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지혜/경봉스님

보살(菩薩)의 육바라밀(六波羅蜜 : 경봉스님 법문중에서)

산울림(능인원) 2025. 12. 4. 09:47

    鷰語鶯歌聲色裡(연어맹가성색리 : 제비가 지지배배 지저귀고 있다가 꾀꼬리 우짖는 정경 속에)

   碧天如海日光紅(벽천여해일광홍 : 푸른 하늘은 바다이듯 한데 붉은 태양이 아름답네)

  보살(菩薩)은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장진(精進)·선정(禪定)·智慧지혜)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아서 성도(成道)하여 중생을 교환한다.

  바라밀이란 말은 범어(梵語)로서 생사(生死)의 고해(苦海)에서 벗어나 피안(彼岸)의 이상의 경지에 이름을 말하는 것인데, 본래 이 진여법계(眞如法界)에는 너도 없고 나도 없으니 누가 바라밀을 바드면 누가 얻겠는가. 받을 것도 없고 줄 것도 없는 것이다. 다만 중생들의 모든 일들은 한 가지 업의 과보이며 분별과 죄복(罪福)을 주는 상(相)은 없는 것이다.

  다겁 다생으로 십악죄(十惡罪)를 지으며 또 이것을 쉽게 소멸하지 못하고 이 무섭고 무거운 짐을 다음 생까지 짊어지고 가게 되며,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재에도 바쁜 업을 자꾸 지어서 보이지 않는 업이 마치 누룽지 눌 듯 붙어 있는 것이다.

  이 마음은 본래 청정하고 고요한 것을 자기가 구정물 만들 듯 흐려버려서 이렇게 번뇌스럽게 된 것이다. 마음을 비울 줄 아는 것은 참으로 오묘한 진리이다.

  보시는 물질의 보시보다 법보시가 제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름을 단바라밀(檀波羅蜜)이라 하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일으키지 않음이 곧 계체(戒體)가 청정함이며 이 이름을 시바라밀(尸波羅蜜)이라 하고 지계(持戒)라 한다.

  계를 지니는 것은 몸과 입과 뜻이 청정한 것을 말한다. 몸이 청정하다는 것은 살생·도둑질·음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입이 청정하다는 것은 남을 속이는 말·이간질·폭언·식언 등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뜻이 청정해야 한다는 것은 모든 망상번뇌가 뜻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이다.

  마음이란 안도 바 깔도 중간도 없는 평등체(平等體)라서 자신이 스스로 나쁜 생각을 해서 그렇지 이 마음이란 남들이 아무리 물을 들이려 해도 물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마음자리란 물건·시감·공간·피차 등등의 어떠한 표현도 맞지 않는 것이니 어찌 말로 설명하겠는가. 물들일 수 없으며 허공같이 평등한 이것을 이름하여 삼제바라밀(羼提波羅蜜)이니 곧 인욕(忍辱)이다.

  모든 한량없는 상(相)을 다 여의고 필경에는 자성(自性)을 깨달아서 모든 상(相)에 머물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비리야바라밀(毘梨耶波羅蜜)이니 곧 정진(精進)이다. 이렇게 정진하려는 이들은 세상에서 남이 즐기는 오욕락을 함께 따라 하며 정진도 한다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며, 바보 아닌 바보가 되어 정진에 노력을 해야 무위진인(無位眞人)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무슨 일을 당하든지 고요히 하며 요란스럽게 분주를 떨지 말며 태연히 대하는 것을 이름하여 선바라밀(禪波羅蜜)이니 곧 선정(禪定)이다.

  열반(涅槃)이란 생사를 해탈하는 것이요. 진여(眞如)는 생리(生理)가 참되어서 변치 않음을 말하는 것이니 이 마음자리가 본래 청정함을 진여라 한다. 여여(如如) 한 이 자리는 그 당체(當體)ㄹ글 볼 수가 없고 희론(戱論)을 일으키지 않으니 본별의식을 다 여의고 그 방편에도 머물지 않음을 여여(如如)라 하니 여여하여 용처(用處)도 없으며 닦아도 닦음이 없고 행하여도 행함이 없다. 이렇게 하는 것을 경에 이르기를 방편해(方便解)라 하는 것이다. 이름하여 반야바라밀이요 곧 지혜인 것이다.

