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리(眞理)라는 것은 원래 말이 없고 무엇이다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대각(大覺)을 이루신 뒤 사십구 년을 설법을 했지마는 중생을 위해서 부득이 그 진리를 설하셨는데, 그 진리(眞理) 자리는 말로 못하고 글로써 써낼 수가 없는 것이다. 설법할 것이 없는 것이 이 이름이 설법인 것이다. 반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이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다. 다만 이 자리는 언어문자(言語文字)가 전부 떨어졌는데 부득이해서 여러 사람을 위하여 말과 문자로 하는 것이고 눈으로 마주 보는데 도가 있는 것이다.
아는 사람은 그래야 알지 이 진리를 말이나 글을 가지고 알려고 하면 백 년을 말을 하고 백 년을 글을 써 내도 말은 말이고 글은 글이지 이 자리를 그려내지 못하고 써내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항상 말하지만 이 사바세계를 무대로 연극 한바탕 잘하고 멋지게 살다가 가야 한다고 하니까 마치 춤이나 추고 노래나 부르고 술이나 먹고 뛰노는 것이 멋지게 살라고 하는 줄 아는데 그것이 멋지게 사는 것이 아니라 물질과 사람에 초월한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이 사바세계를 무대로 연극 한바탕 잘하는 사람인 것이다.
사람이 무엇을 하나 성공 하려고 하면 은산철벽(銀山鐵壁)과 같은 굳센 생각으로써 원력(願力)을 세워서 앞으로 전진해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걱정이 있어도 술 한잔 먹고 잠이 안 와도 술 한잔 먹고 술만 자꾸 먹다가 나중에는 술에 중독되어 버리면 그만 페인이 되어서 아무것도 못하고 죽게 되는 것이다.
여덟 가지 복전이 있다.
첫째는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에 신앙을 가지고 공경해야 된다. 불(佛)은 불가설불가설(不可說不可說) 미진수(微塵數)의 부처님이 있다고 해도 이 사바세계는 석가여래 부처님이 교주(敎主)이니까 석가여래 부처님이 불(佛)이고, 법(法)은 부처님의 팔만장경(八萬藏經)이 법이며, 승(僧)은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가 승(僧)인데 이 불법승 삼보를 공경할 줄 알아야 복을 받는다.
둘째는 효양부모(孝養父母)이니 자식 된 사람은 부모에게 효도를 해야 복을 받는다. 우리가 법(法)을 먼 데서 구하지 말고 내 부모가 곧 부처님이라고 생각하고 부모에게 효성을 다져야 복이 온다. 그런데 요즘 보면 부모 된 사람은 자기 자식이 감기라도 들면 신약 구약을 가리지 않고 온갖 약을 먹여서 병을 낫게 하려고 하는데 자식은 부모가 감기가 들어서 콜록콜록하고 뒷방에 가서 아파서 누워 있어도 나이 많은 사람에게 으레 있는 천식이나 노병(老病=老患)이라 하면서 약 한 첩 쓰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는 복을 받지 못한다.
셋째는 급사병인(給事病人)이니 어떠한 사람이든지 병든 사람이 있거든 내 힘 있는 데까지 구완을 해 주면 복을 받게 된다. 복이라는 것은 내가 노력하고 행하고 닦고 증득(證得)해서 복을 짓는 것이지 복이 저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복 파는 사람이 그냥 복을 한 덩어리 집어서 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 부처님은 내 몸을 위해서 이 세상에 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났다고 했다. 그러니 남을 위해서 수고스러운 일을 많이 하고 남을 도와서 좋은 일을 많이 해 주면 그것이 복을 짓는 일이다.
넷째는 구제빈궁(救濟貧窮)이니 가난하고 궁한 사람을 구제해 주면 복을 받는다. 가난하고 궁해서 복을 못 짓는 사람에게 내 힘 있는 데까지 그 사람을 도우면 그것이 복 짓는 것이다.
