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마하무량사 여산 암도 스님
현 시대 ‘부루나 존자’로 정평
교육원장 놓고 백양사서 정진
산답게 살겠다며 ‘如山’ 법호
산사 가꾸며 ‘마음 밭’도 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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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부루나 존자’ 한 명을 꼽으라면 누구라도 암도 스님을 떠올릴 것이다. 한 사찰에 주석하며 법을 편 게 아니라 전국 각지를 마다하지 않고 하루 네, 다섯 법문도 소화한 스님이니 그럴 만하다.
그러나 암도 스님이 ‘부루나 존자’로 소문난 것은 이 때문이 아니다. 설법 속에 재미와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스님은 법문 전에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깊이 고민하고, 이를 풀어 나가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쓰며 공부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대중들에게 ‘이해’는 시켜줄 순 있어도 ‘감동’을 선사할 수는 없다. 스님 법문 속엔 자신의 삶을 그대로 녹여 낸 인간미가 스며있다. 자신의 살림살이를 고스란히 내 놓기에 스님의 법문은 따뜻하고 명쾌하다. 듣는 이의 가슴을 울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치솟는 물가가 세속의 어깨를 움츠리게 한다.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고, 부모가 자식을 살해하는 현실 속에 잇따른 자살 소식은 사람들의 가슴을 매어지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무작정 담양 마하무량사로 향했다. 청량한 법문 한 마디가 그 어느 때보다 그리워서다. “시골 중에게 들을 말이 뭐있냐”하면서도 살가운 미소와 함께 따뜻한 차 한 잔을 우려 내신다.
1938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난 스님은 1955년 백양사로 출가했다.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한 후 동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스님은 백양사 주지 소임과 중앙승가대 불교대학 교수, 포교원장을 역임했었다. 조계종 제2대 교육원장 소임을 마친 후에는 백양사 운문암과 청량암에서 정진한 후 이곳 담양으로 주석처를 옮겨 마하무량사를 가꾸어 가고 있다. 왜 사찰 이름을 ‘무량사’가 아닌 ‘마하무량사’로 했는지가 궁금했다. 크다는 ‘마하’와 측량할 수 없이 많다는 ‘무량’ 조합이 중복인 듯하면서도 무언가 특별한 의미가 농축돼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일었다.
혹, ‘마하’에는 ‘묘(妙)’와 ‘뛰어나다’는 뜻도 있으니 ‘오묘한 무량사’, ‘뛰어 난 무량사’라 한 것일까?
“그냥 무량사라 하려 했는데 무량사가 너무 많아요. 그래 그냥 마하무량사라 했지.”
‘정말 이게 다입니까?’ 라는 의문의 눈빛을 보내자 ‘뭘 더 기대해?’라는 눈빛만 돌아왔다. 내친 김에, ‘암도’라는 법명 대신 여산(如山)이라는 이름을 자주 쓴다는 일설이 있기에 왜 ‘여산’을 쓰느냐 여쭈어 보았다.
“추사는 호가 35개였다는 데 산승이 법호 하나 쓰는 게 대수인가?”라며 되물어 왔다. 여산은 법호였다. 또 한 방 먹었다.
“남은 생 동안 산(山)답게 살며, 산 같아 보려 해요.”
마하무량사를 일궈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정진의 고삐를 늦추지 않으려는 스스로의 경책이 배어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스님에게 세속의 일을 그대로 전하며 ‘생사’에 대한 말씀을 부탁 드렸다.
“생사(生死)라! ‘사’는 접어두고 생을 말합시다. 산다는 것. 인간으로 산다는 것.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 이지요.”
암도 스님은 이 시대의 화두 ‘웰빙’을 꺼내 들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분 웰빙 바람은 지금도 전 세계를 휘몰아치고 있다. 웰빙이란 뜻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기엔 역부족이지만 백과사전 식으로 풀이 한다면 ‘육체와 정신적 건강을 조화시켜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삶의 유형과 문화를 일컫는 개념’이다. 그러나 건강, 즉 육체에만 관심 있고 정작 중요한 정신 건강에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고 있는 게 문제다.