  마음의 비색(非色)이니 색에 속하지 않으며, 마음이 비색(非色)도 아니니 색 아닌 것에도 속하지 않고, 마음이 비록 색을 비추나 색에 속한 것이 아니며, 마음이 비록 비색을 비추나 비색에도 속한 것이 아니며, 마음이 색상(色相)이 아니나 허공처럼 텅 빈 것도 아니다.

  보살(菩薩)에는 보살승(菩薩乘)·성문승(聲聞乘)·연각승(緣覺乘)의 삼승(三乘)이 있으니 보살은 공한 것을 비추고 공하지 않은 것도 비추며, 연각은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을 듣고 깨닫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공한 것은 비추어도 공하지 않은 것은 비추지 못하며, 성문은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四聖諦)를 듣고 깨닫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공한 것조차 얻기가 어려우니 공하지 않은 것은 물론인 것이다. 보살·연각·성문승의 자제(次第)가 대강 그린 것이다.

  육조(六祖)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마음자리는 항상 공적(空寂)하여 한 생각 범부의 마음이 문득 사라지면 곧 부처의 성리를 본다.”라고 하였으니 화엄경(華嚴經)에는 “불자야 여래의 지혜는 이르지 아니한 곳이 없고 중생도 여래의 지혜를 갖추지 아니함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 뜻은 공기 가운데 전기 전자는 우리의 몸에도 통하고 흙에도 통하며 모든 만상삼라에 다 통하듯이 부처님의 지혜는 어떠한 곳이든지 이르지 않는 곳이 없고 중생의 지혜도 여래의 지혜와 똑같아서 어는 누구에게나 참된 부처가 있는 것이다.

  금강경(金剛經)에 이르기를

  若以色見我(야이색견아 : 만약 어떤 모습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以音成求我(이음성구아 : 음성 가운데서 나를 찾는다면)

  是人行邪道(시인행사도 : 이것은 삿된 도를 행하는 사람이니)

   不能見如來(불능견여래 : 여래를 보지 못한다)

  이 말씀은 누구에게나 있는 마음의 참부처 그것을 가르쳐 준 것이다.

  중생들의 마음속엔 항상 전도(顚倒)된 망상이 꽉 차있기 때문에 보고 듣는 것도 망견(妄見)으로 보고 듣기 때문에 항상 불안스러운 것이니 불교를 믿는 이들은 정신(正信)과 정견(定見)을 지니고 생활을 하면 어떠한 어려움도 다 없어진다.

  화엄경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집착이라는 것은 한이 없는데 전도·망상·집착으로 인하여 소소령령한 이 지혜자리를 얻지 못한다. 그래서 만약 망령된 생각을 버리면 일체지혜와 또 걸림 없는 지혜가 곧 나타남을 얻는다.”라고 하였다.

  업경대(業鏡臺)란 말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눈을 감고 어릴 때부터 지내온 모든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잘못이라는 것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곧 업경대이다. 이 업경대가 맑고 깨끗해지도록 노력해야 된다. 이 세상에는 좋은 이도 살고 나쁜 이도 살고 어진 이와 협잡꾼 또는 별별 사람이 어울려서 사는데 이것은 모두 한 생각의 차이로서 엄청나게 딴 환경으로 바뀐 것이다. 이 한 색각 차이에 성현도 되고 범부도 되고 약한 사람도 되고 착한 사람도 되니 한 생각을 잘 돌키고 불교를 잘 믿어서 불교를 일생생활에 조화를 잘 이루어가며 생활해야 된다. 참된 진리를 추구하는 생활이기 때문이다.

   발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이 이름이 반야바라밀이요

  설법이 설법이 아니라

  이 이름이 설법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