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지혜/경봉스님

석가탑과 다보탑

산울림(능인원) 2025. 12. 24. 10:08

  원래 불법은 문자와 언어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불법이라 하면 무슨 특별한 문자나 기이한 언어로 표현하는 것처럼 잘못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불법은 곧 중생심(衆生心)의 당체(當體)이기 때문이다. 중생심의 당체란 말은 바로 여러분의 본심(本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여러분의 마음은 언어도 아니고 문자도 아니다. 항상 있는 물질은 문자로 분석하거나 언어로 변명할 수 있지만 형상 없는 마음은 문자와 언어로 분석하거나 변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러니 설법은 종사(宗師)가 법좌에 오르기 전에 이미 끝난 것이고 청중도 자리에 앉 전에 벌써 마친 것이다. 이 도리를 알아야 된다. 이것이 불교의 진리인 것이다.

  마음의 당체는 문자를 여의고 말을 떠난 것이지만 어쩔 수 없이 문자를 빌어서 말해 보겠다.

  今日日喉風和(금일일후풍화 : 오늘 날은 따뜻하고 바람은 화창한데)

  山層層水孱孱(산층층수잔잔 : 산은 층층 하고 물은 잔잔하며)

   雪梅笑野鳥歌(설매소야조가 : 설중매는 향긋하고 들새는 노래하네)

   霞登曉日雨過靑山(하등효일우과청산 : 아침 안개는 새벽하늘에 오르고 비는 청산을 지나니)

  頭頭昆盧物物華藏(두두곤노물물화장 : 모든 만물이 비로요 온갖 것이 화장이로다)

  到信裡銅睛鐵眼看(도신이동정청안간 : 여기에서 구리쇠 눈동자와 쇠 눈으로 보아라)

  無影雁飛千澗月(무영안비천간월 : 그림자 없는 기러기는 일천 시내 달아래 나르고)

   石獅東吼斗移西(석사동후두이서 : 동사자가 동쪽으로 울부짖으니 두우별은 서쪽으로 옮기네)

  이것이 억지로 문자를 빌어 진리를 나타낸 말이다. 그러나 진리는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실상(實相)은 말을 떠난 것이다. 그대로가 진리이며 그대로가 실상인 것이다.

  진리이니 실상이니 하는 말도 억지로 빌어 쓴 문자요 말이다.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능금을 먹었는데 그 맛이 어떠하더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겠는가. 만일 말로써 대답하였다면 그것은 다만 말 뿐이지 말로 표현이 불가능한 것이다. 먹은 사람마다 맛을 표현 말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진리도 마음으로 깨달은 뿐이지 말이나 글로써는 그 채득 한 오묘한 경지를 성사 표현하였다 하더라도 석연치 못한 말이다.

  석가여래께서 사십구 년 간 설하신 팔만사천법문도 다만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는 것도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二五元來十(이오원래십 : 둘다섯은 본래 열인데)

  無疑者是誰(무의자시수 : 여기에 의심 없는 이 누구인가)

  更求玄妙處(갱구현묘처 : 이밖에 현묘한 것을 찾는다면)

  巳落第二頭(사락제이두 : 이미 재 이두에 떨어진 것이다)

  손가락도 열 개이고 발가락도 열 개이며 우리 몸에 구멍도 열 개다.

  화엄경(華嚴經)에 십신(十信)·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迴向)·십지(十地)가 있는데 이것은 모두 수행의 점차(漸次)이며 증득(證得)의 계단(階段)이다. 이 계단을 실수 없이 잘 오르면 기필코 성불한다. 남을 속일 수는 없어도 자신의 마음은 속이지 못하듯이 마찬가지로 수행이나 증득도 속이지 못하는 것이다. 닦으면 닦은 만큼 공덕이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것을 모르는 우둔한 사람들은 수행과 증득은 스님네들이나 하고 또 화엄경 같은 데에나 있는 것 인양 생각하지마는 가당치 않은 생각이다. 우리의 몸에 손 열 가락, 발 열 가락, 열 구멍이 있는 것은 수행과 증득이 우리를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철저하게 입증해 주는 것이다. 수행도 증득도 모두 우리들 마음으로 한다는 말이다.

  피땀을 흘려가며 수행하며 증득하면 행경십신(行境十身)·해경십신(解境十身)이 저절로 원만하게 성취된다. 결국 행경십신·해경십신도 우리의 몸과 마음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넓고 넓은 우주에는 불가설 불가설(不可說不可說) 미진수(微塵數)의 부처님이 계신다.

  이 부처님들은 각기 맡은 바 세계가 있는데 극락세계의 주불(主佛)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이며 사바세계의 주불은 석가모니다. 이렇게 우주에 가득 찬 부처님을 불보(佛寶)라 한다.

   그런데 이 부처님들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맡은 바 세계의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법을 설한다.

  석가모니는 이 사바세계의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사십구 년간 설법하셨다. 석가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지 어언 삼천 년이 되었으나 부처님의 말씀은 아직도 이 사바의 구석구석에 메아리치고 있다. 이렇게 부처님들이 설법한 내용을 법보(法寶)라 한다.

