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인의 나들이/나들이 지혜

딸과 1박 2일(농암 종택, 하회마을)

산울림(능인원) 2015. 10. 18. 22:59

단양을 뒤로하고 우리는 경북 안동 도산온천을 찾았다. 아주 조그만 시골 목욕탕 수준인 도산

온천은 중탄산수로 PH9.26으로 강 알카리성 온천수이다. 이곳의 특징은 온천수도 좋지만

여름철 더위를 쉽게 물리칠 수 있는 지하수 냉탕이다. 2시간동안 온수와 냉탕을 다니다 보니

온몸의 피로가 다 풀린다.

 

온천욕을 마치고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있는 농암 이현보의 종택을 찾았다. 이현보 선생은

1504년(연산군 10년)에 사간원정언으로 있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 안동으로 유배된 인물이다.

 
농암종택이 있던 곳은 분천마을, 하지만 1976년 안동댐 건설로 분천마을이 수몰되었다. 이후

안동의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이전되어 있던 종택과 사당, 긍구당(肯構堂)을 영천이씨 문중의

종손 이성원 씨가 한곳으로 옮겨 놓았다. 2007년에 분강서원(汾江書院)이 재이건되었으며,

지금은 분강촌(汾江村)이라고도 불리며, 일반인들에게 개방된다. 
 
농암종택은 낙동강 상류 청량산 자락,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자리하고 있다. '가송리'는

그 이름처럼 ‘佳松-아름다운 소나무가 있는 마을’로 산촌과 강촌의 전경을 한꺼번에 만끽할 수

있는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마을이다. 이웃에 도산서원, 국학진흥원, 오천유적지, 퇴계종택,

도산온천, 이육사생가 등의 유적이 있다.
 
신비의 명산 청량산과 더불어 가송리의 협곡을 끼고 흐르는 낙동강은 낙동강 700리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마을 앞에는 강과 단애, 그리고 은빛 모래사장의 강변이

매우 조화롭게 어울려 있어, 이른바 '도산9곡'의 비경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이런 연유가

아니더라도 가송리는 '공민왕유적', '고산정', '월명담', '벽력암', '학소대' 등의 명소를 감싸

안고 있어 그 자체의 아름다움만으로 찾는 사람의 감탄을 자아내고 있다.

 

봉화 용궁식당에서 송이 덧밥으로 석식을 마치고 영주에서 1박하고 다시 우리는 하회마을을

찾았다. 중요민속자료 제122호. 예로부터 유림의 고장이었던 이곳은 한국의 대표적 동족부락으로,

국보를 비롯해 보물·중요민속자료·중요무형문화재 등 값진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어 1984년 1월

민속보존마을로 지정되었다.

 

동쪽은 태백산의 지맥인 화산(321m)이 감싸고 있으며, 낙동강이 서·남·북 경계를 따라 마을

전체를 태극형으로 감싸 흐른다. 이는 풍수지리적으로 산태극수태극을 이루는 길지로 임진왜란

때는 전화를 입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에는 '허씨터전에 안씨문전에 유씨배판'이라는 말이

전해오는데, 이는 일찍이 허씨(許氏)들이 자리를 잡았다가 나중에는 안씨들이, 그 다음에는 풍산

유씨들이 동족부락을 이룬 곳임을 의미한다. 조선 전기에 이미 유씨들의 기반이 성립되어 있었을

것이라 짐작되나 유씨 동족촌의 기틀이 마련된 것은 조선 중엽 이후 대유학자인 유운룡·유성룡

형제 시대에 이룩되었다.

 

과거 신분제 사회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300~500년 된 130여 호(戶)의 유서깊은 대·소 가옥들이

보존되어 있다. 이들 중 유운룡의 종택인 안동양진당(보물 제306호)과 서애 유성룡을 모신 종가인

충효당(보물 제414호)을 비롯해 하회북촌택(중요민속자료 제84호)·하회원지정사(중요민속자료

제85호)·하회빈영정사(중요민속자료 제86호)·하회유시주가옥(중요민속자료 제87호)·하회옥연정사

(중요민속자료 제88호)·하회겸암정사(중요민속자료 제89호)·하회남촌택(중요민속자료 제90호)·

하회주일재(중요민속자료 제91호) 등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들 가옥들은 모두

풍산 유씨의 소유이며, 대부분이 유운룡과 유성룡의 유적이다.

