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지혜/암도스님

본 마음은 태양 같아 변치 않거늘(암도스님)

산울림(능인원) 2011. 5. 11. 20:00

우리 주변에는 소리가 많습니다. 소리라는 것이
참 묘한 것인데, 그래서 묘음(妙音)이라고도 합니다.
묘한 소리라는 의미가 아니고, 소리 자체가 묘한 것이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이 묘한 소리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본래 소리는 빛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빛이 파장을
일으키면 소리가 됩니다. 생명체의 근원은 그래서
빛입니다. 스스로의 근본을 알기 위해서는 빛으로 다시
돌아가야 됩니다. 망자를 돌아가셨다 이렇게 표현하는데,
본인이 나왔던 근본으로 돌아갔다 그런 의미입니다.

법회가 열리는 이 절의 이름이 선원사(禪源寺)입니다.
선(禪)은 마음의 고향이니까, 마음의 근원 도량이다
이런 의미이겠는데, 굉장히 뜻이 깊습니다. 주지 스님이
어떻게 인연이 돼서 이런 좋은 도량을 일구게 됐는지
알 수 없지만 참 복이 많은 스님입니다. 다른 사람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려고 해도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이유는 개개인의 복(福)의 차이 때문입니다.
아마도 성원 스님은 전생에 참 많은 복을 지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마음의 변화가 곧 생각


여러분, 그런데 복이 무엇입니까. 복은 행복의 근원입니다.
절에서 축원을 하는데, 이를 다른 말로 축복이라고 합니다.
교회에서도 축복을 말하는데, 다 같습니다. 결국은 복
타령이지요. 복은 또한 좋은 인연입니다. 초년에 부모를
잘 만나면 부모복이 있고, 말년에 자식을 잘 만나면
자식복이 있습니다. 물론 중간에 처를 잘 만나면 처복이
있다 이렇게 말하지요. 남편 잘 만나면 남편복, 돈을
잘 벌면 돈복·재복, 매일 일이 생기면 일복이 많다
그럽니다. 그래서 인생은 복걸복입니다. 원래는
복불복(福不福)인데, 복이 있음과 없음을 뜻합니다.
복은 생활 속에서, 삶 속에서 지어야 합니다. 이렇게
생활 속에서 복을 쌓는 것을 우리는 생활불교라고 합니다.

복 짓는 생활을 위해서는 생각을 잘 가져야 합니다.
한 생각 잘하면 한 평생이 편안하고, 한 생각 잘못하면
한 평생이 망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한 생각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면 생각이란 또 무엇이냐. 이것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은 빛입니다. 우리 본래 마음은 태양과 같아
변하지 않습니다.

요즘 세상살이는 ‘초초변’


누구든지 본심은 태양입니다. 진실심이라고도 그래요.
참 마음입니다. 그러나 참 마음, 즉 태양과 같은 마음이
움직이다 보면 조석변(朝夕變)으로 구름도 끼고,
바람도 불고, 비도 내리고 그러면서 변하게 됩니다.
실제 마음은 그대로 인데 인연 따라 생각이 자꾸 변하는
것입니다. 민심은 조석변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즘은 세상살이가 너무 빨라지다 보니 조석변이
아니라 초초변이라고 하더군요. 생각이 초단위로 변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태양과 같은 본각에서 파생된 이 마음, 항상
변화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생각인데, 생각은 항상 그대로
있지 못합니다. 이 생각 저 생각, 오만가지 생각이 언제나
죽 끓듯합니다. 이런 생각을 다른 말로 중생이라고 합니다.
중생은 생각이 많습니다, 보고 싶은 것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고, 싫은 생각도 많고 어쨌든 생각이 죽 끓듯
하는 것이 중생입니다.

이런 중생심을 없애려면 일념(一念)이 있어야 합니다.
한결같은 마음입니다. 부동심(不動心)이라고나 할까요.
불자라면 알고 계시겠지만 생각은 불교에서 업의 일종으로
봅니다. 말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업(業)입니다.
자세히 설명하면 업은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라고
하는데, 신구의 삼업이 움직이면 바로 동작이 일어납니다.
그로 인해 많은 변화가 생기고 업이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과 말과 행동이 반듯해야 합니다.