다섯째는 광로의정(曠路義井)이니 평원광야에 물이 없는데 우물을 파 가지고 오는 사람 가는 사람에게 다 먹도록 해 주면 복이 된다. 자기가 사는 동내에 물이 없거든 돈을 내어 가지고 우물을 파서 온 동네 사람이 다 먹도록 해주면 그것이 곧 복을 짓는 것이다.
여섯째 건조교량(建造橋梁)이니 많은 사람들이 개울에 다리가 없어서 바지를 걷고 건너 다니는 데에는 어디든지 다리를 놓아서 바지 걷지 않고 건너가도록 해주는 것이 복을 짓는 것이다.
일곱째는 치평험로(治平險路)이니 험한 길에 길을 만들어서 다른 사람이 다 잘 다니도록 해주는 것이 복이 되는 것이다.
여덟째는 무차법회(無遮法會)니 법회를 열어서 어떤 사람이 오든지 법문을 듣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 복을 짓는 것이다.
우리가 부모태중에서 이 세상에 나올 때 걱정하고 머리 아프고 가슴 아파가면서 살라고 나온 것이 아니라 모든 삼라만상을 사람이 다 수용(受用) 하도록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멋지게 살도록 되어 있다.
사업하는 사람이 돈이 있다 없다 하지마는 돈은 은행에 꽉 쌓여 있고 쌀은 시장에 있고 모든 물건이 점방마다 가득히 쌓여 가지고 있는데 사람이 자기가 못나서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비록 돈이 없더라도 그 돈에 얽매여 가지고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아파서는 안된다.
우리 사람이나 나는 짐승이나 기는 짐승이나 모든 동물이 자기 업(業)대로 살게 되어 있는데 사람은 집을 짓지마는 짐승이 어디 집을 짓는가. 집을 짓더라도 겨울이 되면 얼어 죽지 않게 준비하고 있다. 개구리와 뱀은 겨울을 지낼 준비하지 않아도 땅 밑에 들어가 호흡만으로 한 겨울을 살고 나온다. 그러니 사람도 자기 업대로 살게 되어 있는데 자기가 잘못해서 곤란을 당하고 걱정을 하지만 한 생각 돌이키면 그만 근심 걱정이 없어지는 것이다. 신선(神仙)의 약은 콩알만큼 먹어도 일체의 모든 병이 다 떨어져서 오래 살게 되는데 법문(法門)도 많이 하는 것이 법문이 아니라 다만 한 구절이라도 진리법문을 들으면 그만 업장이 얼음 녹듯 녹는 것이다.
고덕(古德)에게 누가 묻기를
“어떤 것이 부처님의 경계(境界)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있지 아니한 것도 취하지도 아니하고 없지 아니한 것도 취하지 아니한다. 이와 같이 아는 자는 이 이름을 부처님의 경계라고 한다. 그러니 만약 사람의 마음이 목석(木石)과 같아서 유지(有智)로서 아는 것을 취하지도 아니하고 무지(無智)로서 불심(佛心)을 알려고 하지 아니한다. 또 가히 유심으로서 법신(法身)을 알려고 하지 아니하고 또 가히 상(相)을 가지고 모든 소해(所解)를 알려고 하는 것이 다 망상 분별이다.
너의 종종해(種種解)가 가히 자심(自心)의 계교(計較) 요 자심의 망상이다. 제불지혜(諸佛智慧)는 가히 설(設)해서 사람에게 보일 수도 없고 또한 감추고 숨길 수도 없고 선정(禪定)으로서 측량할 수도 없다. 알음알이가 끊어지고 아는 것도 끊어진 것이 부처님의 경계다. 또한 가히 측량할 수도 없는 것이 이 이름이 불심(佛心)이다. 만약 능히 불심을 이와 같이 믿는 자는 또한 곧 무량항하사(無量恒河沙) 번뇌가 없어질 것이요. 만약 능히 심념(心念)을 두어 불혜(佛慧)를 생각하는 자는 도심(道心)이 날마다 장하게 커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니 참선하는 사람은 화두(話頭)를 따져가며 알려고 하면 안 된다. 과학은 따져서 알려고 해야 되지만 참선하는 이 법은 따지면 염념(念念) 히 멀어지기 때문에 따지는 것이 아니다.