효용가치는 따지지도 않고 각종 식품과 전자제품, 헬스상품 등에 ‘웰빙’이란 상표만 붙여 놓으면 무조건 사고보는 심리현상이 이를 방증하고 있지 않은가. 어디 이뿐인가. ‘명품’을 가져야 ‘웰빙족’이라는 이상한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오죽 하면 진정한 웰빙 정신문화를 창출해 보자는 의미의 ‘새로운 웰빙(new-well-being)’ 개념이 나타고 있을까.
“복잡하게 생각할 게 뭐 있어요. 난, ‘잘살이’라 해요.”
간단하면서도 의미가 깊다. 어떤 삶이 잘 사는 것일까! “밥, 물, 공기, 나이 잘 먹고 마시면 됩니다.”
좋은 밥 먹으려 쌀 고르고, 물 한잔 잘 마시려 암반수 찾고, 한 홉 공기라도 잘 마시려 청정기 설치해 놓고 살고 있다. 세 가지 다 한 번에 이루고 싶어 여행도 떠나는 우리 아닌가. 나이 잘 먹는 것 빼고는 별 다를 게 없다. ‘나이 잘 먹는 의미’를 묻자 “서둘지 말고 밥부터 먹자”한다.
“밥은 제 때 먹어야 해요. 언제? 배꼽시계가 울릴 때 적당량으로. 하나는 나오고 하나는 생기지요. 나오는 건 버리고, 생기는 건 잘 간직해야지. 뭡니까?”
나오는 건 뭐기에 버리고, 생기는 건 뭐기에 간직하라는 것일까.
“똥은 나오니 버리고, 기운은 생기니 간직해야지요.”
단순명쾌하다. 밥은 기운 생기라고 먹는 것 아닌가. 그 이상의 의미가 더 있을까? 좋은 쌀 고르기에 앞서 제 때 소식하면 버려야 할 똥은 적고 기운이 샘솟을 것은 자명한 일.
“신선한 물은 먹고 싶을 때마다 드세요. 어머니 물주머니에서 잉태한 우리는 물 좀 많이 마신다 해서 큰 탈 나지 않습니다. 나오는 오줌은 버리고, 생기는 정액은 잘 간직해야지요. 공기도 마음껏 들이켜요. 다만, 호흡법을 좀 공부해 복식호흡이라도 할 줄 알면 금상첨화입니다. 나오는 가스는 버리고, 생기는 정기는 잘 간직해야지요.”
나이야 가만히 있어도 먹는 데 뭘 어찌 잘 먹어야 한단 뜻일까.
“나이 많은 사람일수록 분수에 맞게 살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말 하면 ‘넌 평생 그렇게 살아라’는 뜻으로 오해하는 데 그게 아닙니다. 자신의 직분부터 명확히 챙겨가며 최선을 다하라는 말입니다. 주어진 삶에 대한 부정에 앞서 긍정부터 하라는 겁니다. 그래야 지금의 삶에 만족하면서도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지혜’가 생깁니다. 어른 말씀 한마디에 일생의 지혜가 있다는 말도 있잖아요. 나이 먹고 ‘푼수’되면 곤란합니다. 세월 따라 나는 흰 머리카락은 버리고, 생기는 지혜는 잘 간직해야지요.”
반죽도 틀 따라 국수·빵 갈리듯
인식구조 따라 언행도 천차만별
휴식 속에 웰빙 의미 담겨 있어
마음 바로 볼 때 삶의 가치 높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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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도 스님은 여기에 하나 더 포함되어야 진정한 ‘잘살이’가 완성된다고 한다. 다름 아닌 ‘마음 먹기’다. 본론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게 느껴진다.
“마음을 먹는 순간 생각합니다. 생각하면 말을 하지요. 말을 하면 행동합니다. 마음먹는 순간 언행이 일어난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예부터 좋은 말씨를 심으라 했습니다. 좋은 말씨를 가진 사람이 타인의 가슴에 청정말씨를 심을 수 있으니까요. 그 씨가 행동을 틔우니 곧 ‘선행(善行)’입니다. 좋은 말씨는 세상을 맑게 합니다.”
왜 우리는 좋은 마음을 먹지 못하고 나쁜 마음에 흔들리는 것일까? 아니, 마음을 좋게 먹으려 해도 왜 유독 나쁜 마음의 유혹에 금방 넘어가는 것일까.