  이 법에 의지해서 안으로 수행하고 또 밖으로 펴는 분들이 있으니 승단의 스님네들이다. 부처님의 유촉을 받들어 이 우주의 곳곳에 불법을 널리 펴고 있으니 이렇게 혜등(慧燈)을 호지(護持)하여 불법을 펴는 분들을 승보(僧寶)라 한다.

    이상은 사적(事的)으로 삼보(三寶)를 말한 것이지만 이적(理的)으로 보면 이렇다.

  마음이 깨끗하고 맑은 것이 불보이고, 마음이 청정하여 광명을 발하는 것이 법보이며, 맑은 광명이 곳곳마다 걸림이 없이 비추는 것을 승보라 한다.

  그런데 평범한 상식으로 구상해 볼 수 없는 격식 밖에 삼보가 있다. 이 삼보는 마음을 환하게 통달한 이가 아니면 수용할 수 없다. 그것은 벼가 불보이며 보리가 법보이며 콩이 승보이다. 이 도리를 알려면 도안(道眼)이 열려야 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중생들은 이렇게 귀중한 삼보를 망각하고 피고름을 잔뜩 싸고 있는 이 보따리를 굉장한 보물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잘 벌고 잘 먹고 잘 입고 잘 노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고 위세를 부린다.

  그러나 잠시 생각을 돌리고 여러분들이 애지중지하는 몸뚱어리를 살펴보아라. 이 몸뚱이는 여러 가지의 허망한 인연을 빌어서 이루어진 것으로 인연이 다하는 날 사라져 버릴 물건이다.

   고고의 울음소리를 터뜨리며 태어난 뒤로 부모다 부부다 자식이다 하면서 단맛 쓴맛을 고루 보면서 살아가다가 늙음이 오고 병마가 닥치며 자리에 누워 신음한다. 고통이 심해지고 신음이 높아지면 숨결도 가빠진다. 결국 숨 한번 돌리지 못하면 죽고 만다. 물론 가족들은 울고불고 야단법석을 떨겠지만 이 죽은 물건은 방에다 오래 놔둘 수도 없다. 닷새만 되어도 썩기 시작하고 이레만 넘으면 독한 냄새와 함께 벌레마저 생긴다. 이렇게 되면 화장이나 매장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보라 이 몸뚱이가 인연이 다하는 곳을.

  여러분들도 이렇게 내 앞에 생생하게 앉아 있지만 화장을 하면 한 줌의 재로 돌아가고 매장을 하면 한 줌의 흙으로 사라진다. 다음에 태어날 곳은 천상인가, 지옥인가, 인간인가, 축생인가, 아수라인가, 마음을 밝히지 못하면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지 못한다. 그러니 철저히 무상(無常)을 느끼고 마음을 닦아야 한다. 무상을 느끼지 못하면 정진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 이 업석(法席)에 앉아있는 불자들은 밝고 묘한 마음으로 법문을 듣고 있다. 그러나 듣는 것으로만 족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묻노니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현재 이 법문은 무엇이 듣고 있는가. 다른데 정신을 팔지 말고 바로 여러분들의 목전(目前)을 살펴야 한다. 이 소소령령한 것이 이 법문을 듣고 있지 않는가. 이 소소령령한 것을 찾아내어 갈고닦아야 한다. 이것이 곧 나를 찾는 길이다.

  석가여래가 설산에서 고행하신 것도 이 소소령령한 마음자리를 찾아서 자기를 회복(恢復) 하기 위한 것이다.

  자아(自我)를 발견하려면 정신을 한 곳으로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걸핏하면 뜻대로 안 된다는 말을 자주 한다. “나”도 모르는 주제에 마음이 뜻대로 될 리가 없다. 마음을 뜻대로 하려면 “나”를 찾아야 하고 나를 찾으려면 정신을 통일해야 한다. 우리들의 생활은 무척 고되고 바쁘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마음을 찾아보겠다는 생각만 있으면 정신통일을 시도해 보는 것은 이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니다.

  우리의 일상 샐 활 가운데 아홉 시간 일하고 다섯 시간 쉬고 여섯 시간 자면 네 시간이 남는데 이 네 시간을 무료하고 한가하게 보낼 것이 아니라 네 시간이 다 안되면 한두 시간이라도 좋으니 조금씩 매일 계속하면 자신도 모르게 정신이 집중되며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묘(妙)를 얻게 된다. 이렇게 정신집중의 상태를 이끌어 가게 되면 구경(究竟)에는 일할 때나 잠잘 때나 밥 먹을 때나 쉴 때나 어느 때이고 정신자세가 흐트러지지 않고 정신 집중의 순일한 일념(一念)의 경지에 몰입되며 근본적으로 순수한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근본문제에 생사를 초월하는 길이며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인생의 노선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불안과 초조와 번민 때문에 흔들려야 하는 모든 어려움을 일시에 극복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혼란한 정신과 암담한 마음으로 일상생활에 임한다면 그저 갈팡질팡할 뿐이다. 앞길이 캄캄하여 아무것도 잘 안봉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인을 위해서 정신집중하는 일상생활을 해야 하겠지만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도 이러한 노력이 이루어져야 한다.

