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사 김천일 의병장 |
송병완님의 글 입니다 |
선조 25년(1592년) > 선조 25년 6월 > 선조 25년 6월 28일 선조 27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6월 28일(병진) 4번째기사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의병이 일어난 일과 경상도 지역의 전투 상황을 보고하다 경상우도 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이 치계하였다. “신은 죄가 만 번 죽어도 마땅한데 특별히 천지같은 재생(再生)의 은혜를 입어 형벌을 당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초유(招諭)의 책임을 맡겨주시니, 신은 명을 받고 감격하여 하늘을 우러러 눈물을 흘리면서 이 왜적들과 함께 살지 않기로 맹세하였습니다. 지난달 29일에 직산(稷山)에서 남쪽으로 달려가 이달 5일에 공주(公州)에 도착하였는데, 대가가 서쪽으로 행행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비록 도보로라도 호종의 대열에 끼어 말굴레 밑에서 죽고자 하였으나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신은 의리로 보아 차마 물러나 앉아 있을 수 없어 빈주먹으로라도 김수(金睟)를 따라 싸움터에서 죽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초유의 명을 받았으니 마음대로 임무를 저버릴 수 없어 백성들을 혈성(血誠)으로 개유(開諭)하고 충의(忠義)로써 격려하면 작은 힘이나마 얻어 나라를 위하는 신의 마음을 바칠 수 있겠기에, 잠시 죽음을 참고서 구차스럽게 모진 목숨을 보전하고 있습니다. 본도(本道)에 함락되어 패전한 뒤에 무너져 사방으로 흩어진 자들이 도망한 군사나 패전한 병졸만이 산속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대소 인원들이 모두 산속으로 들어가 새나 짐승처럼 숨어 있으니 아무리 되풀이해서 알아듣도록 설득해도 응모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근일에는 고령(高靈)에 사는 전 좌랑(佐郞) 김면(金沔), 합천(陜川)에 사는 전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이 그의 동지인 현풍(玄風)에 사는 전 군수(郡守) 곽율(郭), 전 좌랑 박성(朴惺), 유학(幼學) 권양(權瀁) 등과 더불어 향병(鄕兵)을 모집하니 따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인홍은 정예병(精銳兵)이 거의 수백 명이며 창군(槍軍)은 수천 명이나 되는데 고을의 가장(假將) 손인갑(孫仁甲)을 추대하여 장수로 삼아 왜적을 방어할 계책울 세우고 있고, 삼가(三嘉)에 사는 훈련 봉사(訓鍊奉事) 윤탁(尹鐸), 전 봉사(奉事) 노흠(盧欽)도 의병(義兵)을 일으켜 서로 응원하려고 합니다. 김면은 스스로 장수가 되어 바야흐로 병사들을 모집하는데, 적병들이 갑자기 쳐들어오자 병사들을 거느리고 나가 싸우니 왜적들이 패전하여 달아나므로 10여 리를 추격하여 거의 대첩(大捷)을 거두려는 찰나에 복병(伏兵)이 갑자기 나타나니 우리 군사가 놀라 무너져 퇴각하였습니다. 순찰사가 전 현령 조종도(趙宗道)로 하여금 소모관(召募官)을 삼으니 제법 많은 인민을 불러모아 여러 일들을 수습하였습니다. 