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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불교신행의 포교방안(간화선 포교)

산울림(능인원) 2011. 11. 24. 23:21

불교신행의 포교방향(간화선의 포교)

                                                   [대한불교조계종 교육, 신행전문포교사 월주 김창엽]


(1) 들어가는 말

(2) 발제 내용

    첫째, 간화선의 이론적 배경을 인식하고자 하는 노력 

    둘째, 간화선의 실천적 의미가 가지는 중요성

    셋째, 간화선 알리기와 포교방법론적 입장의 정립

    넷째, 간화선을 현실에 적용시키기 위해 나부터 포교하는 선포교사

    다섯째, “명상”과 “간화선”에 대한 올바른 인식

    여섯째, 간화선의 실천수행은 정말로 어려운가?


(3) 발제의 맺는 말

    오늘날 간화선 실천을 위한 문제점은 철저한 發心의 不在이다.


- 간화선 수행과 실천의 도움 자료-

   (1) ‘간화선 수행의 현실진단과 개선방향’(선원수좌회 학술위원장 월암스님)

   (2) ‘간화선의 사회적 역할’(부산대, 조명제박사)

   (3) 조사선의 의미와 흐름

   (4) 한국의 간화선의 전래

   (5) 간화선의 본질

   (6) 간화선이 최상승법인 이유는 이렇다.

   (7) 간화선에서의 “중도, 연기, 무아, 공” 의 도리

   (8) 간화선에서 경전(經典)의 중요성

   (9) 간화선 수행과 계행

  (10) 화두참구를 위한 발심은 이렇게 한다.

  (11) 생활선(生活禪)으로서의 일행삼매(一行三昧)와 오온(五蘊)의 관계

  (12) 간화선으로 본 “불교의 선”과 “기독교의 믿음”을 비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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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大韓佛敎曹溪宗 布敎師들의 포교방향이 그 동안 많은 영역에서 불교적 실천을 충실히 추구하여 현재의 거대한 조직으로 발전해 온 사실에 크게 기여했다고 모두 믿고 있습니다.

항상 그러하듯이 큰 물줄기만 보고 있으면 어느새 작은 실 구멍으로 내어나가는 미세한 물줄기는 소홀히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새어나가는 작은 물줄기를 소홀히 하면 나중에는 큰 물줄기로 변하여 가히 잡을 수 없는 역경에 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역사적 교훈으로도 인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포교의 활동을 외부지향적인 면과 내부지향적인 면으로 나누어 본다면 본 포교사단의 활동은 사찰문화해설, 사회복지후원, 지역봉사활동 등의 외부지향적으로 편중된 것도 사실입니다.

이제는 그러한 외부지향적 활동을 실천하기 위한 내실을 기해야하는 시기가 왔다는 자체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음도 매우 고무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시점에 맞추어 포교사대학원 동문회에서는 신행연구팀의 활동의 일환으로 첫 졸업식을 맞아 대안과 더불어 자자와 포살을 하는 기회로 삼고자 발제합니다.

신행활동팀의 주요활동은 간화선 보급을 첫째로 삼아야함은 宗團의 宗旨로 보더라도 명백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내면적인 활동의 필요성은 다시 언급할 필요 없이 모두 공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는 외부지향적인 포교의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한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포교사들에게 내부지향적이며 적극적인 간화선 활동정책이 중앙단 차원에서 절실히 요구된다고 판단합니다.

여러 가지 신행활동 분야 가운데 대중들의 접근이 용이한 看經, 念佛, 절, 명상 등의 수행으로부터 올바른 간화선을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일이 시급하다.

여기서 간화선의 종류를 성격에 따라 구분지어 보고자 한다.

중국의 능가종 이후 선종은 28대 달마대사를 初祖로 한다

   달마스님 ⇒ 혜가 ⇒ 승찬 ⇒ 도신 ⇒ 홍인 ⇒ 혜능 으로 이어지는데

                                       홍인스님으로 부터

                                           → 북종선의 신수

                                           → 남종선의 혜능

                                                 → 남악, 회양

                                                 → 청원, 행사 으로 이어진다.

참선의 분류과정을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본다.

① 수행자의 마음가짐에 따른 분류

   외도선(外道禪) : 天上

   범부선(凡夫禪) : 健康, 災厄消滅

   소승선(小乘禪, 灌法禪) : 위빠사나(五停心觀의 身受心法),  無我, 無想, 不淨觀

   대승선(大乘禪) : 空, 中道, 實相, 眞을 觀함

   최상승선(最上乘禪) : 如來淸淨禪, 祖師禪, 看話禪, 格外禪, 公案禪

② 깨침의 정도에 따른 분류

   의리선(義理禪) : 經典, 敎理理論

   여래선(如來禪) : 五種禪

   조사선(祖師禪) : 달마대사 이후

③ 수행방법에 따른 분류

   간화선(看話線) : 대혜 종고선사 이후

   묵조선(黙照禪) : 굉지 정각선사


지난번 축서사의 연수에서 선원장 무여스님이 포교사들에게 지적하신 말씀 중에 “포교사들은 남을 포교하기에 앞서 자신을 먼저 포교하고 또한 간화선을 통해 중생심으로 찌든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야 하고, 나아가서는 간화선을 통해서 남의 인생까지도 바꿀 수 있는 역량을 키우지 않고는 진정한 포교사라고 할 수 없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우리 포교사들은 그 동안 공부한 경전 말씀을 힘으로 부처님 마음과 닮아가는 간화선 수행으로 진정한 행복의 전달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마치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서 “달을 보아라.” 라고 하면 달을 볼 수 있는 부처님 마음이 되어야지, 부처님말씀의 알음알이만 가지고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는 아상에 사로 잡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우리 포교사들은 경전과 더불어 佛法을 이어오신 역대 祖師스님들의 語錄공부에 보다 더욱 힘을 쏟아야 할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중앙포교사단에서도 포교사들에게 간화선 공부를 위하여 善知識의 지도를 받고 자신을 점검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 주어야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간화선은 산속에서만 수행하는 坐禪의 “思索의 禪”만이 아니라 대중의 삶 속에 파고들어서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일” 을 “공(空)의 실현”을 근간으로 “반야의 지혜”를 체득하는 “生活의 禪”으로 바꾸어 가는 시대의 흐름을 이어가야 한다고 판단합니다.

즉, 대중들의 삶이 숨쉬고 있는 생활현장 속에서 이룰 수 있는 “生活의 禪”을 펼치므로서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黙動靜)” 에서도 할 수 있는 禪으로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간화선은 ‘이뭣꼬’(이것이 무엇인가) 등등의 선사가 던져준 話頭를 일심으로 의심해 들어감으로써 자신의 근본 성품을 깨닫는 조계종의 주요 수행법이다.

그러나 간화선은 일반인들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현재까지 우리나라 불교계의 대표종단인 조계종의 주요수행법이라 할 수 있는 간화선이 지금 우리 사회나 불교계에 다소 영향력이 있는 지식층과 지도층에서 인식되어지고 있는 현상에 대해 매우 희망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간화선의 알리기와 포교는 모든 포교사님들이 함께 관심을 기울여서 실천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판단됩니다.

따라서 포교사 여러분들과 함께 간화선 알리기와 포교에 대해서 함께 생각하는 발제의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간화선 포교의 방향과 사회적 역할’을 주제로 발제하면서 간화선이 현재의 포교사단에서 어떠한 역할로 수용되고 있으며, 그 동안 간화선의 포교와 수행에 대하여 다수의 포교사들은 사실상 방관자적 자세로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시점을 계기로 간화선 포교와 수행에 대해서 중앙포교사단 내에 새로운 제도적 수행체계와 교육과정을 구축해 놓는 일이야말로 매우 의미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비판적 사실은 포교사단의 출범 이후 “지금, 여기에서, 포교사단의 일”로서 받아 들여져야 하며, 이 시대의 불교적 삶의 행복을 전달해주는 전달자로서의 포교사가 되어야 함은 명백한 책무이다.