“태양이 있습니다. 태양은 빛을 내지요. 빛은 태양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의 본심, 본각은 태양입니다. 이를 일러 진실심, 참 마음이라 해도 좋습니다. 태양은 항상 그대로인데, 우리에게 전해지는 빛은 시시각각 다르지요. 왜 그렇습니까? 환경영향 때문이겠지요. 아침엔 맑았는데 저녁엔 구름이 일어 날이 흐리지요. 점심 땐 바람만 불더니, 오후 늦게는 비가 내립니다. 아침저녁으로 변하다 해서 조석변(朝夕變)이라 하지요.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본심, 참 마음은 변함이 없는데 주위 상황의 반연에 따라 마음이 변한다는 말이다. 이때의 마음, 변화하는 마음, 참 마음에서 파생된 마음이 바로 생각이라는 설명이다.
“생각은 그대로 있지 못합니다. 오만 가지 생각이 찰나에 일었다 사라지지요. 이를 일러 ‘중생심’이라고 합니다. 이 중생심이 작용하면 보고 싶은 것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고, 갖고 싶은 것도 많아집니다. 끝이 없지요. ‘조석변’도 이젠 옛 말이고, 초 단위로 변하니 ‘초초변’이라 하더군요.”
고금을 통한 선지식들은 한결 같이 수행을 통해 본심과 마주하면 청정심을 찾을 수 있다 했다. 하지만 어렵다. 혹, 그 이전에라도 해 볼 수 있는 방안은 없을까?
“생각이라도 바르게 하려는 노력을 해야지요. 올바른 생각을 하려면 의식구조를 잘 갖춰야 합니다. 똑 같은 밀가루 반죽도 국수틀에 들어가면 국수로 나오고, 빵틀에 넣으면 빵으로 나옵니다. 생각이 나오는 것은 마음이지만, 파생된 그 마음도 생각의 틀에 따라 전이될 수 있습니다. 의식구조는 조금만 노력하면 일정부분 고쳐 볼 수 있습니다.”
의식구조의 기본 틀은 어떻게 짜야 할까? 틀에 따라 구조도 달라질 수 있으니 말이다.
“다양한 틀이 있겠지만 저는 주인의식과 나그네 의식 중 주인 의식을 택하라 말하곤 합니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프리(Free)라는 ‘자유’는 ‘자기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의미의 ‘자기유래(自己由來)’를 줄인 말입니다. 스스로 결정 했다면 책임도 자신이 져야함은 당연한 도리입니다.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는 자주적 정신, 즉 주인의식이 강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중심은 ‘나’라는 의식을 갖고 그에 따른 책임까지도 떳떳하게 지는 의식구조가 현대사회에서는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스님은 현재 자신이 어떤 마음을 먹고 있는지 살펴보라 한다. 사람은 ‘휴식’을 취할 때 지혜가 생긴다는 점도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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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하라 하니 또 잠만 자는 것쯤으로 받아들여 선 안 됩니다. 휴식(休息)의 휴는 사람이 나무 옆에 기대 있는 형상입니다. 한 여름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으면 참 시원하지요. 그 하나 만으로도 청량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면 참다운 휴식이 아닙니다. ‘식’을 보세요. 스스로 ‘자(自)’ 아래에 마음 ‘심(心)’이 있지요. 자기의 마음을 들여다보라는 겁니다. 파생된 마음 따라 일어나는 오욕의 생각을 잠시나마 내려놓고 ‘참 마음’을 보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자신의 삶의 가치도 여기서 부가되고, 어떻게 살 것인지의 밑그림도 여기서 시작 합니다.”
암도 스님은 마음의 근본을 찾자는 의미로 ‘심본주의(心本主義)’를 말한다. 물질주의, 개인주의, 이기주의는 물론 민주주의도 넘어 각자의 마음을 바로 보아 좋은 마음먹는 ‘심본’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탁월하다. ‘참 마음’이 수반되지 못한 민주주의나 지성은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 암도 스님이 전하는 심본주의가 바로 이 시대부터 시작해야 할 새로운 패러다임은 아닐런지.
휴식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찾고 부여해 보자. 명예와 재산의 높고 많음을 따지기 전에 반조해 보자. 생(生)의 의미와 길이 보일 듯하다. 스님에게 선시 하나를 부탁드렸다.
“내 맘대로 버들피리 불며, 물 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려하네.”
스님의 선기가 짚게 배인 노래다. 봄볕에 이는 대숲 바람이 청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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