또 의령(宜寧)에 사는 고 목사(牧使) 곽월(郭越)의 아들인 유생(儒生) 곽재우(郭再祐)는 젊어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습하였고 집안이 본래 부유하였는데, 변란을 들은 뒤에는 그 재산을 다 흩어 위병을 모집하니 수하에 장사(壯士)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가장 먼저 군사를 일으켜 초계(草溪)의 빈 성(城)으로 들어가 병장기(兵仗器)와 군량을 취득하니, 이때 동현(同縣)에 사는 정대성(鄭大成)이란 자가 무리를 모아 도적질을 하였으므로 합천 군수(陜川郡守) 전현룡(田見龍)은 재우까지 도적으로 의심하여 감사(監司)와 병사(兵使)에게 급히 통보하였습니다. 이에 감사와 병사가 마침내 명령을 내려 대성을 사로잡아 참수하니, 재우의 병사도 흩어졌습니다. 도사(都事) 김영남(金穎男)이 그는 도적이 아니라고 말하자 감사(監司) 김수(金睟)는 전현룡의 말을 믿지 않고 신으로 하여금 초유하도록 하기에 신이 즉시 공첩(公貼)을 보내어 재우를 부르니 며칠 뒤에 단성현(丹城縣)으로 신을 찾아 왔습니다. 그 사람은 비록 담력(膽力)과 용맹은 있으나 심원한 계책이 없으며 또 당치도 않게 큰 소리만 잘 칩니다. 패주한 수령(守令)이나 변장(邊將) 등의 소식을 들으면 꼭 참수(斬首)하라고 하여 심지어는 감사와 병사에 대해서도 불손한 말을 많이 하니 그를 비방하는 말이 비등하여 미친 도적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이런 위급한 때를 당하여 이런 사람을 잘 다루어 쓰면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기에, 즉시 동현(同縣)으로 보내 돌격장(突擊將)으로 칭호하여 그로 하여금 왜적들을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였더니 재우는 그 아비가 명나라 북경에 갔을 때에 황제가 하사한 붉은 비단 철릭(帖裏)을 입고서, 지금 장사(將士)들을 거느리고 의령현의 경내 및 낙동강 가를 마구 누비면서 왜적을 보면 그 수를 불문하고 반드시 말을 달려 돌격하니, 화살에 맞는 적이 많아서 그를 보면 바로 퇴각하여 달아나 감히 대항하지 못합니다. 왜적에게 사로 잡혔던 사람이 돌아와 ‘왜적들이 「이 지방에는 홍의 장군(紅衣將軍)이 있으니 조심하여 피해야 한다. 」고 했다.’ 합니다. 그러므로 의령 한 고을 사람들이 그에 힘입어 조금 편안해졌습니다. 신은 비록 그의 거친 것을 의심합니다마는 격려하고 권장하여 힘을 다하도록 하여 서서히 그의 하는 바를 살피겠습니다. 【재우(再祐)는 4월 24일에 의병을 일으켜 왜적들을 토벌하였다. 김천일(金千鎰) 등이 뒤에 비록 창의사(倡義使)로 이름하였지만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사람은 실제로는 재우이며 왜적들이 감히 정암진(鼎巖津)을 건너 호남(湖南)으로 가지 못하게 한 것도 바로 재우의 공이다. 재우가 김수가 싸우지 않고 점차 퇴각하는 것에 분격하여, 당초 의병을 일으킬 적에 김수에게 격문을 보내어 수의 죄를 일일이 따져 책망하고 수를 베려고 하자 수가 매우 두려워하여 심지어 치계까지 하여 변명하면서 재우의 일을 마치 역적처럼 말하니 비변사의 여러 사람들도 재우의 심사(心事)를 모르고 의심하였다. 그러자 재우도 이로 인하여 죄를 얻어 마침내 뜻을 펴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자기와 친한 사람을 의주로 보내 상소하기로 하고 수의 죄를 따져 책망한 말을 모두 열거하여 상소문을 만들고 ‘그는 아비도 무시하고 임금도 무시하여 불충 불효하며 패전을 기뻐하고 왜적을 맞아들였다.’고 하였다. 또 금관자(金貫子)를 잃어버리고 달아났으니 머리없는 시체 귀신이라고 수를 욕하니, 수가 마침내 성(城)을 지키면서 재우를 피하고 김성일(金誠一)로 하여금 그를 타이르게 하였다. 