 

하회마을의 대표적 가옥으로는 북촌택·양진당·충효당·남촌택의 네 가옥을 들 수 있는데, 이들

가옥들은 ㅁ자형을 기본으로 하고 몸채의 한 편을 연장해 사랑채로 했다. 충효당 후원에 있는

영모각은 유성룡의 유물을 보존·전시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각종 유물과 문서들이 보존되어 있다.

 

또한 이들 가옥 변두리에는 하인이나 노비·타성씨가 거주하던 집들이 있는데, 이들은 3~4칸

규모의 토담집이다. 이 고장의 오랜 민간전승놀이로 하회별신굿탈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와

강상유화 놀이인 줄불놀이가 있다. 하회별신굿탈놀이에 쓰이던 하회탈은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북쪽으로는 울창한 노송림대가 있으며, 마을 중앙에는 600여 년 된 느티나무가 있어 삼신당

나무로 삼고 있다. 강 건너의 부용대는 천연의 병풍과 같은 형태를 자아내며, 이 일대는 백사

청송이 어울려 경승을 이룬다. 이곳 강은 대략 최대 폭 300m, 최대수심 5m에 이르며 하회

도선장의 나룻배를 이용해 주변지역과의 왕래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상주와 풍산읍을 잇는

지방도와 연결된 길이 하회마을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이 마을길의 북쪽을 북촌이라 하고

남쪽을 남촌이라 한다.

선조 임금님의 친필

 

 

하회마을 입구

 

이집이 바로 유성룡 대감이 성장한 집이다.

 

유성룡 대감의 조부는 자신의 집보다 사돈집의 기운이 좋다는 것을 알고는 며느리가 만삭이 되어 산일이

가까워지자 며느리에게 친정집의 기운을 이야기 해주고 훌륭한 아들을 낳으라면서 친정집으로 보내면서

친정부모도 이런한 점을 아주 잘 알고 있으니 가마에서 내리지 않고 기다리면 딸인데 어찌 하겠느냐면서

내친다고 되 돌아 오지 말고 친정집에서 꼭 아기를 낳아야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게 된다. 친정에 도착하자

마자 친정아버지가 출가 외인이 어디를 오려고 하느냐면서 당장 돌아가라고 호통을 치지만 해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게 되고 밤이 늦어 지자 딸을 안으로 들이게 되어 첫 아이를 순산하게 되는데 이 분이 바로

유운룡 호는 겸암선생님 이다. 이분은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성장하게 되며 진보 현감과 안동 현감을

마지막으로 낙향하여 부모님을 모시면서 후학을 가르치는데 전념을 하게 된다.

 

두 번째 아이의 산달이 되자 조부는 며느리에게 신신당부를 하게 된다. 이번에는 아예 발도 드리지 못

하도록 친정부모들의 난리를 칠 것이니 밤이 된다고 돌아오지 말고 가마에 오강을 싫고가서 용번을

보면서 기다리면 받아 줄 것이니 꼭 아기를 그 곳에서 낳도록 할 것이며, 산통이 오더라도 참고

기다리다가 신시가 되면 출산하라고 당부를 한다. 

 

딸이 해산을 하기 위해 또 온 것을 본 친정 아버지는 딸을 받아주지 않고 냉대 하면서 하얀밤을

그렇게 보내게 되는데 첫닭이 울자 친정 아버지가 친정 어머니에게 우리집 며느리는 혼인한지 몇 년이

지나도록 산기 소식이 없는데 딸애는 벌써 두 번째 아이를 출산한다고 왔으니 이 일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근심만 가득 하다고 하면서 아무래도 우리집 기운이 딸네 집으로 건너 가는가 보다며 받아

주게 되는데 그 분이 바로 서애 유성룡 대감이다. 이 분이  세살 아래인 이순신 장군의 영원한 후원자가

되어 임진 왜란시 나라를 지키게 만든다. 퇴계 이황 선생은 성룡은 하늘이 낸 사람 이라고 했을 만큼

총명하였다고 한다.

   

 

이집은 유운룡 선생의 집이며 현재 종손이 기거하는 집이다.

