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지혜/참 지혜

염화미소

산울림(능인원) 2013. 2. 10. 18:46

동업 보살의 서원

우리는 옛적부터 비로자나 법신이나

변하는 모습따라 뒤바뀌는 여김으로

갈팡질팡 생사해에 뜨잠기는 중생이니

좋은인연 그늘밑에 동업보살 되고지고

 

우리는 중생이라는 말 많이 들었어요. 그러나 사실 깨 놓고 보면 중생도 아닙니다. 금강경에도

부처님께서 '중생은 중생이나 이름뿐인 중생이니라' 이런 말씀하셨거든. 아니 우리 법신이

중생이 될 턱이 뭐 있느냔 말이여.

 

우리의 법신이 중생의 지견을 가지기 때문에 이 탈에 들어앉기 때문에 중생이란 말을 들었는데

사실 딱 깨 놓고 보면 청정한 법신이지 어찌 우리가 중생이냔 말이여. 우리가 우리 자신을

향해서 죄를 짓고 있어.

 

하나의 당당한 누리의 주인공인데 하나의 참 청정 법신인데, 이럼에도 불구하고 '난 중생이다.

이런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어요. 뭐 겸손해서도 아니고 못나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그만 무조건

나는 중생이다 합니다. 중생이야 중생이라고 할 수 있죠. 왜 그러느냐. 중생의 지견을 쓰기

때문에 중생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공부하는 마당에 있어서는 우리가 부처도 버렸는데 요 중생을 왜 거머쥐느냔

말이지. 우리는 부처도 될 필요가 없어. 부처가 부처를 어떻게 되느냐 말이여.

 

만약 우리가 본래부터 부처가 아니라면 부처가 돼야 되겠지. 하지만 본래 우리가 청정법신

으로서 참 뚜렷한 하나의 누리의 주인공인데 어째 다시 우리가 부처가 되나 그 말이여.

그러하니 부처도 항차 되려고 안하는데 왜 중생이 되느냐. 왜 중생이란 말을 감수하느냐

그 말이여. 그러하기 때문에 오늘부터 이 자리부터 설법은 중생을 위해서가 아니고 보살을

위해서입니다.

 

동업 보살, 동업 부처도 좋은데 우리가 보살 보살 하는 이 말 이거 참 인정 있는 말이에요.

아주 좋은 말이에요. 동업 보살 원을 세우고 또 그렇게 나가고 있고 또 행하고 있고 이렇습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설법도 중생을 위해서 하는 설법이 아니에요. 중생을 위해서 설법을 해 봤든

중생들은 알아듣질 못해요. 알아듣지 못하는 설법은 부처님도 안했어요. 부처님도 개나

돼지나 닭이나 이런 중생들을 위해서는 안했거든. 속으로 가슴은 아팠을 거예요. 참 자비하신

분이니까. 가슴은 아팠다 할지라도 설법은 안했거든. 그와 마찬가지로 사실 나 중생보고 설법

안하겠어요. 중생보고 해봤든 안돼요.

 

오늘 이 제목만 하더라도 중생한테 하는 설법이 아니거든. 물론 그 책에는 인천 백만, 인천 십만,

인천 ...... 이런 숫자가 나와요. (어떻든지 ∼는 별 문제로 하고 부처님께서 오셔서 법을 전하는

이 마당인데 중생에겐 도저히 이해가 안돼)

 

차라리 중생들에겐 어떠한 설법을 해야 되느냐 하면 착한 일 해라. 부처 되려고 해라.

보살 되려고 해라. 네가 잘해서 어디 하늘에라도 나가라. 이런 식으로 설법을 해야 되지.

만약 중생을 향해서 보살보고 설법한다 하면 못 알아듣거든.

 

근데 이 자리는 그렇지 않거든. 이 자리는 보살을 향해서 하거든. 그런데 여러분 중에서 만약

나는 보살이 싫다. 중생이 좋다 하면 중생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 자신들이 중생이 되려고

하는데 내가 중생 되지 마라 하고 말리진 않겠어요.