성일이 힘껏 저지하지 않았다면 수가 아마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수가 산음현(山陰縣)에 있다가 재우의 선봉이 이미 바싹 다가왔다는 소식을 듣고 함양으로 도망갈 때에는 심지어 말을 거꾸로 타고 달아나니, 좌·우도(左右道) 사람들이 수가 왜적에게 겁먹고 또 재우에게 겁먹은 것을 비웃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수가 전현룡(田見龍)의 말을 믿지 않았다는 것은 그럴 리가 없을 터인데, 지금 성일의 치계에 ‘김수도 역시 전현룡의 말을 믿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좋은 말로 아뢰어 서로를 화해시키려는 것인가보다. 】 진주(晉州)에 사는 유생 3백여 명이 또 서로 통문(通文)을 돌려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방어하기로 계획하였습니다. 비록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국가가 믿는 것은 인심이니 인심이 이와 같기를 하찮은 소신은 밤낮으로 하늘에 축원하였습니다. 변란이 발생한 초기에 도내(道內)의 병사(兵使)·수사(水使)·방어사(防禦使)·조방장(助防將) 등이 각 고을의 군기(軍器)들을 옮겨 전쟁터에 쌓아두었다가 무너져 달아날 때는 물이나 불속에 던져버리기도 하고 도중에 버리기도 하였기 때문에 병기(兵器)가 일체 없어졌으며, 창고 곡식은 수령(守令) 등이 왜적이 닥치기도 전에 먼저 스스로 겁을 먹고서 창고를 불사르기도 하고 혹은 백성들이 훔쳐 먹도록 내버려 두기도 하였기 때문에 군량도 일체 없어졌습니다. 의병이 비록 일어났어도 병기와 군량이 없어서 사람들이 견고한 뜻이 없어 적변(賊變)을 들으면 모였다가는 바로 흩어져 버립니다. 백방으로 생각해 봐도 도무지 병기와 군량을 조달해 낼 방도가 없으니 민망하기 그지없습니다. 왜적은 대부대가 서울로 떠난 뒤에 잔여 왜적이 혹은 1백여 명, 혹은 50∼60명씩 부대를 편성하여 곳곳에 둔취(屯聚)하고 있습니다. 성주성(星州城)을 점거하고 있는 적은 고작 40∼50명 뿐인데도 우리 병사가 감히 그 소굴을 엿보지 못하며 왜적이 목사(牧使)·판관이라고 자칭하고 관곡을 나누어 주니 백성들이 모두 복종하고 있습니다. 낙동강에 왕래하는 적선이 혹은 1백여 척, 혹은 수십 척 씩이나 강을 뒤덮고 끊임없이 오르내리는데 이는 모두 약탈한 물건을 운송하는 배들입니다. 또 한떼의 적들이 좌도(左道)의 경주·영천·신령(新寧)·의흥(義興)·군위·의성·안동 등지를 경유하면서 도처마다 함락하는데 감히 적의 예봉(銳鋒)을 감당할 수 없어 좌·우도의 길이 끊어졌으니 지금은 어느 곳으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도에 침범한 왜적의 한 패는 김해·창원·우병영(右兵營)·칠원(漆原) 등지를 약탈하여 소굴로 삼고, 또 한 패는 연해(沿海)의 여러 섬에 출몰하니 여러 진보(鎭堡)의 모든 장수들은 왜적을 바라만 보고 겁을 먹어 앞다투어 도망하여 육지로 나왔으므로 바다의 군영이 일체 텅 비어 버렸습니다. 우수영(右水營)은 수사(水使)와 우후(虞候)가 스스로 군영을 불태우고서 우후는 간 곳을 알 수 없고, 수사는 배 한 척을 타고서 현재 사천(泗川) 해포(海浦)에 우거하고 있는데 격군(格軍) 수십 명 이외에는 군졸은 한 명도 없습니다. 신이 보건대, 고성(固城)이 비록 함락되었지만 왜적이 이미 돌아갔고 군량도 있으니, 만약 수사가 성에 들어가 웅거하여 지킨다면 무너져 흩어진 인민들이 반드시 안집(安集)할 것이기에 두 차례나 수사에게 통문(通文)을 보냈더니 수사가 지난 19일 성으로 들어가 지킬 계획으로 고성현 지경에 배를 대자 전날의 왜적 1백여 명이 배반한 백성들을 거느리고 재차 와서 성을 점거하였으므로 결국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들으니 수사가 선전관 원전(元㙉)이 전한 명에 의하여 전라도 수사와 재차 약속하여 근간에 적선을 쳐부수려 한다고 합니다. 