우리나라에 알려진 간화선은 조계종이 추구하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최상승의 수행법으로, 중국 남송 때 선사인 대혜종고스님(1089∼1163)이 제창했다.

하나의 화두(話頭)를 가지고 끊임없이 의심을 일으켜 결국 자신의 본래 성품자리(부처)를 바로 보는 禪法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안거(安居)’ 전통이 남아 있는 한국의 禪房에서 수행자들이 바로 간화선을 하고 있다.

수행자들이 안거 때 화두를 들고 3개월씩 좌선에 들면 몸이 절단 날 정도이다.

‘이뭣꼬’ ‘마른 똥막대기’ ‘뜰 앞의 잣나무’…, 모두 옛 禪師들의 문답 속에 나오는 화두들. 요즘 수행자들은 과연 어떤 화두들을 껴안고 좌선엘 들어갈까?

“대혜 종고스님은 문자에 얽매이는 문자선과 침묵에 침잠하는 묵조선, 유학자들의 학문적 병폐 등을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간화선을 제시했다.

“당시 간화선은 최고 지식층인 사대부가에 널리 퍼지면서 승속의 구별 없는 禪으로 구현됐으며 깨달음과 현실 참여를 동시에 수행하는 빼어난 禪法으로 자리매김했다”고 알려져 있다.

“대혜 종고스님은 자기 내부로만 수렴하는 공부는 지양해야 하고 실천을 중시했다”며 “실천 내용은 충의, 백성을 다스림, 나라를 안정시킴과 같은 유학덕목을 포함하고 있다”고 밝혔다.

간화선은 중국 남송 시대 현실 참여파들이 사대부를 대상으로 펼쳤던 반면에, 오늘날엔 현실을 떠나서 초월적인 깨달음 지상주의의 세계만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볼 때, 초월적인 깨달음 지상주의는 분명히 간화선의 발전에 큰 장애요인이다.


참고로 고봉 원묘선사께서 제시하신 “선요(禪要)”에서 화두공부인은 아래의 삼요(三要)로서 대신심(大信心), 대분심(大憤心), 대의심(大疑心)을 소개한다.


① 대신심(大信心)으로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다.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實有佛性)을 표현하는 큰 믿음이다.

이 믿음은 화두공부를 하면 반드시 一大事를 깨칠 수 있다는 견고한 믿음이며, 과거에 배웠거나 이해한 법에 대한 집착의 알음알이를 잠시 거두고 자신에게 미세하게 작용하고 있는 망념과 生死心을 쉬고자 하는 간절함을 표현한 것이다.

부처님의 마음은 허공처럼 영겁토록 변하지 않고 절대로 손상되지 않으며, 어떠한 현상에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록 지혜가 없어서 순간적으로 어리석음에 빠져서 비참한 상황에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본성은 일찍이 때가 묻지 않고, 맑고 밝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나 자신은 본래부터 원만 구족한 진리의 주인공을 뜻하는 말이다.

이러한 자기본성에 대한 확신에서 간화선 수행자의 기본적인 자세가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은 진리의 주체이기 때문에 어떤 고난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용맹심을 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언제나 衆生界와 佛世界를 나와 더불어 한 몸으로 생각한다.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을 지닌 “생명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기독교의 절대유일신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一大事의 선언적 의미를 지닌 사실을 굳게 믿어야한다는 것이다.


② 대분심(大憤心)으로서 지금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나는 과거의 祖師스님들과 무엇이 다르기에 나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는가?

그러면서도 스스로 자만하고 어리석음이 끝이 없어 부끄러움도 모르고 앞과 뒤가 바뀐 현실에 매달려 있으니, 참으로 딱하고 슬픈 노릇이라는 말이다.

영원한 생명이 나 자신에게 있어서 조금도 덜하지 않고 내 안에서 생생하게 고동치고 있다.

나는 이것을 보지 못하고 미혹하여 눈앞의 이익과 달콤한 경계에 탐착하여 헐떡거리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자신의 안에 본래 부처이건만 스스로를 중생으로 여겨서 중생노릇을 달게 받으며 무시겁 동안 살아온 것이다.

어찌 내 마음속의 찬란한 태양을 가리고 밖을 향해 어둠 속을 헤매고 있단 말인가?

나는 지금까지 나의 몸뚱이가 하자는 대로 해왔다.

혀끝에 길들여져서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부질없는 욕심을 채우고자 갖고 싶으면 그 무엇이든지 소유하려고 했다.

또 나의 이익과 명예를 위해 나와 남을 가르고, 시비분별을 일삼으며, 서로 상처를 주고 받아왔다. 이렇게 우리는 본래면목을 잊고 착각에 빠져서 욕심내고 어리석게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다행히 禪修行의 길에 접어들어 번뇌와 어리석음을 바로 보아 대자유인으로 살아갈 一大事 인연을 만나게 되었다.

이 화두공부야말로 나의 어두웠던 과거의 생과 현재의 무지를 끊는 吹毛劒과 같은 것이다.

화두를 통하여 기나긴 고통의 늪에서 벗어나서 쾌활한 해탈의 언덕에 이를 수 있는 지름길이다.

참선수행자는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 이렇게 자책감으로 치밀어 오르는 대분심이 울컥울컥 솟아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大憤心을 일으켜서 몸이 하자는 대로 하는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 見性의 길에 이르고야 말겠다는 마음이 끊임없이 솟구쳐 올라야 한다.

이 분한 마음으로 마치 부모를 죽인 원수를 만나 단칼에 두 동강 내듯이 화두를 타파해야한다. 수행자는 이 같은 대분심으로 억겁의 무명을 꿰뚫고 온갖 분별의 함정을 단번에 벗어난 대자유의 평원으로 뛰어 나아가야 한다.


③ 대의심(大疑心)으로 화두를 놓치지 말고 끊임없이 지녀야 한다.

큰 의심이란 화두를 철두철미하게 의심하는 것이다.

화두는 생각의 길이 끊어진 본래면목이기에 망념과 무명에 바탕한 중생의 분별심으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화두는 어떤 방법으로도 가히 잡아볼 수도 없고, 형용할 수도 없다.

없는 것으로도 알 수 없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없으며, 잡을 수도 없고, 놓을 수도 없는 것이니, 간화선 수행자는 이쯤에 이르러서는 전심전력을 기울여 정면승부를 할 수 밖에 없다.

화두수행에서 의심한다 함은 바로 이런 때의 마음상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부처님과 祖師님들께서는 法을 화두라는 형태로 우리의 눈앞에 명백히 보여 주었다.

이렇듯이 佛祖께서는 나에게 있는 본래 물건을 눈앞에서 밝게 보여주고 있는데 나는 어찌하여 보지 못한다는 말인가?

분명히 나에게 있는 이 도리를 명백히 화두로서 밝혀주었거늘 어찌하여 이것을 모른다는 말인가?

이렇게 하여 큰 의심이 솟아나면 온 몸과 온 생각이 하나의 화두덩어리로 바뀌게 된다. 화두로 눕고, 화두로 잠들게 되면 필경은 “이것이 무슨 도리냐?” 라고 하는 일념이 끊이지 않게 되어, 맑고 고요하고 뚜렷한 의심이 눈앞에 드러난다.

이렇게 지어 가는데 힘을 얻게 되면 드디어 수행의 좋은 시절인연이 도래하게 되는 것이다. 즉, 간절하게 의심해야 한다.

이 말은 의심하는 “나” 가 사라진 그 자리에서 폭발하는 근원적인 의심이다.

이러한 대의(大意)가 기연(起緣)을 만나 마침내 그 대의가 타파될 때에 수행자는 한바탕 크게 죽어서 하늘과 땅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서 “대사일번건곤신(大死一番乾坤新) 사중득활(死中得活)”이라 하여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앞뒤가 꽉 막힌 상황에서 크게 죽어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것이다.