 

나는 부처님과 같이 그런 자비심이 있는가 없는가 모르겠지만 말이지(웃음). 왜 말려, 말려 봤든

안되는 거야. 그러니까 애당초 거기엔 힘을 쓸 필요가 없어.

 

그러하니까 보살을 향해서 하는 말로 여러분들 알아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따지고

들어간다면 여러분 자신이 벌써 청정 법신이거든. 하나의 부처라 그러하니 여러분들이 공연히

이 가죽 주머니 이 놈을 둘러쓰고 있기 때문에 어이구 내가 중생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그 생각이야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 그까짓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말할 필요가

없단 말이여. 그러나 여러분들은 벌써 하나의 뚜렷한 청정 법신이거든. 이것은 틀림없어 응.

 

여러분들이 법신을 이해하든지 안하든지 이것은 별 문제라. 별 문제겠지마는 법신은 법신이거든.

 그 법신 여읜 부처가 어디 있느냐 말이여. 그렇기 때문에 보살을 위해서 내가 하는 설법이고

또 여러분도 보살로서만이 이 말을 들을 수가 있어요. 여러분이 중생 지견을 가지고서는

이 말이 납득이 안가요. 도대체가 허황하고 도대체가 엉뚱하고 도대체가 논리상으로 맞지도 안해.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말이지 '나는 보살이다' 보살로서 여러분들이 자처를 딱 하면은 물론

부처로서라 해도 좋아. 보살로서 자처를 딱 하면 말이지. 그만 여기 나오는 이것이 귀에 쏙쏙

들어가서 아하∼ 다시 한 번 중생 놀이 한 번 해 볼까. 이럴 거예요. 그러나 중생 놀이한다

해도 중생 놀이뿐이지 중생은 아니라!

 

그러하니까 그런 줄 아시고. 그러면 이 설법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면 말이지 전부는 안됩니다.

중요한 것을 뽑아 가면서 할 작정입니다. 이걸 전부 그대로 차차 하려면 매일 1시간씩 해서

30년 동안 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도솔을 여의지 아니하고 이미 왕궁에 나셨다' 이 문제거든. 참 과학적으로 딱

맞습니다. 참말로 부처님께서는 도솔을 여의지 않아. 그래서 왕궁에 낳으셨어. 그러니까

부처님의 몸, 살덩어리로서인 32상 80종호는 32상 80종호로서 존경해.

 

하지만 역시 그것도 무정물이라. 부처님의 32상 80종호도! 그리고 또 변하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도 어릴 때, 소년 때, 청년 때, 노년 때가 있는 거 아니에요. 그거 다 변하는

이치거든.

 

그러니까 32상 80종호로서의 석가모니불이 아니거든! 허공으로서인 석가모니 부처님이거든!

이거 허공이라 하면 어패가 많은데 부득이 이 말을 빌어서 합니다. 이건 비유로 하는 말이니까

허공과 같다 그 말이거든. 허공으로 서인 석가모니불이라 그래서 정반왕궁에 물거품같이 나툰

그거예요.

 

그러나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물거품같이 나툰 이것을 진짜 부처님으로 압니다. 실은

석가모니불은 허공으로서인 석가모니불이에요. 이렇다면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여러분도

가죽 주머니로서인 여러분인가요. 가죽 주머니로서인 여러분이라 하면 이것은 무엇이냐.

하나의 물거품과 같은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의 眞은 뭐꼬.

 

그 자린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그 자리거든. 허 참 이거 알고 보면 참 기가 막혀요.

내 자신의 일인데 기가 막혀. 아! 이거 육신 변하는 것, 그러니 늙는 거야. 나도 여러분보다

더 어릴 때가 있었거든. 변하기 때문에 이거 늙어 가. 누가 이걸 부정하겠어요.

 

변하는 이 육신으로서 문제가 아니라 내가 입을 빌려서 말을 하는 그 놈, 눈이란 기관을

통해서 보는 그 놈, 귀라는 기관을 통해서 듣는 그 놈이거든. 그 놈이 무엇이냐 말이여.

찾으려고 해도 찾지 못해. 왜 그러느냐. 그 자리는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자리거든.