物物逢時各得香(물물봉시각득향 : 물건이 때를 만나니 각기 향기를 얻어)
和風到處盡春陽(화풍도처진춘양 : 화창한 바람이 이르는 곳에 모두 봄빛일세)
人生苦樂從心起(인생고락주심기 : 인생의 고통과 즐거움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데)
正眼照來萬事康(정안조래만사강 : 바른 눈으로 비춰오니 만사가 편안해지네)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의 대의(大義)가 약인욕료지(若人欲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니 만약 누가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알고자 할 때에는 응당 법계의 성리로 관찰하라. 일체가 오직 마음의 지음이다.
그러니 마음 하나 잘 쓰도록 해야 되는데 마음 잘 쓰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내가 늘 얘기하지마는 사람이 얼굴마다 바를 정(正) 자를 써붙였는데 마음은 비뚤어지게 쓰고 있다.
오늘 얘기할 것은 시익권수(示益勸修)이니 착한 것을 힘들여 잘 닦도록 권하는 말인데 온전한 마음으로써 삼매(三昧)를 닦는 자는 현세에 항상 열 가지 이익을 얻는다. 삼매라고 하는 것은 정(定)이라고도 하고 정수(定受)라고도 하는데 정이라고 하는 것은 가만히 있어서 모든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항상 삼매를 닦고 내 마음에 하찮은 생각이 전혀 없으면 정(定)에 들어간다.
보검을 만드는 데에는 쇠를 불에 넣어서 벌겋게 달구어 두드리면 하찮은 쇠는 쇠똥이 되어서 튕겨 나오는데 천 번 만 번 두드려서 쇠똥이 다 빠지고 쇠의 정수(精粹)만 남는 것이 보검이다. 또 땅속에서 금을 파면 금속에 은도 있고 동도 있고 철도 있고 연(鉛)도 있는데 이 잡철을 전부 빼내고 이십사 금이 되어야 세상에 통용되는 보배가 된다.
그러니 우리 불교를 믿는 불자들은 항상 그 마음이 하찮은 때가 없는 순금과 같고 또 공부하는 우리 수좌도 역시 마음이 순금과 같이 되어야 가치가 있는 법기(法器)가 된다. 그래서 현세에 항상 수행을 해서 삼매를 닦아 나가면 열 가지 이익을 얻는다.
첫째는 마땅히 시방제불보살의 호념(護念)하는 바가 된다. 항상 선정(禪定)을 닦고 수행을 하여 삼매 중에서 내 마음을 단련하면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호념을 입는다.
둘째는 모든 마구니와 악귀의 침노를 입지 않고 또 내가 악귀와 마구니의 공포증을 가지지 않는다. 자연히 마음을 맑게 쓰고 바르게 쓰고 깨끗하게 쓰는데 악마가 거기에 붙을 수가 없는 것이다.
셋째는 구십육 종의 외도와 귀신에게 미혹당하거나 요란함을 받지 않는다.
넷째는 정법을 비방해서 하찮은 업장을 받을 일이 있더라도 그 업장이 점점 가늘어지고 없어진다. 업장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지마는 내가 수행을 하면 나를 해롭게 할 업장이 가늘어지고 없어지는 것이다.