(2) 발제 내용

간화선의 포교와 수행을 발전시키기 위한 수용자세에 대하여 포교사로서 실천해야 할 과제를 주제로 다음과 같이 발제하여, 토론의 장을 갖고자 합니다.


첫째, 간화선의 이론적 배경을 인식하고자 하는 우리들의 노력이 부족했다는 점입니다.

간화선은 서로가 공유할 수 있는 수많은 祖師語錄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주관적 해석은 매우 자유로울 수 있다.

思想은 사회적 현상과 전혀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적 현상을 통하여 그 사상에 대한 접근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간화선은 이러한 사상체계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하기에 포교사들이 우선 임해야 할 禪宗史적 의미와 함께 祖師語錄의 접근이 무엇보다도 강조되고 있는 이유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간화선은 처음부터 사상체계로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서는 지금 현재 포교사들의 수행현장의 일선에서도 분명한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기보다는 현재 개별적 진행형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간화선을 수행방법론적 측면에서 벗어나 논하고자 밝히고서 누구나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일정한 사상체계의 제시 없이 말한다면 그 기준을 세울 수 없어 서로가 타협하고 합의를 이끌어나가야 할 방향을 잃게 될 것이다.

이 점이 포교사단에서 제시해야 할 당면한 가장 큰 과제라고 생각되기에 포교사들 간화선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중앙포교사단의 힘이 집중되어야한다.


둘째, 간화선의 실천적 의미가 가지는 중요성에 대한 주장입니다.

간화선은 현실참여를 지극히 주장하고 있는 적극적 실천수행으로서 과거 중국의 남종돈교에서도 분명히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내용으로 부각되어왔다.

문제제기와 간화선에 대한 비판이 난무하고 뿐만 아니라 간화선이 삶에서 차지하는 역할에 대한 식견을 높이고 더욱이 간화선 그 자체의 근본정신에 입각한 “空의 實現”을 위해서 “中道, 緣起, 無我, 空”의 실천적 자세가 실참으로 지속되기를 강조하고자 한다.

특히 간화선의 출발인 信心과 發心은 알음알이와 더불어 모든 경계의 대상을 벗어내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러한 시도가 문제제기로써 그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간화선을 살려서 새롭게 하자는 의도는 아니다.

본래의 간화선의 면목을 지켜서 포교사단의 수행과제로 부각시키자는 취지로 수행과 포교를 주창하는 이 시점이 가히 큰 의미 있는 자리라고 생각됩니다.


셋째, 간화선 알리기와 포교방법론적 입장이 정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간화선을 승가와 포교사의 특정 집단의 성격에 맞추어 논의한다면 이와 같은 관점은 간화선의 포교를 위한 사회화나 대중화와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우선 간화선의 포교라는 것은 특정 집단이나 신분에 국한된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고 일반신도와 非佛子의 측면에서 인간의 보편적인 심성에서부터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지금 여기에서 나 자신의 일을 온전히 함으로서 간화선이 보편적인 인간의 심성과 삶에 미치는 영향을 토대로 사회적 현상 속에서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인지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변화는 어디까지나 개개의 인간과 그들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관점도 존중해야 한다.

만약 그것을 부정한다면 불교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고 또한 간화선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간화선의 사회화에 대하여 논의하는 것은 한 인간의 변화가 사회의 변혁을 가져온다는 포교의 중심이기 때문에  한 인간의 변화를 무시하고서 사회의 변화를 논한다면 그것은 포교를 근거로 논할 일이 아니라 다른 학문분야에서 논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간화선의 포교에 대한 논의는 간화선 그 자체에서 포교적인 방법을 찾을 것이 아니라 간화선의 실참을 통하여 어떻게 대중을 포교할 것인지를 궁리해야 할 것이다.


넷째, 선불교가 현실에 적용되려면 나부터 포교하는 선포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이치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간화선은 엄연히 한국불교계에서 현재진행중입니다.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이미 사실에 근거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뢰성을 갖기 어렵다.

현재진행 중인 사실에 대한 반성을 통하여 새롭게 해석하지 않는 한 그것은 왜곡된 주장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간화선은 무엇보다 명확하게 사회적 현상을 꿰뚫을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한다.

간화선은 막힌 곳에서 활로를 찾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해결되지 못하는 사회적 문제들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방법들을 제공할 수 있으며, 이로써 사회와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은 충분히 있다.

대혜 종고스님이 중국 송나라의 사대부들에게 간화선 공부의 요체를 대답해 준 편지글인 ‘서장(書狀)’에서 잘 보여주듯이 선불교는 지금 여기에서 나 자신의 일을 최선을 다해서 실천하는 가장 훌륭한 가르침의 방법이라고 확신할 수 있겠다.

따라서 간화선은 중국 북종선의 “思索의 禪”이 아니라 남종돈교의 “生活의 禪”으로 인식되어져야 한다.

간화선은 오히려 몸은 같은 몸이지만 옛 옷을 벗어 버리고 지금의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간화선의 사회화, 대중화를 위해 포교해야하는 인간의 최고 행복추구의 길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간화선의 알리기와 포교가 불교발전의 핵심임을 다시 한번 확신해서 노력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다섯째, “명상”과 “간화선”에 대한 정확한 인식의 정의가 필요하다.

두 갈래 수행법에서 자칫 혼돈된 수행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있기에 여기에서 명상과 간화선의 구분을 지어보고자 한다.

명상을 시작하는 초심자는 대개 의식이 산만해 있다.

바쁘고 경쟁이 심한 현대생활을 영위해가는 가운데 첨단화된 물질문명 속에 자신의 의식을 빼앗기기 때문에 항상 마음이 산란해 있는 것 이다.

바깥세계에 대한 관심과 지식은 한없이 요구되고 있으나 자기 내면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한 채 자기가 누구인가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그저 거대한 사회적 흐름에 떠밀려가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생활리듬이 깨지고 인간관계의 어려움에 부딪치게 되어 몸과 마음이 아프기 시작한다.

잠시 육체의 건강을 위해 대책도 세워 실천해보지만 마음의 공허함은 일시적이며, 조작적인 대책으로는 개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정신적인 질환이 점점 더욱 증가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이러한 문제의 근본적 치료를 위해서 지금까지 내버려두었던 내면을 다시 살피고 가꾸어야한다.

그 시작은 마치 깨진 거울같이 흐트러져 있는 의식을 바로 고르는 데에서 출발해야한다.

이것을 간화선에서는 우선 “만법귀일(萬法歸一)”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먼저 萬法歸一이 되어야 즉, 의식이 정리되어 하나로 모아져야 비로소 그 하나가 끊어지면서 돌아가는 곳이 실감되어, 소위 말하는 “화두의심”이 일어나게 된다.

萬法歸一 하지 않고 一歸何處로 가는 길은 무모한 일이다.

그러나 중생심은 육단심이 작용하여, 萬法歸一 하지 않고 一歸何處로 가고자 하는 욕망이 앞선다.

따라서 대근기가 아니고서는 이러한 화두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고 한다.

명상은 만법귀일(萬法歸一)공부라고 할 수 있으며,

간화선은 만법귀일(萬法歸一)하고 화두로서 일귀하처(一歸何處)까지 가는 공부이다.

아무리 간화선이 질러가는 지름길 공부(俓截門)이라고 하지만 근기에 따라야 한다.

그 기초는 먼저 자신의 깨진 의식부터 하나로 모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중생심을 둘러쓴 채로 공부를 이루고자 하기 때문에 열심히 하면 할수록 중생심만 더욱 치성하게 된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더욱 뒤로 후퇴하기 때문에 진전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자기가 중생심을 둘러쓰고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하고 중생심 그 자체를 쉬어주어야 한다.

완전한 쉼은 쉬려는 마음 그 자체마저도 쉬어주는 것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헐떡이는 중생심이 가라앉아야 한다.

