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인의 나들이/해외나들이

오스트리아 빈(비엔나)

산울림(능인원) 2016. 9. 20. 20:48

 

스트리아 빈은(비엔나) 도나우 강을 따라 자리 잡고 있으며 동유럽과 서유럽 사이의 관문 역할을 한다. 1558~1806년에 신성 로마 제국 중심지였고, 그 후 1918년까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중심지였다. 품위있고 거대한 문화적 위업을 이룬 도시로서 건축과 음악으로 유명하다. 빈은 판노니아 분지가 서쪽의 알프스 고산지역을 향해 높아지기 시작하는 곳에서 도나우 강과 접하고 있다. 시내에서 가장 높은 지역은 빈 삼림지대인데 이곳은 대체로 반원형인 4개의 계단식 대지를

이루면서 도나우 강을 향해 가파르게 낮아진다.

 

전형적인 중부대륙성 기후를 보이며 1월평균기온은 -0.5℃이고 7월평균기온은 19.5℃이다. 연간 강우량은 660㎜ 정도이다. 경제기반은 무역업과 공업이며, 주요공산품으로는 전기기구·종이·의류·공작기계가 있다. 시 정부는 많은 사업체를 경영하는 등 경제에서 큰 역할을 한다.

 

 

빈은 화려한 역사를 보여주는 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다. 이곳의 유명한 건물들 중의 하나인 성 스테파누스 성당은 12세기 중엽에 세워졌다가 화재로 손실되어 200년 후 재건되었다. 다른 중요한 중세기 건물로는 13세기말 합스부르크 통치자들의 성인 호프부르크, 14세기 미노리텐키르헤 교회, 마리아암게슈타데 교회가 있다. 17세기말이 되면서 플라구에콜룸 같은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빈 지역에서 바로크 양식은 70년 이상 유행했으나 마침내는 링 건축양식에 대체되었다. 링 양식의 건축물들은 링슈트라세를 따라 일렬로 늘어서 있으며, 그중에는 신(新)프랑스 르네상스풍의 국립 오페라관, 의(擬)고딕식의 포티페 교회, 신이탈리아르네상스풍의 빈대학교, 신플랑드르고딕식의 라트하우스(시청) 등이 있다.

 

빈은 건축뿐만 아니라 음악에서도 수세기 동안 세계적 중심지였다.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루트비히 판 베토벤, 프란츠 슈베르트, 요하네스 브람스, 요한 슈트라우스, 구스타프 말러, 아르놀트 쇤베르크 등 많은 서양 음악가들이 이곳을 그들의 본거지로 삼았다. 티롤 민속춤에서 파생된 왈츠는 1820년에 이곳에서 확립되었으며, 그 직후에 위대한 빈 오페레타 시대가 개막되었다. 또한 세계적으로 뛰어난 교향악단 중의 하나인 빈 관현악단(비엔나 필하모닉)의 본거지이다.

 

빈에는 30개 이상의 박물관이 있다. 호프부르크 성의 보물실에 보관되어 있는 이 시의 가장 돋보이는 소장품 중의 하나는 합스부르크가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의 왕관이다. 이 성에는 또한 세계 최대 규모의 그래픽 아트 수집품이 있는데, 100만 점 이상되는 이 수집품에는 렘브란트와 알브레히트 뒤러의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미술사박물관에는 합스부르크가에서 수집한 옛 명작들이 소장되어 있다. 지크문트 프로이트,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의 옛 집들은 현재 박물관이 되었다.

 

또한 지하철이 빈 도심부를 일주하며 교외로 뻗어 있다. 철도가 북·남·동쪽으로 뻗어 있으며, 주요 간선도로들이 방사형으로 사방에 퍼져나간다. 빈 국제공항은 도심에서 남동쪽으로 18km 떨어진 슈베하트에 있다.


 

벨베테레궁의 야경과 낮의 모습이 너무 다르다

 

베토벤은 교향곡을 9개나 작곡했다. 선배 하이든이나 모짜르트에 비하면 숫자는 작지만 작품 자체만 놓고 본다면 곡의 내용이나 그의 수법 구성과 형식등 작품 하나 하나가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런한 베토벤이 본을 떠나기 전부터 이미 서북부 독일에서 즉흥연주에 능한 피아노의 장인으로 상당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당시 모차르트도 훌륭한 즉흥연주가로 인기를 누렸지만, 모든 점에서 베토벤을 능가하지는 못했다. 감수성을 강조하던 당시의 시대사조에 힘입어 그는 과거의 어떤 연주자 보다도 청중에게 강한 감동을 주었다. 자연히 그는 빈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빈의 귀족들에게 대단한 사랑을 받았다.

 

발트슈타인 남작은 사람들에게 베토벤을 모차르트의 뒤를 이은 위대한 음악가로 칭찬했으며, 빈 초기 시절의 후원자들이 스비텐 백작, 카를 리히노프스키 대공(모차르트를 죽을 때까지 후원했던 유일한 귀족이었음)이었던 것은 의미심장하다.