다섯째는 일체 의혹과 모든 악각(惡覺)의 관(觀)이 없어진다. 여우가 의심이 많아서 의심 많은 사람을 호의(狐疑)라고 하는데 여울가 시냇물에 얼음이 얼어서 건너가도 괜찮을 것이지마는 얼음 바닥에 귀를 갖다 대어보고 물소리가 얼음 밑에서 졸졸 나면 빠져 죽는다고 의심해서 건너가지 않는다. 그래서 이러한 일체의 하찮은 의심이 다 없어지고 모든 악하게 관하는 것을 없애주는데, 관(觀)이라고 하는 것은 심관(心觀)으로서 자기의 생각이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생각해 내는 것이라든지 보는 것이 바르지 못한 데 이런 것이 없어진다.
여섯째는 모든 여래의 경계가 나타난다. 여래의 경계, 부처님의 경계가 나타나려고 하면 자기가 수행을 해서 하찮은 마음이 뚝 떨어져야 여래의 경계가 나타나지 자기의 하찮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여래의 경계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공부하는 사람은 간단(間斷)이 생기지 않게 물 흘러가듯이 흘러가야 되고 또 좋은 일하는 사람도 좋은 생각만 가지고 있어야지 거기에 하찮은 생각을 넣어 놓으면 안 된다.
일곱 번째는 멀리 근심하고 뉘우치는 것을 다 여의고 생사고(生事苦) 중에라도 용맹스러워져서 겁냄이 없다. 우리가 나면 늙고 늙으면 병들고 병들면 죽는 생로병사(生老病死) 가운데 사는데 그것을 겁내지 말고 용맹전진 해야 된다. 부처님과 보살도 역시 우리의 같은 박지범부(薄地凡夫)인데 공부를 해서 부처님도 되고 보살도 되었는데 나도 하면 된다는 대용맹심을 내어야 된다.
피기장부아역이(彼基丈夫我亦而)라 저 사람도 장부요 나도 또한 장부라는 용맹한 마음을 가지고 앞으로 전진해야 된다. 무정한 군인이 물 불을 가리지 않고 앞으로 전진하듯이 그렇게 해야 도(道)를 성취하는 것이다,
아성환공여래합(娥性還共如來合) 합처비타비자기(合處非他自己)라 내 성품이 여래와 합해서 합한 곳에는 나도 아니고 타도 아니다. 일을 하는데 해 볼까 말까 하고 의심하지 말고 내 이 마음이 부처님의 마음에 합해지면 딱 결정을 해서 그대로 의심하지 말고 앞으로 밀고 전진해야 된다.
내 마음이 부처님과 같은 마음으로서 망상 없는 마음, 그른 마름이 없는 마음, 거기서 나온 내 마음이니 이것으로써 내가 앞으로 전진하면 시방 제불이 나를 옹호해 주고 호념(護念) 해 줄 것이다 하고 은산철벽(銀山鐵壁) 같이 믿어야 된다. 그렇지 않고 무엇을 하더라도 이것이 좋을 것인가 하찮은 것인가 의심을 해서는 안된다.
여덟째는 그 마음이 부드럽고 화하며 교만한 것을 버려서 다른 사람들을 수고롭게 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찌하던지 집안이 화해야 되고 화하는 가운데에서 모든 것이 다 된다. 찰떡이나 송편이나 떡을 쩌 가지고 따끈따끈 할 때 두드려야 화합이 되지 서늘하게 식으면 화합이 안된다. 그러니 사람의 마음은 부드럽고 화하고 착하고 순한 데서 일이 된다. 그러니 집안이 화해야 되지 화하지 않으면 그 집안이 망한다.
큰 나무를 여러 사람이 끌어 내는데 앞에서 선소리하는 사람이 “줄 대목에 한 장수(漢將帥)야 당겨 주소 영차” 이렇게 한 번 소라 치는데 그만 큰 나무가 왈칵 당겨진다. 여러 사람이 붙어서 이 사람은 이 사람대로 당기고 저 사람은 저 사람대로 당기면 아무리 해야 당겨지지 않고, 한꺼번에 힘을 모아서 당겨야 되듯이 집안에 식구가 다섯이든 열이든 일심이 되어가지고 전진해야 된다. 그래서 부드럽고 화하며 교만심을 버려야 된다.