따라서 초심자는 마음을 정리하고 행동주체로 작용하는 그 자체를 내려놓을 줄 알아야한다.

이것을 위해 간화선에서는 온전한 善知識을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도 값진 일이다.

마치 명상에서 좋은 명상법을 만나는 것이 중요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여섯째, 간화선의 실천수행은 정말로 어려운가?

① 간화선 왜 어려운가?

생각으로 생각을 없애고, 번뇌로 번뇌를 없애려 하기 때문이다.

생각이나 번뇌 같은 중생심으로 뭘 하려 해선 안 된다.

생각으로 생각을 그치게 할 수 없다.

생각으로 풀려고 하니 머리가 아프고 上氣(기가 위로 오름)가 되는 것이다.

번뇌는 제거하려 하지 말고 내버려 둔다. 번뇌는 살아 있다는 증거다.

대신 성품, 즉 부처가 내게 ‘이미 있다’는 것을 믿어라.

그동안 배운 것들이 그 마음(性品)을 가려버렸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 마음을 깨닫기 위해 참선하는 것이다.

(더 얻을 필요 없이) ‘내게 이미 그 마음(부처)가 있다’는 믿음이 없이 중생심으로 자꾸 뭔가를 얻으려 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② ‘이뭣꼬’ 참구는 어디가 잘못됐나?

‘이뭣꼬’는 내 생각으로 미리 만들어서 지어 들어가는 게 아니다.

그것은 조작하는 것이다.

 ‘이뭣꼬’ 하는 놈이 있으면 그것은 생각을 관하는 관법이지 간화선이 아니다.

그 생각에 묶여 있으면 해탈이 되지 않는다. 듣고 보고 아는 것, 배고프면 아는 것이 있는데 이 ‘아는 것’은 중생의 마음으로 아는 것과는 다르다. 알고 모름이 끊어진 상태의 것이어서 경험의 눈으로 아는 것이다.

이것을 알 수 없으니, 사람이 쓰는 말을 빌려 ‘이뭣꼬’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간화선은 경험적인 믿음인 것이다.


③ 간화선은 앉아서만 해야 하나?

한순간 바로 알면 석 달 동안 잠 안 자고 용맹 정진하는 것보다 낫다.

번뇌 망상 속에 부처가 있고, 현실 속에 부처가 있는 것이다.

현실이 피곤하다고 현실을 회피하는 것은 신선사상이지 불교가 아니다.

일반인들도 할 수 있다. 심리상태 등이 불완전하다고 실망할 필요가 없다.

사람은 누구나 불완전하다.

오히려 완전해지려고 하기보다 불완전을 인정해 버리면 그 속에 부처가 있다.


④ 수련자 반응

다양한 수행방법을 오랫동안 하다가 간화선을 하면 내 생각을 들여다보는 힘이 생기면서 내 자신은 물론 주변까지 변화를 일으키는 일대의 혁신이 일어난다.

“옛 語錄만을 듣던 것과 달리 본인이 직접 실참을 통해서 체험하는 일이야말로 내 인생은 물론 타인의 인생까지도 바꾸어 놓는 포교사로서의 최고의 가치를 부여받게 되는 행복으로의 초대인 것이다.


(3) 발제의 맺는 말

“오늘날 간화실천 문제의 핵심은 철저한 발심의 부재다.”

이러한 發心의 不在를 극복하는 대책으로는 중앙포교사단의 지속적인 수행프로그램의 정착뿐이라고 본 발제자는 강조하면서, 발심이란 무엇인가? 에 대하여 마무리를 하고자 한다,

發心이란 무엇인가?

중생심에서 출발하여 大信心으로부터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實有佛性)이라는 확실한 믿음은 갖게 한다.

그러나 인간의 근본적 욕망의 뿌리는 스스로 주체할 수 없기에 욕망으로 인한 번뇌망상이 일어나서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는 삶이 연속된다.

분명히 몸뚱이가 하자는 대로 이끌려온 삶의 현실은 괴로움뿐이다.

이것이 바로 大憤心을 일으킨다.

이러한 大憤心으로부터 발심이 일어나야 한다.

이 후에 大疑心으로서 화두를 지녀야함이 간화선 실천의 고삐라고 판단된다.

이러한 發心이란 發菩提心의 준 말로서 깨닫고자 하는 간절한 목마름이다.

생로병사의 온갖 괴로움을 여의고, 영원히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겠다는 간절한 마음이다.

나는 본래부처인데 왜 부처처럼 살지 못하는가? 하며 온갖 시비분별을 하며, 괴롭게 사는 삶에서 벗어나 매일매일 좋은 날을 살려고 하는 간절한 믿음과 염원이 바로 발심이다.

밥 먹고, 잠자고, 일하는 바로 이것이 언제나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것이 나의 주인공이요, 참모습이며, 진정한 자유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모르고 고통스럽게 살면서 마음은 밖으로 치닫고 누군가를 따라 다니면서 나와 남을 비교하고, 노예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진정한 주인공은 나의 눈앞에서 분명하고 늘 나와 함께 확연하게 움직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그냥 사는 것입니다.

일상생활 그 자체를 부처님 마음으로 돌려놓으면 그것이 발심입니다.

바로 내 앞에서 분명히 움직이고 있는 이것이 무엇일까? 하고 대의심을 내어서 발심합니다.

善知識께서 화두를 제시하시는 것은 수행자가 진정으로 발심했을 때라고 합니다.

따라서 “生活의 禪”을 주창해야 하는 우리 포교사들은 이러한 발심의 증진을 위하여 꾸준히 수행정진 속으로 용기 있게 뛰어 들어야 합니다.



 <참고 자료>

우선 앞서서 曹溪宗 佛學硏究所에서 실시한 세미나의 “간화선 수행의 성찰과 과제”를 주제로 하는 발표회에서 전국 선원 수좌회 학술위원장 월암스님의 발제와 부산대 조명제박사의 “간화선의 사회적 역할”을 주제로 한 발제를 소개하고 간화선의 실참을 도모하기 위한 핵심내용을 전하고자 합니다.


(1) ‘간화선 수행의 현실진단과 개선방향’(전국선원수좌회 학술위원장 월암스님)

월암스님은 철저한 발심과 선지식의 지도, 安貧樂道의 승풍진작, 수행과 인격의 일치(解行相應) 등을 간화선 수행의 개선방향으로 짚었다.

“철저한 發心의 不在가 문제의 출발이자 핵심”이라고 꼽으면서 “大發心만 전제된다면 나머지 개선과제는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라고 논평했다.

그렇다면 왜 발심의 부재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월암스님의 답변이다. “출가자 입장에서는 대발심을 했기 때문에 출가를 했다고 전제할 수 있다.

그러나 재가자의 수행은 이러한 기회마저도 없이 굉장히 세속화되어버렸다.

따라서 “기본적인 경전공부부터 간화선 실제수행에 이르기까지 종합적으로 연계된 프로그램이 절실히 필요하다”며 “전체적인 맥락에서 연계성 있는 교육프로그램을 편성해서 단위사찰까지 확산시킨다면 간화선수행의 대중화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제 기도와 불공 위주의 사찰운영에서 수행을 통한 대중포교에 비중을 두어야 할 시대가 왔다”며 “전국의 모든 사찰이 수행도량으로 거듭나서 종단 차원의 표준 수행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지도자를 양성하고 보다 정선된 간화선 프로그램을 정비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더불어 월암스님과 미산스님께서는 “간화선만이 최고라고 고집하는 것 역시 하나의 법집(法執)에 불과하다”며 “연기적 중도정관(中道正觀)을 정립하여 이 시대에 맞는 보편적 간화정도를 이루어 간화정도에 의해 융합 포섭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강조했다.

간화선만이 최상승 수행법이라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수행법이든 최상승이라고 주장해서 최상승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수행법을 통해서 수행자의 삶에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깊은 안목이 생길 때 굳이 최상승이라고 하지 않더라도 최고로서 역할을 하고 훌륭한 수행법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다.

