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력과 회향의 자비보시
자장(慈藏)스님은 신라 선덕왕대(632-646)에 불교계를 대표하였다.
자장스님은 당시의 사람들이 불교를 믿는 마음으로 행복하기를 염원했다.
또한 불교의 신심이 개인의 행복뿐 아니라 국민 모두의 희망이 되기를 기대하였다.
그래서 자장스님은 경상도의 통도사와 강원도의 월정사를 비롯하여
전국에 많은 사찰을 건립하는 불사를 이루었다.
자장스님이 창건한 사찰은 오늘날에도 우리나라의 여러 지역에서
잘 수호되고 있는 곳이 적지 않다.
이렇게 많은 사찰을 창건한 것은 국민들이 불안한 고통을 소멸하고
기쁨을 이루는 복 밭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자장스님은 여러 사찰에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하였다.
진신사리는 탑(塔)을 조성하여 모시기도 했고
탑을 세우지 않고 자연지역에 표시 없이 모시기도 했다.
진신사리를 모신 대표적인 불탑(佛塔)으로는 유명한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이 있다.
불탑이 아닌 형태로 모신 곳은 통도사와 강원도에 네 곳이 있다.
이처럼 특별한 불탑의 도량을 한국불교의 ‘오대적멸보궁(五大寂滅寶宮)’ 이라 한다.
통도사 대웅전에는 ‘적멸보궁’이란 현판과 함께 다음의 게송을 기둥에 걸었다.
“부처님! 만대의 법왕이시고 법주이신 부처님!, 오래 전에 인도에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오늘의 중생들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끊임없이 예경을 올립니다.”
이 게송은 자장스님께서 친히 지은 것으로
강원도 정선군 태백산 정암사의 기록에 전한다.
자장스님의 부처님 진신사리 신앙에 대한 정신을 이해할 수 있다.
『삼국유사』권4의 기록에 의하면 자장스님은 김씨이고 왕족인 진골의 출신이다.
부모가 독실한 불교신앙으로 관세음보살님께 기도하여 자장스님을 얻었다.
어머니가 별이 떨어져서 몸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출산했다.
생일도 부처님 생일과 같은 4월 초파일이었다.
자장스님은 어릴 때부터 세속에 집착하는 생각이 없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자신의 전원에 원녕사(元寧寺)를 짓고 수행에 힘썼다.
자장스님의 관법(觀法)수행은 유명하다.
자장스님은 계율실천에도 모범을 보였다.
자장스님의 “나는 계율을 실행하다가 하루 만에 죽더라도,
계율을 버리고 백 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는 법어는 불교계에 널리 알려졌다.
자장스님은 분황사에 머물면서 궁중에서 대승불교의 경론을 강설했고
황룡사에서도 계율의 설법을 하였다.
통도사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계단(戒壇)을 쌓고
사방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계법을 가르쳤다.
이러한 자장스님의 원력으로 90%에 이르는 대다수의 국민이
부처님을 신봉하고 계법을 받았다.
당시의 국민은 불교에서 희망을 찾았다.
고난을 극복하고 행복을 얻는 길이 불교에 있다고 믿었다.
자장스님 당시에도 빈곤과 질병의 고통을 겪으며 죽음과 이별의 슬픔으로 괴로워했다.
자장스님은 고통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등불이 되고 희망이 되었다.
월명(月明)스님의 제망매가(祭亡妹歌)를 생각하게 된다.
“나고 죽는 윤회의 길은 이승에서 사는 것이 두렵습니다.
나는 간다는 말도 못하고 어찌 그리 갑니까.
어느 가을바람에 여기 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한 가지에 나서 가는 곳도 모르는 곳으로 갔습니다.
아!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서 누이를 만나기 위해 나는 도를 닦으며 기다리겠습니다.”
이것은 월명스님이 죽은 누이를 위해 재를 올리고 제문으로 지은 향가이다.
여기서도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겪는 괴로움을 볼 수 있다.
자장스님은 신앙에 있어서도 특별한 사례를 보였다.
자장스님의 원불(願佛)은 문수보살이다.
원불이란 불보살님 중에서 어느 한 분을 항상 가까이 모시는 것을 뜻한다.
자장스님은 636년에 중국의 청량산에 가서 기도하여
문수보살님을 친견(親見)하고
“일체의 만법이 홀로 이루어짐이 없음을 알아라.
이렇게 우주만물의 진실상을 깨달으면 바로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이다.
(了知一切法 自性無所有 如是解法性 卽見盧舍那)” 라는
[화엄경]의 가르침과 함께 부처님의 사리와 가사, 발우를 받았다.
문수보살님의 가피를 입고 국내로 돌아와서
범국가적으로 추진하는 불사를 인도하였다.
만년에는 강릉군에 수다사(水多寺)를 짓고 머물렀는데
중국에서 친견했던 문수보살님을 다시 친견했다.
문수보살님께 가르침을 청하니 태백산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고는 보이지 않았다.
태백산에 가서 지금의 정암사(淨岩寺)를 창건하고 문수보살님이 강림하기를 기다렸다.
어느 날 나이 많은 거사 한 사람이 남루한 옷차림으로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 메고 와서 시자(侍者)에게
“자장을 보러 왔다.”고 했다.
시자는 말이 무례함을 질책하고 자장스님에게 알렸다.
자장스님도 거사를 만나지 않았다.
그러자 거사는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아집이 있는 이가 어찌 나를 볼 수 있으랴.” 하고
삼태기를 거꾸로 드니 개는 사자로 변했다.
거사는 사자에 올라앉아 빛을 뿜으며 가버렸다.
자장스님은 빛을 쫓아서 뒤따랐으나 이미 빛이 사라져서 만날 수 없었다.
자장스님은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자장스님의 문수보살신앙은 불교사에서 사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특별하다.
문수보살의 가피에 의해서 불사를 성취하고 여러 차례 친견했다.
그렇지만 마지막에는 만나지 못했다.
늙고 볼품없는 모습이 문수보살임을 몰랐다.
격식과 예우에 관습화된 아집이 무아의 지혜를 인격으로 하는
문수보살을 만날 수 없게 했다.
자장스님은 바로 열반에 들었다.
자장스님의 열반은 절실한 참회이고
걸인과 노인을 통해서도 문수보살을 만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충격과 감동을 준 마지막 회향의 자비행이기도 하다.
자비는 해탈의 사랑이며, 원력의 사랑이고, 지혜의 사랑이다.
이런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자비보시이다.
자비보시는 사람들을 지혜롭게 하고 평화롭게 하며 풍요롭게 한다.
- 종범 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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