다시 말하면 청정 법신이거든.

 

그렇다면 아까 부처님은 허공으로서인 부처님, 청정법신으로서인 부처님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한문으로 말하면 전성체로서인 부처님, 절대성으로서인 부처님, 뭐라고 말해도

좋아요. 요 뜻만 알면은 부처님이 그렇다면 나도 허공으로서인 나이지 가죽 주머니로서인

내가 아니거든. 나도 청정법신으로서인 나이지 가죽 주머니로서인 내가 아니거든.

 

내가 그렇다면 여러분도 그래. 나도 절대성으로서인 나지 가죽 주머니로서인 내가 아니거든.

부처님도 그러하니 나도 그래. 나도 그러니 여러분도 그래요. 여러분도 가죽 주머니로서

여러분이 아니야. 왜 아니냐. 여러분의 몸이 어찌 내꺼냐. 이걸 내꺼라 하는 순간에

(의학적으로 따져 보면) 자꾸 변하는데 무엇을 걷어잡고 내라 하지? 참 어리석은 짓이에요.

 

그러나 저러나 이건 변하는 것, 무정물, 내 소유물이 아니란 말이야. 내 관리물은 될지언정,

 관리물이라도 변하는 관리물이지 안변하는 관리물이 아니거든. 그러면 이 손이라는 기관을

통해서 이렇게 흔드는 이 놈, 손 자체가 흔드는 건 아니거든. 손 자체가 뭐 느낌이 있어야지.

그러나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자리가 손을 흔들기 때문에 이런 거 아니에요? 이거 참

 재주가 희한해요.

 

여러분 손이 이렇게 못 흔들거에요. 왜 그러냐. 여러분 손 자체에 자체성이 없기 때문에 느낌이

 없어.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놈이 이 무정물을 흔들거든. 여러분 한 번 해 봐요. 참

이상해요. 고것이 우리가 모습에 중독이 돼서 그렇지.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그 자리가

이걸 흔든다. 그러면 처음엔 곧이 안 들려요. 아무 것도 없다 그러고 엉뚱한 말이라 하거든.

손이 한다, 손이 흔든다 해야 말이 딱 맞거든.

 

손이 흔든다 해서 손이 무슨 느낌이 없는데 손이 어떻게 흔드느냐 말이여. 가만히 생각해 보란

말이여.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나. 나란 나. 내가 무엇인지 모르지. 말하는 나. 눈도 역시

그래. 눈이 뭘 보는가. 눈이 본다면 눈이 자체성이 있어? 자체성이 없는 눈이 어떻게 본단 말이여.

그건 턱도 안되는 소리여. 거울처럼 비추기만 비췄지 눈이 보는 건 아니거든. 귀 역시도 듣는 게

 아니고 자체성이 없으니까.

 

그런데 듣고 봐. 무엇이여? 역시 이걸 통해서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그 자리거든. 밤에 누워

잘 때 눈 감을 땐 어쩔 것이냐 말이여. 누워 잘 때 눈감아도 꿈을 봐. 뭐이냔 말이여. 눈동자가

봤기 때문에 꿈에 나타나는가?

 

역시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알이, 識 자리거든. 이걸로 본다면 말이지 비유해서 그 자리를

도저히 이야기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비유해서 말하는데 제일 알아듣기 쉬운 것이 허공이라 해야

쉬워. 허공은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업는 것이거든.

 

원래 허공이 있는 게 아니에요. 말마디만 있지. 물론 허공이 없는 것도 아니에요. 태양이 여기서

나오고 지구가 거기서 나와서 의지하고 있는 걸 보고 또 허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 하겠는데 오늘 이 자리에선 말을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해 놓고 봅시다.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 전부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거거든.

 

여러분도 그래, 부처님도 그래, 나도 그래, 실로 축생들도 그래. 그건 미해서, 몰라서 그렇지.

축생은 부처님도 말씀 안했어요. 그러니 말할 것 없고. 그렇다면 진짜 여러분, 변하는 가죽

주머니, 느낌이 없는 이 육신, 이것은 문젯거리가 안돼. 문젯거리가 안되거든. 그러니 이건

말할 것도 없고 좌우간 여러분의 청정 법신 자리가 있다는 건 틀림없단 말이여.