최고라고 주장하기 전에 이렇게 극도로 변화된 지구촌 환경 속에서 인류를 근원적으로 구원할 수 있는 사상과 실천법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것이 간화선이라면 현대인들이 쉽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지구촌 시민들이 공감대를 갖도록 해야 한다.

동양이 문화적으로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비슷한 정서적 삶의 양식과 가치를 공유하고 있으므로 이것을 잘 이용하면 간화선 전통을 중국에 복원시켜 줄 수 있다.

동서양의 문화가 적절히 배합되어 독특한 현대문화 공감대의 기류를 형성하고 있다. 한국불교 단독으로 간화선을 세계화하는 것 보다 선수행의 종주국인 중국에 이식시켜 중국에서 간화선법이 새롭게 태어나도록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서양에 전해진 참선 전통은 일본 조동종 계통의 묵조선이 대부분이다.

한국불교 수행의 세계화에 대한 다른 의견은 간화선 수행법을 중심으로 하는 것을 인정하지만 간화선만이 훌륭한 수행법이라는 편견을 버리고 다른 수행법들도 적극 수용하여 각자의 근기에 따라 수행하도록 장려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종단에서는 간화선을 주창하고 있지만 실제 스님들과 불자들은 여러 가지 수행법을 복합적으로 행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한국불교 수행법의 통불교적 성격이라고 한다. 현실의 수행문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런 수평적 문화구조 속에서 간화선의 경쟁력을 키워가는 것이 더 현실적인 방안이다.

간화선 지침서 발간에 그칠 것이 아니라 간화선 이론과 실제행법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를 진행해야 하며 종립 간화선 국제선센터와 연구소를 설립하여 종단적 차원의 지원을 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간화선은 한국 수행문화의 주류로서 확실한 자리매김이 될 것이고 다른 다양한 수행법들도 자연스럽게 수용하면 좀 더 풍부한 한국불교의 수행문화가 형성될 것이다.


(2) ‘간화선의 사회적 역할’(부산대, 조명제박사)

9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탈근대론이 대두되면서 불교가 하나의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생태이론, 생명윤리, 페미니즘 등 다양한 방면에서 탈근대론의 주요한 범주에서 불교의 세계관이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다양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러한 움직임에 대하여 필자 역시 긍정하는 바가 없지 않지만, 기본적인 출발이나 시각에서 드러나는 문제점도 적지 않게 있다고 생각한다.

몇 가지를 간단하게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탈근대이론에 대한 기본적이고 종합적인 검토 없이 불교를 무분별하게 대입하는 게 아닌가 한다.

특히 생태, 생명, 여성주의와 관련하여 전통불교의 이론에서는 기본적으로 제시된 것이 없는데도, 원론적인 차원이나 총론적인 담론을 확대해서 마치 불교의 세계관에는 본래부터 그러한 이론이 내재되어 있는 것처럼 다루고 있다.

둘째, 그와 관련된 문제이자, 전통적인 불교가 가진 한계나 모순에 대한 탈각, 비판, 그리고 대안의 제시는 결국 근대불교의 성격을 둘러싼 문제에 대한 진지하고 구체적인 성찰이 요구된다.

그러한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나 평가 없이 전근대에서 탈근대로 건너뛰는 것은 지나친 비약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한다.

불교적 진리는 역사와 사회의 규정으로부터 일단 자유로운, 즉 모든 시대의 인간에 공통하여 적용되는 내면적 진리라고 보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의 초월성은 불교적 진리가 역사법칙의 바깥에 존재하고 있어서 그 규정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에 특징이 있다.

이는 불교가 사회문제나 사회적 대책을 취급할 때 종종 빠지기 쉬운 오류이다.

즉, 불교신앙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적 자각의 문제이며, 모든 개인이 그와 같은 신앙을 자기 자신의 내면에 확립만 한다면, 그 총체인 사회에는 저절로 평화와 조화가 찾아와 증오나 분쟁이 전부 해소되어버린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사고는 특히 선불교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첫째, 인간적인 삶의 내면적 사실에 대한 논증을, 차원을 달리하는 대상적 세계(자연과 사회)에까지 부당하게 확대 적용하는 오류이다.

사회문제와 그 대책에는 사회과학의 학문체계가 따라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인은 사회문제를 종교로 해결하려 하고,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개인의 주체적ㆍ내면적 자각이 있어도, 그 결과로 단순히 사회나 세계가 쉽게 변화하지는 않는다.

둘째, 사회는 개인의 집합으로 생각하지만, 동시에 그들 개인 개인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하여 존재하는 하나의 객관적인 실재이며, 또한 역으로 개개인을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불교적 세계관의 확립만으로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를 해석하거나 규정하는 것은 더욱 위험할 수 있다.

종종 불교인이 보이는 사회인식의 오류나 문제점이 드러나는 근본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개인의 내면적 자각의 성취나 완성을 위한 무한한 노력만큼 올바른 역사적.사회적 인식과 실천도 요구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와 사회에 대한 불교의 대응방식에 커다란 전환이 요구된다.

종래 주체의 내면에서의 심리적 전환을 가지고 객관적인 세계의 변혁과 결부시키는 것에 의해서 객관적 세계의 변혁을 망각, 포기하여 기꺼이 현실의 고정화와 그것에로의 개인의 순응을 호소한 현실순응적인 이데올로기로서 존재한 것이 불교의 자화상이었다.

긴 역사 속에서 존재한 불교는 오히려 끊임없는 자기 부정을 통하여 이론과 실천의 발전을 이룩한 사상체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그러한 장점과 긍정적인 요소는 잊어버리고 마지막 전통의 자산만을 유일무이한 진리인 것처럼 고집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게 지금의 자화상이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도 전체 불교의 역사에서 신앙과 종교라는 형태라는 온존되고 있더라도, 역사와 사회의 중심에서 사라졌다는 기본적인 사실에서 문제인식이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불교만큼 풍부한 콘텐츠와 지적 자산을 가진 종교가 많지 않지만, 그러한 전통만을 자부하기에는 현실의 사회는 유사 이래 그 어떤 것도 거대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고, 그것에 대응하고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낡은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 불교의 현실이다.

그러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서 냉정한 자기 진단과 새로운 방향 모색이 필요하지 않을까?

불교를 전통적인 어법으로 표현한다면 학도(學道)와 행도(行道)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행도라는 실천과 수행은 반드시 학도라는 이론의 정립과 발전을 전제로 하였다.

간화선이라는 실천방법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좁은 틀의 수행방법론에 대한 논의만이 아닌 현실의 불교가 요구받고 있는 문제에 해답을 제시하기 위한 길은 그러한 문제인식에서 출발한다면 의외로 쉬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교든 간화선이든 본래 고정된 틀을 고집하지 않는 열린 사상이요, 종교라는 기본적인 전제를 생각한다면, 그것만을 고집할 이유도 없고, 그것도 낡은 틀로 이해하는 방식에서도 탈피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만약 그럴 필요가 없다고 고집한다면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은 문제인식과 담론에 간화선이 모두 대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부터는 별도 참고인용문헌 으로부터 “중국의 조사선에서 한국으로 전래되어 발전한 간화선의 종지”를 발췌하여 간화선 수행과 실천을 돕기 위한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고자 한다.


(3) 조사선의 의미와 흐름

깨달음의 그 자리는 어떤 성인도 전할 수 없는 것이니 억지로 깨닫고자 하는 사람은 물속의 달을 건지려는 원숭이와 같다.

조사선이란 깨달음을 완성한 모든 조사들이 본래 이루어져 있는 깨달음의 세계를 바로 눈앞에서 들어 보인 법문이다.

말길과 생각의 길이 끊어지고 스스로가 본래부처임을 명확히 알아서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자재한 삶을 누리게 된다.

즉 법계의 참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가섭존자의 삼처전심이 바로 그것이라고 말하게 된다. 조사선을 실질적으로 정착시키신 분은 육조 혜능스님으로 돈오견성을 천명하셨다.

