓으니 잉어란 놈도 구슬을 먹는 것인 줄 알고 삼켜 두었다가 잡혀서 그 집으로 갔다. 자기가 지은 복은 외상이 없으니 오른손으로 주고 왼손으로 받는 법이다.
그 이듬해가 되자 그런 일이 있는 줄 모르는 천자는 구슬을 잃어버린 황하수 건너 사는 부자가 근심걱정으로 피골이 상접되어 올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상상외로 그 부자는 얼굴이 좋아져서 동갑내기 다른 사람과 함께 오는 것이 아닌가.
천자 앞에 나타나서 구술들을 내어 놓으니 어찌 된 영문인가. 그때 신하를 불러 구슬을 물에 집어넣으라고 한 명령을 거역한 것이 아니냐고 호령을 하였다. 신하는 분명히 물에 넣었다고 대답하여 그 부자에게 물어보라고 한다.
천자가 부자에게 내가 들으니 그 구슬을 잃어버렸다고 하는데 어찌 되어 거짓말이 되었느냐고 물었다.
그 부자가 구슬을 도로 찾게 된 내력을 말하니 천자는 아이고 복을 지은 자는 어떻게 해볼 수 없다. 네가 천자보다 복을 더 받기에 걱정을 좀 주려고 일부러 그렇게 시켰더니 이 구슬이 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걱정을 면케 해 주었구나 하고는 두 동갑내기에게 호(號)를 하나씩 주겠는데 “나는 낮으로 천자 노릇을 하고 가난뱅이 너는 밤으로 꿈속에서 천자 노릇을 하니 너는 몽천자(夢天子)이고 황하수 건너 사는 부자는 근심이 없으니 무수왕(無愁王)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니 지혜와 복을 닦으면 자기가 받지 다른 데로 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다가 난관이 있거든 걱정만 하지 말고 참선하는 그 마음, 비유하자면 잡철 없는 순금의 마음으로 십세 이전의 어린 동자 때로 돌아가라 요즈음 학자들이 본원(本源)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하는 것은 남을 해치거나 도둑질할 마음이 없는 나쁜 생각 없는 그 동심(童心)의 세계를 말한다.
이 깨끗한 마음에 돌아가 생각하면 그 어떤 어려운 난관이라도 해결이 된다. 불교를 바로 믿어서 일상생활에 이렇게 실천적으로 생활해야 한다.
중생이 십이인연에 걸려서 해탈을 못하여 매일 물질 아니면 사람들에게 끄달리고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하다가 그러다가 죽으면 내다가 버리기 바쁜 이 허망한 인생의 몸을 가지고 그 허망한 가운데 불생불멸하는 허망하지 않는 도리를 알아서 수행을 하고 증득(證得)을 해서 멋지게 살라는 것이다.
이 우주 가운데 산에는 나무와 약초, 물이 있고 바다에는 고기와 풀이 있어 인간이 수용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 사바세계를 무대로 삼아 우리가 멋들어지게 연극 한 바탕 잘해야 한다.
생로병사가 본래 없는데 근심걱정이 있을 리 없다. 본래 공한이 자리인 것이다. 이 몸을 과학적으로 이론적으로 아무리 따져 봐야 부모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닌데 애주중지해 본들 아무 소용이 없고 이 몸을 끌고 다니는 운전수를 알면 걱정을 하려 해도 걱정이 없다. 마음 가운데 걱정 없이 사는 것은 불교를 신앙하는 이들의 긍지인 것이다. 해탈이란 결박을 벗어나는 것이다.
예전에 관수라는 이는 다른 사람을 시켜서 손발을 묶은 사람을 궤짝에 집어넣고 또 궤짝을 밧줄로 묶어 놓게 하고서는 손가락을 쳐들면서 소리를 지르면 궤짝과 손발의 밧줄이 풀리면서 사람이 쑥 나온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아이들이 고양이를 키우는데 어미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에게 젓도 주고 밤잠을 안 자며 말랑말랑한 새끼쥐를 잡아다 먹인다. 아이들은 새끼 고양이들이 커서 밥을 먹을 때쯤 되어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어미 고양이는 새끼를 찾아서 자꾸 울고 있는데 새끼 고양이를 다 나누어 주고 한 마리만 남았다.
고양이끼리 서로 말이 통하는지 조그만 새끼를 깊숙한 곳에 숨겨 놀고는 낯선 사람만 어른거리면 새끼와 함께 피하고 달아나곤 하였다. 그러다가 꼬마 고양이가 커서 혼자 다닐 때쯤 되니까 어미 고양이 옆에 가기만 하면 쫓아 버린다. 짐승도 이렇게 애정을 뿌리친다.
마산에 사는 하 처사란 이가 아들 넷을 두고 일본 대학을 모두 졸업시켰는데 없는 돈에 다음 달 하숙비를 그 전달 이십오일에 찾도록 해주는 등 지극정성으로 뒷바라지를 했으나 아무도 부모를 모시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이 병이 되어 드러눕게 되었는데 마침 제비가 처마밑에 집을 짓고 새끼를 치고 있었다. 어미가 먹을 것을 물어다가 새끼를 키웠으나 날개로 날을 만하니 어미가 다 내보낸다. 짐승도 저런데 사람이 저만 못해서야 되겠느냐 해서 가슴이 응어리 지었던 것이 활활 풀어져 버리니 그만 병이 낫는다.
마음 가운데 망상이 없으면 아무 병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자식에 대한 애정도 지나치게 두지 말아야 할 일이다. 사람과 물질에 초월한 정신으로 살면 모든 일에 능률이 오르니 쾌활하고 명랑하고 낙관적인 기분으로 살아야 한다. 이렇게 되면 도랑치고 가재 잡는 것과 마찬가지로 매사가 쉬운 일이다.
欲識解脫道(욕식해탈도 : 해탈의 도를 알고자 하는가)
鷄鳴天巳曉(계명천사효 : 닭이 우니 날이 벌써 새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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