 

1790년대 빈에서 음악은 날이 갈수록 귀족들의 오락거리로 인기를 더해갔다. 당시 그곳의 귀족들은 황제 프란츠 2세의 반동정치를 불신했고, 특히 음악을 숭배했다. 많은 귀족들이 직접 악기를 연주할 줄 알았고 이들의 연주 실력은 전문 연주자와 겨룰 정도였다. 어떤 시대, 어떤 지역에서도 이처럼 아마추어 음악이 융성했던 적이 없었다.

 

그러나 베토벤은 작곡가로서는 아직도 여러 가지 문제들을 극복해야 했다. 그는 하이든의 도움만으로는 부족함을 느껴서 하이든과 겉으로는 계속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하이든 몰래 다른 선생들에게 레슨을 받곤 했다. 그중 한 사람인 성 슈테판 대성당의 오르간 연주자 요한 게오르크 알브레히츠베트 베르거는 옛 대위법 양식에 능통한 사람으로 베토벤이 필요로 하는 여러 기법들을 가르쳐주었다.

 

 

그는 또한 황제 직속 음악감독이던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 성악 작곡법을 배웠다. 1794년 하이든이 런던을 2번째로 방문하기 위해 빈을 떠나자 베토벤이 본으로 복귀하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그당시 본은 공교롭게도 프랑스의 지배 아래 있었고 선제후도 그곳을 떠나 결과적으로 베토벤에 대한 보조금도 끊기게 되었지만, 그는 레슨과 연주 수입 이외에도 리히노프스키 대공으로부터 생활비를 받게 되었기 때문에 아무런 어려움도 따르지 않았다. 1795년에 그는 빈에서 처음으로 공개연주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2번과 모차르트의 협주곡을 연주했고, 하이든을 위한 기금 마련 연주회에 참가했다.

 

한편 수많은 귀족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피아노·바이올린·첼로를 위한 3개의 3중주 작품 1번이 출시 되었다.  그 후 3년 동안 그는 베를린·프라하 등지를 순회공연했으며, 이밖에도 상황이 허락되는 대로 여러 지역을 여행했다. 1800년부터는 대대적인 규모의 공개 연주회를 시작해 외국에 널리 명성을 날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세기로 접어드는 시기는 베토벤의 작품활동 시기 중 제1기에 해당하며 그가 아직 18세기적인 기법과 사고에 묶여 있던 시기이다. 당시 출판된 그의 작품들은 대개 피아노 독주곡이나 피아노와 다른 악기를 위한 작품이며, 그밖에 현악 3중주 E♭장조 작품3, 3개의 현악 3중주 작품9, 6개의 현악 4중주 작품18, 교향곡 1번 등이 있다. 이 시기에 그는 서서히 자신의 영역과 기법을 확장해갔으나 아직까지는 주로 피아노 음악 작곡가로서 알려졌다. 이처럼 빈은 베토벤에 있어서는 음악적으로 성숙기에 접어 들게 된다.

 

 

 

 

 

 

 

 

 

 

 

 

 

 

 

 

 

후원의 정원이 너무나 아름답다

 

 

 

 

합수부르크 왕가의 여름궁전

 

 

 

 

 

 

 

 

 

 

 

 

 

 

 

 

 

 

 

엄청난 그림들이 이안에 전시되어 있다. 요한 슈트라우스 교향악단이 바로 이곳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그때 봄의 왈츠에 맞추어 춤추던 모습들이 아련히 떠오른다.

 

슈태판 대성당 모차르트는 이성당에서 결혼식을 했다.

 

 

 

 

클림트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 바로 키스인데 진품을 이곳에서 볼 수 있어 행복했고 클림트가 사랑하는 연인 에밀리에를 꼭 안고 볼에 입맞춤 하는 모습이 너무나 생생하였고 두 사람을 둘러싼 황금빛 천에 여러 가지 무늬가 잔뜩 그려져 있는데 남자의 옷에는 네모난 무늬가 그려져 있고, 여자의 옷에는 동그란 무늬가 그려져 있다. 몸은 화려한 장식에 묻혀 거의 보이지 않으나 얼굴과 손, 발만 보여도 화려하고 아름다운 색채만으로도 사랑의 환상이 느낄 수가 있다.

 

이그림은 기호점을 최대로 살린 그림으로 전체를 13으로 볼때 8:5의 비율이 잘 적용되어 있는데 하단의 꿏이 5이고 상단은 8로 나누어지고  좌우 여백도 크림트 좌측에서 여백이 5이고 에밀라에 포함 우측이 8이며 에밀라에 우측 옷에서 부터 우측끝까지 5이고 좌측은 8이며, 에밀라 좌측 팔에서 상단까지 5이고 팔 하단이 8이다.  에밀라 팔에서 키스장면이 8이고 키스장면에서 상단이 5이다.

 

이런 배분율로 본다면 크림트와 에밀라에 옷은 결국 남근을 상징하는 것으로 힘의 중심에 바로 키스하는 장면을 그려 넣음으로서 정열적인 사랑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겠다. 진품에서는 그러한 느낌이 강했으나,  이 그림은 가품이다. 이런 분석 내용이 확실한 증거나, 결정적인 학술자료가 없기에 필자가 독단적으로 추단한 분석이지 정론이 아님을 밝힌다. 어떤 사람은 이런 분석에 긍정적 반응을 보이는가 하면 아떤이는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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