또한 혜능스님의 선법을 확고히 다지신 분이 하택 신회스님이다.

오조,홍인으로 부터

  1. 대통 신수선사 - 보적(북종선의 점수법)

  2. 육조 혜능선사 - 신회(남종선의 돈오법) - 마조도일 - 남악회양

                                                            -임제종

                                                                -황룡파

                                                                -양기파

                                                            -위앙종

                                          - 석두희천 - 청원행사

                                                            -조동종

                                                            -운문종

                                                            -법안종

위의 5가 칠종이 쇠퇴하면서 조동종 계통의 굉지 정각선사의 묵조선과 임제종 계통의 대혜 종고선사의 간화선이 분류되었다.

이로써 조사선은 묵조선과 간화선으로 분류된 것이다.

대혜 종고 선사의 간화선은 조사선의 핵심을 잘 간직하여 마음의 본래면목을 바로 보였던 말길이 끊어진 말씀을 화두라는 형태로 잘 정형화해서 이러한 화두로서 지금 이 자리에서 깨치고자 하였다.

중국은 당나라와 송나라 때에 활발하던 간화선풍이 명나라와 청나라 때에 침체되다가 단절되었다.

일본도 선이 이어지고 있지만 주된 수행법은 아니다.

반면에 한국에서만이 정법이 이어지는 간화선의 선풍이 이어지고 있다.


(4) 한국의 간화선의 전래

한국의 간화선은 육조 혜능선사가 정착시킨 조사선의 흐름을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는 조사선의 정통이다.

신라말과 고려초기에 구산선문이 형성되어 이를 통칭해서 조계종이라고 하였다.

조계종이라는 명칭도 역시 혜능선사가 머물며 돈오선법을 펼쳤던 산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그래서 혜능선사를 당, 송나라시대에는 조계 혜능 이라고도 불렀다.

구산선문의 개산 조사

도의국사(가지산문), 범일국사(사굴산문), 도윤국사(사자산문), 무염국사(성주산문), 현욱국사(봉림산문), 도헌국사(희양산문), 혜철국사(동리산문), 이엄국사(수미산문), 홍척국사(실상산문)

한편 조계종의 종조이신 도의국사는 혜능선사의 4세인 서당 지장선사에게 선법을 받아 염거, 체징 등의 제자에게 전법하였다.

조사선은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간화선이 체계화되기 이전에 도의국사에게 전하여졌다.

그렇지만 간화선이 체계화되기 이전의 조사선에서도 화두참구와 같은 방식의 수행법은 분명히 존재했었다고 한다.

송나라의 선문학이 도입되면서 공안선이라는 새로운 선풍이 시작되었으며, 고려시대 보조 지눌스님이 송광사에서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정혜결사운동을 전개함으로서 과거에 대혜 종고 선사께서 세운 간화선법이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도입되었다.

고려말 간화선을 확고하게 정착시킨 세 선지식인 태고 보우선사, 나옹 혜근선사, 백운 경한선사는 중국에 들어가서 임제종의 법맥을 지공선사로부터 전해왔다.

근세에 와서는 경허선사가 조계종의 간화선풍을 크게 진작시켰고, 용성스님과 더불어 수월선사, 혜월선사, 만공선사, 한암선사로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5) 간화선의 본질

간화선은 一超直入, 如來地 로서 단박에 뛰어 넘어 바로 여래의 경지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마치 캄캄한 방에 불을 켜면 한 순간에 모든 것을 “확” 밝히는 이치이다.

부처님과 역대조사께서 이르신 한마디 말이나 순간적으로 보이신 짧은 행위 끝에 모든 법문을 뛰어넘어 바로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법이다.

간화선이란 화두를 看하여 본래 성품자리를 바로 보는 선법으로 이 본래성품자리는 모두가 가지고 있는 自性이다.

이 성품을 보고 깨닫는다고 해서 見性成佛이라고 한다.

간화선의 뛰어난 점은 마음의 당처를 바로 들어 보인 선사들의 갖가지 화두를 타파하여 그 자리에서 견성성불 한다는 것이다.

화두란 말길과 생각의 길이 끊어진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기가 뛰어난 사람은 빠르게 수행이 진척될 수 있으나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는 어쩔 수 없이 화두를 들고 의심해 들어가는 것이다.

화두는 간절히 의심하여 마음이 온통 의심덩어리가 되게 하여 마침내 그 의심덩어리가 툭 터지는 경지로 이끌어주는 것이다.

화두는 사유할 수 있는 모든 과정을 철저히 차단한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꽉 막힌 상태로 된다.

긍정도 안 되고 부정도 안 된다.

아무리 해도 안 된다. 도저히 접근 할 길이 없다.

어느 쪽의 길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言語道斷이오. 마음의 자취가 끊긴 心行處滅이다.

이 자리에서 의문 덩어리인 화두가 활활 살아난다.

화두는 주관과 객관이 근거로 하고 있는 생각의 길이 끊어진 곳에 있다.

여기에는 단지 커다란 의심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화두에 깊이 들어간다는 뜻으로 참구(參究)라는 말을 쓴다.

간화선에서는 의심을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고 있다.

사람들은 보통 주변의 사물이나 일에 대해서 그것을 대상화하고 양변(兩邊)으로 나누어 판단하면서 살아간다.

그것도 자신의 의식 속에 채색된 주관적인 선입견으로 분별하고 추리하여 이런 저런 것에 대한 결정을 내린다.

우리들의 분별의식은 이렇듯이 자신의 색안경을 낀 채로 대상을 보고 사유판단하기 때문에 불완전할 뿐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맹점을 지니고 있으면서 날로 그 불완전한 속성에 익숙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의 일상의식이 “나” 라고 하는 생각을 축으로 세상을 이리저리 재단해 보는 알음알이로 끊임없이 꿈틀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분별의식을 타파해야만 자신의 본성이 밝게 드러나게 된다.

이것은 눈 먼 장님이 캄캄한 암흑 속을 헤매면서 일편단심 눈 뜨기만을 바라던 장님이 어떤 부딪친 계기로 눈을 번쩍 뜨는 것과 같다.

그러나 눈을 떠 보면 그러한 깨달음은 스스로에게 본래 있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禪에서는 번뇌를 털어내어 부처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처인 本來具足해 있는 자기 성품을 바로 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대는 본래 완성되어 있다. 그러한 네 자신을 바로 보아라.” 이렇게 확신시켜주는 것이 禪이다.

부파불교와 신수선사의 북종선의 측면에서 수행은 부처가 되어가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출발하는 반면에, 달마대사로부터 혜능선사에 이르는 남종선에서는 수행을 본래부처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이렇듯이 혜능선사의 남종선 선법은 달마조사가 전한 조사선의 골수로서 간화선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조사선에서는 선문답을 간화선에서는 화두를 독특한 방식으로 좀 더 명확하고 구체적인 틀로 정형화 하고 있다.

수행은 평상시의 이 마음이 그대로 부처님 마음임을 믿고 분별하고 취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결코 조작하지 않고 시비를 떠나는 것은 알음알이를 없애기 위한 것이며, 이렇게 부념 무심이 되면 본래무일물이라는 공의 실현이 가능한 것이다.

(6) 간화선이 최상승법인 이유는 이렇다.

① 조사선의 전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조사선은 당시에 유행하던 止觀을 통한 점수법을 극복하고 頓悟見性을 밝힌 수승한 수행법이다.

敎는 말로서 말 없는 경지에 이르는 수행이오,

禪은 말없이 말 없는 경지에 이르게 하는 수행인 것이다.

② 간화선은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일체의 행을 이루되 거기에는 걸림이 없다.

즉, 應無所住 而生其心이다

③ 조사선의 가장 발달된 형태인 화두참구법으로 분별의식의 흐름을 차단하는 뛰어난 힘을 갖고 있다.