 

그러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허공으로서인 여러분이라 하는 거예요. 나도 허공으로서인 내라,

부처님도 허공으로서인 부처라. 만약 부처님이 이러저러한데 우리는 이렇지 않다 이러면

어떻게 돼지. 허공이 둘이라야 돼. 지도리가 둘이라야 해. 지도리는 진리를 말하거든. '진리'

 하면 가리(假理)가 있거든. 상대적이거든. 그래서 내가 진리라는 말을 안 쓰는 거예요.

구경위에 가서는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여. 참이라면 거짓, 거짓이라면 참, 이렇게 나와요.

상대적인 거예요.

 

그런데 참말로 그 진리 자리, 진짜 자리는 말이지 상대가 끊어진 자리에요. 허공이 상대가

끊어진 자리거든. 그러니 그것을 지도리라고 이름을 붙인 거예요. 중추원 참의니 추기경이니

하는 것도 추字, 옥편에 보니 지도리라고 돼 있어요. 그래서 지도리라고 하는데 여러분의

몸뚱이 설혹 여기 있어. 여러분은 생각하기를 이걸 내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이건 여러분의

관리물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요번 기회에 요걸 두드려 부숴야 해요. 그런다 해서 여러분의 몸뚱이를

해친다는 말이 아니에요. 그 그릇된 관념, 뒤바뀐 관념을 두드려 부수자 이 말이에요.

뒤바뀐 관념을 두드려 부숴 놓으면 되돌아서 관리물 이거 잘 쓰면 되는 거예요. 옷도

입혀 주고 밥도 먹여 주고 잠도 재워 주고 얼마나 좋아요.

 

그러나 이 도리를 모르고 그만 '이 몸뚱이가 나다' 이렇게 되면 무엇이 되지요. 그건 참으로

도깨비밖엔 안된다 말이여. 알아듣겠어요. 어떻든지 여러분들은 내가 여러분에게 얘기하는

것은 절대로 여러분의 몸뚱이를 향해서 말하는 게 아니에요. 몸뚱이 자체에 느낌이 없잖아.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불에 집어넣어서 태워도 그만이고 묻어도 그만 아니여. 느낌이 없기

때문에 몸뚱이를 향해서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실로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그러니 내가 얘기하는 것도 자체성 없는 이 몸뚱이를 향해서

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전부 法身을 향해서 얘기하는 거예요.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그 자리를 향해서 얘기하는 거예요. 그 수밖엔 도리가 없는 것이 육신 자체에 느낌이 없는데

얘기를 한들 알아들을 수가 있나요.

 

솔직한 말로 우리 몸뚱이에서 청정 법신을 딱 빼 놓는다면 불에 집어넣어도 그만, 땅에 묻어도

그만인데 거기다 설법을 해봤든 소용이 없잖아요.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나는 여러분의

몸뚱이를 향해서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럼 무엇이냐. 法身, 그럼 여러분의 法身을 어떻게

구별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나중에 차차 차차 나옵니다. 여러분의 몸뚱이는 가짜 몸뚱이, 성품이 없는 가짜

몸뚱이를 걷어잡고 여러분의 法身을 인정할 따름이에요. 그렇다면 몸뚱이도 소중하긴

소중하네. 막 치고 치고 했는데 가만히 보니 여러분의 색신을 걷어잡고 法身을 살리는 도리라

그 말이여. 그러나 저러나 여러분의 색신을 향한 건 아니니까 그런 줄 알아주시고. 이 자리는

우선 이것부터 알아야 이 도리 알게 되니까. 우선 한 번 읽어보죠.

'참지혜 > 참 지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쌓는 공부와 놓는 공부  (0) 2013.08.02
나옹선사 참선시  (1) 2013.02.06
산사의 범종소리/숭산스님(Ⅰ)  (0) 2012.11.10
해탈과 성불  (0) 2012.10.26
많이 아는 것은 귀(貴)한 것이나...  (0) 2012.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