  가령 군부(軍部)의 예를 들어보자. 빠르고 좋은 무기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시급한 것은 정신무장이다. 우선 정신으로 적의 사기를 능가하고 정신적으로 적을 이기고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무기라도 아무 소용없다. 우리 국민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물샐틈없는 정신무장으로 조국과 조상의 얼과 동족의 혈통을 굳게 지키고, 불교의 진리를 바탕으로 대자대비한 부처님의 행원에 의지하여 만고에 길이 빛날 국가관을 누구나 지니고 있어야 한다. 불교의 진리를 바탕으로 단결된 신라의 화랑들은 백절불굴의 정신력으로 삼국통일을 하여 세계적인 민족문화를 형성하였다. 그 유적과 유물은 여러 곳에 많이 산재되어 있지만 특히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이 유명하다.

  석가탑은 오 층이고 다보탑은 십일 층인데 석가여래의 석가탑은 열반에 드신 보탑(寶塔)이요, 다보탑은 열반에 들지 않으신 보탑(寶塔)이다. 우리의 몸은 석가탑으로 되어 있고 다보탑으로도 되어 있다. 왜 석가탑인가 하면 발목까지 일층, 무릎까지 이층, 허벅지까지 삼층, 허리까지 사 층, 목가지 오 층이니 석가탑은 우리의 몸의 상징을 표현한 오 층탑인데 어째서 십일 층인 다보탑도 되는가. 오 층 석가탑에다가 팔의 관절 여섯 부분을 합하면 십일 층이 되는데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면 십일 층 다보탑이 되고 내리면 오 층 석가탑이 된다.

  그리고 극락전(極樂殿)으로 올라가는 동층계가 있는데 모두 아홉 층 계단에 극락세계 연화대(蓮華臺)를 표하여 계단마다 연꽃잎의 무늬를 새겨 놓았다.

  극락세계는 환화장엄(幻化莊嚴)으로 있는 것이다. 극락세계를 멀리 구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람의 몸이 곧 극락국토요 사람의 몸의 생긴 구조가 우주의 생긴 형상과 흡사하게 되어 있다.

  사람의 몸에 근육은 흙이요, 머리카락과 털은 초목이요, 위장은 바다이고, 왼쪽 눈은 해, 바른쪽 눈은 달이다.

  구품연화대도 우리 몸에 다 갖추어져 있다. 눈이 둘이고 귀가 둘 콧구멍이 둘 입이 하나 대소변 보는 곳과 모두 합해서 아홉이 된다. 이것이 곧 구품연화대이다. 구품연화대에 상·중·하의 삼품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것을 분석하면 눈과 귀는 상품에 속하는데 그 이유는 눈은 맑고 밝아서 이 세상에 무슨 물건이라도 들어가기만 하면 병이 나므로 모든 물건을 용납할 수 없으니 상품이 되고 귀도 속에 아무것도 없이 깨끗하므로 상품에 속하고, 코와 입은 더러운 코와 가래가 나오니 중품에 속하고, 밑에는 냄새나는 똥오줌이 나오므로 하품에 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품연화대에 청정법신 부처님이 계시지마는 찾는 사람도 없고 아는 사람도 적다.

  극락세계도 사람의 몸에 있고 생사열반에 관계없는 부처님도 있으니 찾아야 한다. 그러나 찾는다는 것도 우스운 말이다. 본래 가고 옴이 없고 상주불멸(常住不滅)인데 무엇을 찾겠는가, 밝은 눈을 열면 활연히 나타날 것이다.

  우리의 이 몸뚱이 탑에는 불국사의 다보탑이나 석가탑에서는 볼 수 없는 중요한 기계가 가설되어 있으니 눈은 아주 세밀한 망원경이고, 코는 선풍기, 귀는 수신기, 입은 방송국이다.

  석가탑에는 부처님의 사리(舍利)만 봉안(奉安) 되어 있지만 자기의 오 층 석가탑에는 생불(生佛)이 들어 있어서 오고 가는데 자유자재하고 아주 편리한 오층탑인 것이다. 우리가 정신을 집중하는 목적은 우리의 영원히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참된 생명을 찾자는데 있는 것이다. 욕락(欲樂)에만 파묻혀 살아가는 허무한 생활을 본래 티 없이 맑고 깨끗한 마음의 당체로 환원(還源)에만 파묻혀 살아가는 허무한 상황을 본래 티 없이 맑고 깨끗한 마음의 당체로 환원(還源)한다는 말이다. 마음의 당체로 환원하려면 각자의 본분상(本分相)에서 길을 택하여야 한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도 거두어들여서 부득이 표현하자면 마음 심자 뿐이고 펼쳐놓으면 팔만사천문인 것이다. 문이 이렇게 많아도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문마다 마음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鴛鴦繡出從君看(원앙수출종군간 : 원앙새를 묻거든 원앙새 수를 놓아 보여 줄지언정)

 莫把金針渡與人(막파금침도여인 : 수놓은 바늘일랑 주지 말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