즉, 화두참구를 통해 깨달음에 가장 빨리 질러가는 길인 經截門이라는 관점에서 불교 선종사에서 가장 발달된 최고의 수행법으로 판단된다.

④ 간화선에서는 근기에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간화선은 지식으로 체득하는 有相의 수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사선과 어록이 있는 한 하근기도 밖으로 치닫는 뜻을 거두고 안으로 향하여 자기의 본성을 살핀다면 바로 상근기가 된다.

정견을 확립하여 진정으로 발심하여 수행하는 “下心” 만이 있으면 상근기가 된다는 것이다.


(7) 간화선에서의 “중도, 연기, 무아, 공” 의 도리

간화선은 현실참여를 지극히 주장하고 있는 적극적 실천수행으로서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내용을 지향하고 있다.

이것은 불교의 인생관이고 세계관이다.

간화선이란 연기법을 이 자리에서 바로 보여주고 그것을 체험하는 수행법이다.

즉, 相依相存하면서 無我로 존재한다는 것이 연기법이다.

연기의 도리가 펼쳐지는 자리는 모든 존재가 “無”로 비워지는 자리이다.

연기의 세계의 참모습은 “너와 너, 有와 無, 좋다 싫다.” 등의 상대적인 세계와 모든 이것과 저것을 동시에 떠나 있기에 중도(中道)라고 한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핵심은 바로 이 “中道緣起” 이다.

너와 내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존재하며, 서로 대립하지 않고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기 때문에 중도이다.

이러한 중도, 연기, 무아를 더욱 역동적으로 표현한 것이 공(空)사상이다.

금강경, 반야심경의 핵심사상이 바로 이렇듯이 불심의 지혜를 체득하여 사는 것은 중도연기로서 공(空)의 실형으로 삶을 사는 것이다.

조화(중도)→실체, 실상(연기)→실상 없음(무아)→표현(공) 으로 판단할 수 있으며, 예를 들면, 건축자재의 조립은 중도이고, 건물이 만들어진 것은 연기이며, 용도가 끝나서 건물을 해체하면 무아로서 고정된 실체가 없는 空인 것이다.

위와 같이 모든 물질과 만사만물과 모든 생각들이 독립된 실체가 없이 존재하며 연기의 이치로 모든 존재의 실상을 보면 고정된 “아(我)”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無我이고 空이다. 空은 청정한 허공과 같다.

청정한 허공은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으며, 생겨나거나, 사라지지도 않는다.

즉, 不增不減 不生不滅이다. 우리의 존재가 바로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바로 보는 것이 중도, 연기, 무아, 공의 실현으로 사는 삶이다.

조사선에서는 중도연기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기에 마음과 몸으로 존재의 실상과 그 세계의 참모습을 연기로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연기는 보편적인 진리이고, 우주존재의 원리이고, 삶의 실현이다.

이렇듯이 모든 존재의 바탕이 연기법이라는 사실에 명확히 눈을 뜨면 同體慈悲의 실천행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연기적 깨침이란 “나와 남”을 가르는 울타리가 무너지는 순간에 일어난다.

선수행자는 이러한 가치관과 세계관이 확고하게 서야하므로 중도정견에 대한 이해와 이에 따른 실천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신비주의나 기능주의, 선정주의 등으로 전락할 수 있다.

또한 삶의 질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禪은 깨달음 지상주의로 떨어져서 깨달음 자체를 도구화하거나 대상화할 위험이 있다.

깨달음은 너와 나, 우리 모두를 살리는 보살의 광대행원으로 피어나게 하고, 허공같이 드넓고, 맑고, 걸림 없는 인격체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구할 것도 없고(無所求), 얻을 것도 없는(無所得) 대자유의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8) 간화선에서 경전(經典)의 중요성

邪敎入禪이란 敎를 충분히 공부한 후에 그것을 내려놓는다. 라는 뜻으로 敎를 무시하거나 거부한다는 뜻이 아니다.

敎는 산을 오르는 지도(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와 같고, 禪은 산을 밟고 정상을 올라가는 일(달을 보는 일)과 같다.

지도가 없이 험한 산을 오르는 것은 위험하듯이 달을 보라고 손가락을 가리키면 달을 보아야지 손가락만 쳐다보는 것도 역시 어리석음이다.敎는 正見을 세우는데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한편 敎學을 이해하고 난 뒤에는 그곳에 머무름 없이 바로 선수행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지도만 보고 산에 올라왔다고 할 수 없고, 손가락 표시만으로 달을 보았다고 할 수 없다.

서산대사의 가르침에서 다음의 내용을 소개한다.

禪과 敎의 근원은 부처님이시고, 禪과 敎의 갈래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이다.

말 없음으로 말 없는 데에 이르는 것은 禪이고, 말로서 말 없는 데에 이르는 것은 敎이다.

마음은 禪法이고, 말은 敎法이다. 비록 선수행자라고 하더라도 처음부터 무작정 선의 세계에 들어가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약이 필요 없다는 것은 병이 없는 사람에게 해당되며, 병이 걸린 사람에게는 약이 꼭 필요하다.

참선공부인 에게 경전과 어록은 장님의 지팡이처럼 절대로 필요한 이치이다.

선어록의 자상한 지침이 있듯이 禪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말을 떠날 수는 없다.

중요한 사실은 말에 걸려 머무르지 말라는 것이다.

말없는 경지는 궁극적으로 자기성품을 체득한 경지이다.

그러나 법(경전)에 대한 이해만으로는 불법의 진리의 세계를 체득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즉, 불법의 세계는 언어를 떠나서 있고, 분별을 떠나서 있는 세계라는 분명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물을 먹어봐야 물맛을 알 수 있고, 자전거를 타 보아야 타는 법을 알 수 있는 이치와 같다. 진리의 세계는 반드시 직접 체험해야 한다.


(9) 간화선 수행과 계행

서산대사는 禪과 戒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했다.

음란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모래로 발을 짓는 것이고, 살생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자신의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는 일이고, 도둑질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새는 그릇에 물이 가득 차길 기대하는 일이며, 거짓말 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똥으로 향을 만드는 일과 같다. 라고 하였다.

수행의 근본은 선원청규이며, 참선수행자의 첫째 근본은 戒律이다.

계행이 없는 수행은 허공에 누각을 짓거나 1, 2층 없이 3층을 지으려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참선수행의 “확신”이 섰다는 말은 믿음으로 가득 찬 계행을 지키겠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계, 정, 혜 삼학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저절로 몸과 말과 행동이 익어서 추호도 어긋남이 없다는 뜻이다.

육조 혜능선사께서는 무념이 되어 견성하면 선정과 지혜가 나누어질 수 없고 같다고 하였다.

수행을 통하여 무념의 경지에 이르면 계, 정, 혜 삼학은 구족된다는 뜻이다.

원오 극근선사께서는 청정한 계행을 지니되 계행에 집착하는 생각이 없으며, 호호탕탕한 수행을 해도 공부한다는 생각을 남기지 않는다. 라고 하셨다.

조사선에서는 몸의 감각체계를 관리하는 의미의 계율보다는 마음의 근원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자연스럽고 살아서 약동하는 의미로서의 계율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한 삶에는 생각으로만 으로도 계율을 범하는 일이 사라지게 되어 매순간마다 계율에 맞는 삶이 완성된다.

참선수행자의 계율에 대한 마음가짐은 수행처소나 시간에 관계없이 상시적으로 지켜 나아가야 한다.

正見을 세우고 수행하게 되면 계는 일산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완성된다.

수행과 삶이 일치되는 것은 수행자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달마대사가 계를 언급하지 않았던 이유는 너무나 당연하기에 그런 것이다.

깨달은 사람이나 中道正見을 갖춘 사람만이 계를 지키고(持 ), 범하고(犯), 열고(開), 닫는(遮) 행위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 이다.


(10) 화두참구를 위한 발심은 이렇게 한다.