내가 돈이 있다든지 권력이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해서 남을 업신여긴다든지 교만심이 있으면 안 된다. 나락도 익으면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백로가 지나도 나락이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그 나락은 알이 들지 않은 것이다. 사람도 재물이 있고 귀하게 될수록 하심(下心)을 해야지 아만심만 있으면 안 된다. 내가 아만심이 없어야 다른 사람이 나를 괴롭히지 않고 착한 사람이라 해서 나를 도와준다.
아홉째는 비록 선정(禪定)을 얻지 못하더라도 일체경계에서 모든 번뇌심(煩惱心)을 감하고 없애서 세간의 하찮은 일을 마음에 즐겁게 여기지 않는다. 남이 그른 짓을 해서 돈을 벌면 “아무개가 그릇된 일을 해서 돈을 버니 나도 착한 마음 가지고는 돈 못 번다”해서 공연히 거짓말하고 도둑질하고 하찮은 마음을 먹게 된다.
배를 타고 동으로 동으로 가기만 가면 떠난 장소에 도착하듯이 착한 마음을 먹다가도 하찮은 마음을 써 가지고 돈을 벌어 놓으면 그 돈이 나갈 때 사람 상(傷)하고 집안 망치고 나간다.
열 번째는 삼매(三昧)를 얻으면 밖으로 모든 인연(因緣)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일체 음성에 동(動)함이 없다. 내가 늘 얘기하지마는 길가 숲 속에서 꿩이 프드득 하면 깜짝 놀라는데 왜 놀래느냐 하면 죽은 마음, 흐트러진 마음을 가지고 오니까 놀래는 것이고 푸드덕할 때 저 것이 꿩이구나 그렇게 알아버리면 겁낼 것 없다.
예전에 순경이 권총과 칼을 가지고 촌에 가서 자는데 도둑놈이 그 순경을 죽이려고 문을 열고 문 앞에서 칼을 들고 있는데 이 순경은 권총이 곁에 있지마는 그것을 쥐면 저놈이 와서 먼저 찌를 것이기 때문에 곁에 권총을 두고도 사용을 못하는데 어떻게 방편을 썼느냐 하면 “네가 칼을 들고 혼자 들어와도 나를 죽일 것인데 혼자 오지 않고 왜 뒤에 사람을 데리고 왔느냐.” 이렇게 말을 하니 그 도둑놈이 자기는 사람을 데리고 오지도 않았는데 누가 왔는가 하고 뒤로 돌아볼 때 그만 권총으로 그놈을 쏘아 쓰러트리고 자기는 살았다. 이와 같이 급할 때 정신을 차려야 사중갱생(死中更生)이니 죽는 경우에 으르러서 다시 사는 수가 있다. 그러니까 어려울 때 정신이 통일되어야 한다
只箇一點無明焰(지개일점무명염 : 다만 이날 한 점 무명의 불이)
煉出人間大丈夫(연출인간대장부 : 인간의 대장부를 단련해 낸다네)
무명(無明) 불이라는 것이 흉악한 불인데 그 불이 하찮지마는 그 불이 들어서 대장부를 단련해 낸다. 우리 수좌(首座)들도 공부를 하면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하고 등줄기가 아프고 허리가 아프고 삼백육십 골 절이 아프지마는 아픈 거기서 출격대장부가 나오고 부처와 조사가 나온다.
무명불이 나쁜 것이지마는 하찮은 놈이 좋은 것을 내는 것이다.
'참지혜 > 경봉스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육조(六祖) 스님 말씀 (2) | 2026.01.23 |
|---|---|
| 수행인(修行人)의 자세 (2) | 2026.01.19 |
| 金剛經四句偈(금강경사구게) (1) | 2026.01.03 |
| 보살(菩薩)의 행원(行願) (1) | 2025.12.31 |
| 삼 보(三寶) (1) | 2025.1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