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은 후 고민했습니다.
우주의 진리를 환하게 꿰뚫은 자리에서 무슨 고민을 했을까요?
바로 그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고민이었습니다.
결국 진리를 전하는 것이야 말로 자신이 해야 할 가장 큰 일이란 결론을 내리고
함께 수행한 적이 있는 다섯 비구들을 찾아갑니다.
녹야원에서 그들을 만나 전법(傳法)의 문을 열었습니다. “‘“
그리고 열반에 들기까지 40년 동안 교단을 세워 설법을 하셨습니다.
그 큰 가르침이 팔만 사천의 대장경으로 정리되어 교학을 발전시켜 온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깨달음의 이론만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고 깨달음조차 초월한
절대 진리의 원음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셨는데 이것이 선불교의 길을
열게 했습니다. 그래서 경전은 부처님의 말씀이고 선 수행의 궁극 요체는 부처님의
마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그 궁극 요체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세 번이나
무언의 설법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 하는데 그 삼처전심의
의미를 되새겨 보면 오늘날 우리 인류가 갈망하는 목표와 긴밀하게 부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대중들을 모아 놓고 설법을 하시는 자리를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하는데,
어느 때 부처님은 이 자리에서 대중들을 향해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보였습니다.
아무 말 없이 꽃을 들어 보였는데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가섭존자가 그 뜻을 알고 빙그레 웃었습니다. 가섭존자만이 부처님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부처님은 왜 말 없이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였을까요? 들고 싶으니까
들었죠(청중들 박장대소).
그건 부처님 자유입니다. 꽃을 들건 돌을 들건 그건 부처님 자유입니다.
그리고 가섭은 왜 빙그레 웃었을까요? 그것도 가섭의 자유입니다.
얼굴을 찡그리거나 엉엉 울거나 가섭의 자유입니다. 꽃을 든 것은 부처님의 자유요
미소를 지은 것은 가섭의 자유이니 그 두 분의 자유 앞에서 무슨 긴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말이 없는 곳에서 말이 없는 것을 전하니 그 뜻을 어떻게 말로 지껄여 댈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내가 여기서 여러분들을 향해 말을 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무엇을 헤아려 알 수 있겠습니까?
꽃을 든 소식도 미소 지은 소식도 중생심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들은 말로 헤아려
마음으로 알아야 할 뿐입니다. 나는 그 소식이 바로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만물의 생명은 절대 자유이니 부처님은 그 소식을 전하고자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신 것입니다.
자유가 뭔지 누가 말씀해 보세요. 자유스럽게.
자유란 글자를 풀이해 보면 자기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란 말도 있고 자작자수(自作自受)란 말도 있는데 들어 봤을 겁니다.
자기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자유이기에 자유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혼탁한 것은 바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저지르는 일은 많은데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아서 세상이 어지러워지는 겁니다.
진정한 자유의 삶을 위해서 우리는 우선 자주(自主)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스스로 주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은 이 세상에서 주인이라는 확신을 갖고
살아야 행복해 집니다.
스스로 조연이나 엑스트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늘 옹졸하고 비굴하고 초라하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 인생은 자신만 책임지는 것입니다. 스스로 주인의식을 갖고 무슨 일을 해도
지극한 마음으로 하고 그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자조(自助)적으로 사는 자세도 필요합니다. 자신을 돕는 것도 자신뿐입니다.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결실도 없습니다. 또 자립(自立)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남에게 의지하기를 좋아 하는 사람은 작은 일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이 진리를 깨달아 성불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이렇게 자유를 추구하는 우리들 삶의 목표는 바로 해탈입니다. 해탈은 탈탈 털어내
버리는 것입니다. 무엇을 털어내느냐. 바로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을 털어내고
자유로워지라는 겁니다. 그 자유를 찾기 위해 선가(禪家)에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말까지 합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붙어 있는 집착의
흔적들을 탈탈 털어내라는 겁니다.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이는 가풍으로 추구하는 자유,
이것이야 말로 인류를 영원히 자유롭게 하는 큰 자유가 아니겠습니까?
부처님이 다자탑 앞에서 제자들을 모아 놓고 설법을 하는데 지각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꽃을 든 소식을 알아 차렸다고 앞에서 얘기한 가섭존자입니다.
늦게 도착하여 어색하게 앉을 자리를 찾고 있을 때, 부처님이 가섭을 앞으로 불러 자신이
앉은 자리에 함께 앉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자리를 나누어 앉았다고 하는 행위가 부처님이
마음을 드러낸 두 번 째 사건이 됩니다. 스승과 제자가 그것도 다른 제자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함께 방석을 깔고 앉는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께서는 가섭과 자리를 나눠 앉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러분 중에 그 뜻을 아신다면 지금 이 단상으로 올라와 저와 함께 앉아도 될 것입니다.
올라오시는 분이 아무도 없군요. 오늘 법사 자리를 빼앗길까 염려 했더니(청중들 다시 박장대소)…
평등, 절대 평등입니다. 스승과 제자가 한 자리에 앉을 수 있음은 바로 일체중생의
평등을 의미하는 겁니다.
조선시대의 걸승(傑僧) 함허득통 선사는 “평등한 불성 가운데는 피차가 없다”고 했습니다.
일체중생은 모두가 평등하게 불성을 지닌 존엄한 존재입니다.
이 세상이 싸움통이 되는 것은 바로 평등의 원리를 모르고 평등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평등과 균등의 지혜를 거부하면 욕심이 발동하여 심통이 틀어지고 심통이 틀어지면
쌍통(얼굴)도 일그러져 마침내 한 판 붙어 버리는 것이니, 그 한 판의 싸움이
이 세상을 얼마나 어지럽게 하는지 지금 여러분들은 신문과 방송을 통해 잘 보고 계십니다.
부처님께서는 나무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성도 후 40년 동안 길에서만 생활 하시다가,
쿠시나가라 들판의 나무 아래서 육신을 벗으시고 영원한 법신이 되셨습니다.
그 나무를 사라수라 하는데 두 그루가 함께 서 있어 사라쌍수라 합니다.
입적에 드신 부처님 앞에서는 많은 제자들이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울었습니다.
그 자리에도 지각생이 있었습니다. 또 가섭존자였습니다.
그는 다른 지역에서 전법을 하다가 부처님 열반소식을 듣고 달려 왔는데
이미 부처님은 관 속에 모신 뒤였습니다. 가섭이 절을 하고 관을 세 바퀴 돌았습니다.
그때 관에서 부처님의 두 발이 쑥 나왔습니다. 이것은 무슨 소식입니까? 평화의 소식입니다.
죽음의 공포로부터 초월하고 생과 사의 윤회로부터 초월하여 자신과 일체중생이 다
평화의 들판에 노니는 지고한 존재임을 알리는 소식입니다. 평화는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홀로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거시적으로 생각해야합니다.
일체 중생이 죽음마저 뛰어 넘는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일체중생이 합심을 해야 합니다.
그 합심의 구심점은 바로 꽃을 들어 보인 뜻과 자리를 나눠 앉은 뜻,
그리고 관 속에서 두 발을 내밀어 보인 뜻입니다.
집착하는 마음에서 생겨나는 탐심을 버리고 스스로 주인이 되어,
지혜로운 마음을 가지고 부처님께서 세 곳에서 전하신 그 진리의 요체를 생각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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