 

 

보일 듯 말듯 한 기와집이 바로 겸암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하회마을을 회돌아 강이 이어지는데 여름철 가뭄이 들면 무릎까지 바지를 걷어 올리면 건널 수 있을

정도로 낮아져 동네 사람들이 물고기 및 우렁을 잡아 먹을 것이 없던 시절 영양을 보충하였던 곳으로

서애 대감이 낙향하여 나라로부터 받은 녹지를 서민들에게 적은 도지를 받으면서 나누어주고

후학을 가르치던 시절 이 곳 현감이 전직 정승께 문안 인사차 도착하여 보니 노인이 바지를 걷어

올리고 우렁을 잡고 있는 것을 보고는 "여보 노인장 나좀 업어서 강을 건너달라"고 하여 강을 건너가

현감을 등에 업고 건너던 중 현감이 "서애 대감님 요즈음 건강이 어떠시냐"고 묻자 "그 영감 땡이 힘

철철 넘쳐 현직 현감을 등에 업고 지금 강을 건너고 있다"고 하자 강물에서 읍을 하고 문안 인사를

하였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전해 오고 있다.

 

서애 대감이 낙향을 하자 며느리가 따라와 봉양을 하는데 며느리가 시누이에게 우리 친정 아버지는

한양에서 이조판서를 하고 있는데 곡간마다 곡식들로 가득하며 창고에는 오만가지 물품들이 가득

한데 우리집은 영의정을 하신 시아버지 있는데도 겨우 하루 세끼 밥만 먹을 정도로 가난하다며 늘

불평을 하자 시누이가 서애대감에게  "아버지 올케언니 버릇좀 고쳐달라"고 하자 때가 되면 스스로

깨닿을 날이 올 것이라고 했단다.

 

그렇게 수개월이 지난후 그 사돈이 경상감사로 부임하면서 전직 정승에게 인사를 오게 되는데 사돈이

십리 밖에서 파발을 보내어 "사로 인사를 드려야 되느냐, 아니면 공으로 인사를 드려야 되는냐" 문의

하자 경상감사가 "사로 가는 것이냐 아니면 공으로 가는 것이냐"고 되 되물음을 듣고 공으로 드려야

됨을 알게 된 사돈은 십리 밖에서부터 관복입고 걸어서 오게 되는데 땀을 뻘뻘 흘리면서 마당에 들어섬과

동시에 서애 대감이 "게 섯거라"하니 시셋말로 부동자세로 서있게 되자 딸이 부엌에서 친정 아버지

온다고 좋아 하다가 늙은 시아버지 말 한마디에 꼼짝달삭 못하고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라서 어쩔줄 모르고 있을 때 다시 "들라 하라"는 시아버지 말이 떨어지자 마자 사랑방으로

들어가 큰 절로 인사를 한 후 시아버지가 이제부터는 사일세 하니 그 때부터 농을 주고 받으면서

입주를 하는 것을 본 이 후 친정 자랑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서애 대감이 거침이 없이 행동을 하게 되자 하루는 누더기 승복에 초립을 깊게 눌러 쓴 걸승이

찾아와 바둑 두기를 청하자 안으로 들라하여 내기 바둑을 두는데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의 소원

세가지를 들어 주기로 약속하고 포석하는데 초반에는 서애 대감이 기선을 제앞하고 이기는 가

싶더니 끝내기에 들어가면서 대마가 죽게 되어 돌을 던지면서 다시 한판하자고 청하여 두었으나,

첫 판과 같이 똑같이 재차 지게 되자 서애 대감은 조선국에서 선조 임금님 외에는 진적이 없는

서애 대감으로써는 세 번째 판을 청하여 다시 두게 되는데 세 번째 판도 지게 되자 걸승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자 걸승은 복장을 갖추고 삼배를 올리라고 하자 조선의 최고 유학자가 어찌

일개 걸승에게 절을 할 수 있느냐고 오히려 호통을 치자 걸승은 일개 걸승에게도 약속을 못 지키는

사람이 어찌 정승으로 호민을 했다고 할 수 있는냐고 큰소리로 화답하자 말없이 들어가 예복을 갈아

입고 삼배를 하고 나자 걸승이 초립을 벗어 놓는데 걸승을 바라보니 다름아닌 바로 친형인 겸암

운룡선생이다. 심하게 동생을 꾸짓고 후학양성에 집중하라는 충고를 하게 된다.

지금도 이 곳의 많은 노인분들은 서애 대감보다 겸암 선생님의 학식이 더 깊었다고들 한다. 아무튼

중세 조선조에서 큰 일을 한 분들로 이 형제분을 빼어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