무상감과 삶의 부조리성에 대한 자각으로서의 발심은 생사의 고통을 뛰어 넘어 근원적 자유를 실현하겠다는 간절한 염원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자면 세속적 가치의 허망하고 부질없음을 자각하고, 그것에 대한 사무친 무상감이 일어나야 한다.

또한 불완전하고 부조리한 삶의 실상과 근거 없는 가치판단에 대한 본격적인 성찰이 있어야 한다.

나옹선사의 친구죽음을 목도 후의 발심, 경허선사의 전염병으로 인한 죽음을 목도한 후의 발심, 등등이 발심의 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다투어 추구하는 돈, 출세, 명예, 학식과 같은 세속적 욕망도 결국엔 무상 속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이러한 세속적 욕망은 삶을 이리저리 얽어매어 번뇌로 시달리게 한다.

삶은 또한 부조리하며, 모순으로 가득하다. 삶은 결국 죽음으로의 접근이다.

지난날의 선이 오늘은 악으로 돌변하고, 이쪽에서는 선이, 저쪽에서는 악이 통하기도 한다.

남을 짓밟고 무시하고, 나의 판단에 혼돈이 있고, 소신도 없고, 등등의 밝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한 일들이 난무하다.

일제시대의 효봉스님의 출가인연도 삶의 부조리와 자기의 한계에 부딛힌 것이다.

이렇듯이 생사고해를 뛰어 넘어 본래면목을 찾고자하는 구도의 열정으로서의 禪에서는 무상감과 자기한계, 고통과 부조리한 삶을 극복하고자 하는 자기 자신을 찾는데 주력하고 있다.

진정한 자기의 모습을 찾게 되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주변도 함께 밝히고, 당당해지며, 가치판단이 명쾌하며, 생사가 본래 없음을 체득하게 된다.

그러자면 무상에 대한 자기통찰과 가식 없는 자기직시가 필요하다.

이러한 연원으로 선은 바로 여래의 경지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한다.

즉, 一超直入如來地 單刀直入 이 밖에 다른 서술은 모두 다 군더더기일 뿐이다.

한편, 박산선사께서는 공부를 하되 가장 먼저 생사심을 깨뜨려야 한다.

바깥세계와 몸과 마음이 모두 거짓 인연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실체가 없는 주재자임을 간파해야 한다.

한 걸음도 함부로 행할 수 없고, 한 걸음도 멈출 수 없고,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다.

이러한 때를 당해서 곧장 앞으로 내 달아 뛰쳐나오는 길만이 살길이다.


(11) 생활선(生活禪)으로서의 일행삼매(一行三昧)와 오온(五蘊)의 관계

  ① 사람의 눈으로 사물(色)을 보는 파장이 나간다.

  ② 사물의 모습으로부터 형상이 우리의 뇌 속에 들어온다(受)

  ③ 그런 후에 우리 뇌 속에 저장되어있는 것을 불러 일으켜 온다(想)

  ④ 뇌 속에서는 불러 일으켜 온 저것이 무엇인가? 하고 인식이 진행된다(行)

  ⑤ 그런 다음에 뇌 속에서 인식된 것의 판단과정이 쪼개어서 진행된다(識)


이러한 흐름에서 인식된 것의 판단과정이 두 가지로 표현되는데

하나는 “불심의 지혜작용”이고, 다른 하나는 “중생심의 작용”이다.

첫째로 불심의 지혜작용은 집착과 인식에서 벗어나서 본래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로서 中道, 緣起, 無我, 空의 實現을 통한 本心의 작용을 일으킨다.

즉, 인식은 하지만 본래로 되돌아가는 작용으로 집착이 없고, 시비분별이 없고, 취하고자 함이 없고, 버릴려는 생각도 없고, 인식은 하되 인식에서 머무르지 않는 상태로서 깨달음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본래 자신의 일로 돌아가는 一行三昧로서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일에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둘째로, 중생심의 작용은 인식에 머물러서 집착하는 妄心의 作用으로 아름답다, 갖고 싶다는 등의 번뇌망념이 생기고, 거기에서 우비고뇌, 근심걱정, 불안초조, 등의 여러 가지 문제점이 돌출한다.

이러한 것이 바로 業이 형성되는 과정이다.

이것이 중생심이고, 이러한 인식에 머무르면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일을 잃게 되는 一行三昧에서 벗어나서 불행을 자초하게 된다.


(12) “불교의 간화선”과 “기독교의 믿음”을 비교해 본다.

① 불교의 경험적 믿음(간화선)

妄心을 坐禪으로 알아차린다.

本心은 一切衆生實有佛性을 話頭로 지닌다.

스스로가 선지식이 되어간다.

불교가 교학적 행위에서 정지되면 기독교적인 믿음의 형태와 유사해 진다.

또한 불교적 믿음은 신행경력이 길수록 망심은 감소하고 본심이 증가한다.

간화선은 무조건적인 믿음이 아니라 의지의 대상이 자신의 내부에 있는 불성이다.

경험(조건)적 믿음으로 자신과의 대화가 친숙해져서 망심이 소멸되어진다.

경험(조건)적 믿음이기에 철저한 체험이 중심이 되어 자신이 변화된다.

충분한 믿음의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공부가 어렵기는 하지만 경험(조건)적 믿음에 확신이 서면 본심과 항상 가까이 할 수 있다.

오랫동안 좌선한다고 본심으로 사는 것만은 아니고, 본심으로 사는 바른 길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즉, 조작과 시비가 끊어진 체험적 삶이어야 한다.

간화선에서는 만법귀일 일귀하처까지를 드러내는 본심(자성)과 계합한다.

즉, 본심으로서 본심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만법귀일은 절대적인 의미의 본심이요, 일귀하처는 조건적 신심으로서의 일체중생실유불성을 보인 것이다.

즉, 만법귀일 후에 일귀하처까지 화두로 지닌다.


② 기독교의 신앙적 믿음(절대신)

妄心을 말씀으로 알아차린다.

本心은 절대 신에 의존한다.

바깥의 절대 신에 의존한다.

믿음의 한계와 방향이 없다.

기독교적인 믿음은 신행경력이 길수록 망심과 분별심이 증가하고 본심은 감소한다.

무조건적인 믿음으로 의지의 대상이 자신과는 관계없는 외부의 절대적 존재이다.

믿음이 신앙(무조건)적 믿음으로 자신의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기에 망심이 그대로 남은 상태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표현한다.

신앙(무조건)적 믿음이기에 직접적 체험보다는 망심으로 이루어진 성령에 의존한다.

무조건적인 믿음의 과정이기에 자신의 내면화를 추구하는 공부가 필요 없다.

망심으로 본심을 믿는 과오가 발생하며, 그 본심을 절대 신이라고 확신하는 우상을 일으킨다.

망심으로 성령과 함께 있으나 본심으로 성령과 함께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조작과 시비분별이 이어져가는 有相의 신앙적 삶이 이루어진다.

기독교적으로 만법귀일까지는 긍정을 하나 일귀하처라는 본심(자성)과는 계합할 수 가 없다.

설령 계합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는 망심자리에서 만난 것을 본심자리에서 만난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즉, 망심으로서 본심을 만났다는 착각을 사실로 믿는 것이다.

만법귀일로서 절대 신에 의지할지언정 일귀하처라는 본심자리는 이룰 수가 없는 것이 기독교의 허구상이다.


     < 참고 인용문헌 >


   - 간화선(조계종 출판사)

   - 간화정로(월암, 저)

   - 참선교육(현담, 저)

   - 육조단경 강설(정성본, 저)

   - 참선일기(김홍근, 저)

   - 밖에서 찾지 말라(법정, 저)

   - 선문촬요(백용성, 저)

   - 간화선의 성찰과 과제

   - 간화선의 이론과 실제(성본, 저)

[출처 :  http://cafe.naver.com/mooru/9502]

출처 : 길 위에서
글쓴이 : 한누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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