생각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의식구조를 잘
갖춰야 합니다. 생각이 나오는 것은 마음이지만, 마음은
의식구조를 통해 생각으로 전이가 됩니다. 밀가루를 빵틀에
넣으면 빵이 나오고, 국수틀에 넣으면 국수가 나오는
이치입니다. 우리 생각도 의식구조에 따라 변합니다.
우리가 주인의식을 가지면 어떻게 됩니까. 반드시 책임의식이
따르게 돼 있습니다. 그러나 나그네 근성, 노예 근성,
거지 근성을 가지게 되면 책임의식은 사라집니다.
무책임해집니다. 의식구조에 따라 하늘과 땅으로 갈라집니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자유는
영어로 프리(Free)라고 하는데, 방종이 아닌
‘자기유래(自己由來)’를 줄인 말입니다. 자기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런 의미지요. 다시 말해 결정도 자기가 하지만
책임도 져야한다 그런 말입니다.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는 자주적인 정신이 강해야 합니다.
이세상 주인은 나다. 이런 투철한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주적인 삶이 필요합니다. 남에게 의지하면
안 됩니다. 성경에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립을 위한 필수조건은 무엇일까요. 힘입니다.
영어로 파워(Power). 개인이고 국가고 힘이 있어야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힘이 없으면 결코 성취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 힘이라는 것이 육체적인 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인 힘이라야 진정한 힘입니다.
영적인 힘은 바른 의식 구조에서 비롯됩니다. 의식구조가
반듯해야 합니다. 의식구조가 바르면 정신 또한 질서가
생기는 것입니다.

정신세계엔 ‘평준화’ 없다


요즘 대통령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함부로 부르고 헐뜯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나라의 국가원수를 그렇게 천박하게
불러서는 안 됩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어른을 공경하지
않습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스승을 존경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기성세대의 책임입니다.
어른들이 대통령을 존경하지 않고 함부로 하는데,
젊은이들이 어디서 예의를 배우겠습니까. 마음에 들지
않아도 예의는 지켜야 합니다. 국가원수를 함부로 욕하는
사람들은 반성을 해야 합니다.

의식 구조를 지배하는 것은 정신세계입니다.
그 정신세계에는 차원이 있습니다. 정신세계는 누구나 갖고
있지만 모두 다릅니다. 또한 평준화가 되지 않습니다.
돈이나 체격은 어느 정도 평준화 시킬 수 있지만
정신세계에 평준화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정신세계를
차원이라고 하지, 수준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수준은 같은 차원에서의 차이를 말합니다.

날뛰는 마음의 고삐 죄어야


불교에서는 정신세계의 차원에 따라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으로 나눕니다. 세상 이치로 예를 든다면
수다원은 지성인입니다. 자기 본분을 아는 사람입니다.
처한 처지를 알고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명확히 구분하는
사람입니다. 사다함은 철인인데, 의지의 인간입니다.
아나함은 현인, 아라한은 성인입니다. 아나함은 율곡 이이
선생 정도의 인격을 갖춘 이가 되겠고, 성인은 전지전능한
분입니다. 모든 것을 안다는 의미에서 전지전능입니다.
주변을 보면 선거 때마다 출마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편하게 살 수 있지만 이 한 몸 남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뜻을 품은 분들입니다. 불교로 말하면 보살인데, 이런
분들이 잘 되도록 도와야 합니다. 자신은 하지도 않으면서
뒤에서 헐뜯고 국론 분열이나 시키는 이런 정신 상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정신세계는 다릅니다. 정신세계의 차원을 높이기
위한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먼저 지혜를 갖춰야 합니다.
지혜는 긍정적 사고에서 비롯됩니다. 부정적 사고는
어두운 그림자만을 양산할 뿐입니다. 정신세계의 차원은
그 사람의 인격의 크기이며, 지혜의 크기이기도 합니다.

주어진 인연을 편견 없이 수용하고 잘 섭수합시다.
좋은 인연을 많이 만들고, 한 생각을 잘 간직해야 합니다.
마음이 생각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잘 관찰하고,
보이는 것에 따라 날뛰지 않도록 고삐를 바짝 죄어야
합니다. 인성을 닦고 정신세계를 키운다면 일상생활
속에서 현인도 성인도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법회에 참석하신 모든 보살님들께서는
바보 온달을 인내와 끈기, 슬기로 위대한 장수로 만들었던
평강공주의 삶을 잘 살펴보시고, 가족과 가정을 꾸려가는
좋은 교훈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정리=김형규 기자

법문은 암도 스님이 강화 선원사 초하루법회에 참석,

‘참다운 불자의 삶’을 주제로 법문하신 내용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