신의 망령된 생각에는 소소한 왜구는 그 배를 쳐부수어 돌아갈 길이 없게 한다면 궁벽한 산중에서 굶어 죽거나 혹은 변방 장수에게 섬멸당하게 될 것이니 진실로 좋은 계책입니다. 그러나 이번의 왜적들은 서울에 웅거하고 여러 도(道)에도 충만하니, 만약 빈 배를 쳐부순다면 적에게 손해를 입히지 못하고 다만 그들의 죽기를 각오하는 마음만 증가시킬 뿐이니 오랫동안 나라 안에 체류하며 백성들에게 해를 끼칠 것입니다. 거제 현령(巨濟縣令)은【김준민(金俊民). 】 성을 지킴이 가장 견고히 하고 있었는데, 순찰사(巡察使)가【김수(金睟). 】 근왕(勤王)할 일로 불러 현령이 겨우 육지로 나가자마자 군사와 백성은 무너져 흩어졌고 왜적이 성안에 가득하였습니다. 남해(南海)는 호남(湖南) 지경에 끼어 있어 왜적이 아직 출현하지 않았는데 현령 기효근(奇孝謹)이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에게 통보하기를 ‘본현(本縣)이 적진과 가까우니 왜적이 만약 이곳을 탈취하면 이곳에는 군량이 많기 때문에 오래 주둔하면서 반드시 호남을 침범하려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현령이 바다로 나간 사이에 그 군관(軍官)으로 하여금 창고를 다 불태우게 하니, 고을 백성 및 미조항(彌助項)·평산포(平山浦)로 들어왔던 군사들이 다 흩어졌습니다. 현령이 관아로 되돌아오니 다만 빈 성만 남아 있기에 부득이 보리를 거두어 군량을 마련하고 흩어진 군졸들을 수합하여 어렵게 성을 지키고 있는데 왜적이 쳐들어오면 반드시 먼저 무너져 흩어질 것입니다. 진해·고성은 전일에 파선(破船)이 되어 육지로 올라온 왜적 40여 명이 고을 경내에 출현하자 진해 현감은 먼저 도망하였습니다. 고성 현령 김현(金絢)은 부임한 지가 7년인데 형벌이 너무 가혹하여 민심을 잃은 지 오래이므로 진해에 적이 들어온 뒤에는 배반한 백성들이 사방에서 일어나 현령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현령은 그 기미를 알고서 복병을 배치해 놓고 거짓으로 도망한 체하니 배반한 백성들이 앞다투어 성안으로 들어가 관고의 물건들을 훔쳐내자 복병이 엄습하여 50여 명을 사로잡아 참수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백성들이 더욱 원망하여 배반하므로 현령은 수사(水使)와 일시에 바다로 나갔는데, 이때 적이 이미 입성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분탕질하므로 현령이 도망하였습니다. 함안 군수(咸安郡守) 유숭인(柳崇仁)은 장기간 전쟁터에 나가 있어 백성들이 흩어져 성이 빈 지가 거의 1개월이 되었는데도 왜적들이 아직 쳐들어오지 아니하였는데, 이달 중에 순찰사가 비로소 군수로 하여금 돌아가 그 고을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14일에 왜적들이 쳐들어와 여염집을 분탕질하자 군수가 흩어져 도망한 사람 1백여 명을 소집하여 연일 공격하니 왜적들이 어지간히 퇴각하여 흩어졌는데, 순찰사가 군수를 근왕한 일로 불러가자 왜적이 이미 온 군(郡)안에 두루 널렸습니다. 초계군(草溪郡)·합천군(陜川郡)은 군수가 혹은 처형당하고 혹은 체직당하였으므로 순찰사가 최몽성(崔夢星)·손인갑(孫仁甲)을 초계군과 합천군의 가장(假將)1421) 으로 삼았는데, 잇따라 치보하기를 ‘이달 16일에 적선 2백여 척이 강을 뒤덮고 초계 지방으로 올라와 상륙하여 도적질하니, 인민들은 달아나 숨고 최몽성은 군을 버리고서 산중으로 들어갔다. 18∼19일에 왜적이 연달아 합천 지경을 침범하였다.’고 했습니다. 병사(兵使)가 현재 거창에 있지만 휘하의 군졸이 다 도망하여 한 명도 없으므로 응원할 방책이 없습니다. 적이 만약 합천으로 들어온다면 내지(內地)에 보존된 너댓 고을이 차례로 함락당하게 될 것입니다. 대개 본도의 순찰사는 서울로 올라갔고 병사(兵使)는 군졸이 없으며 수사(水使)는 군영을 잃었고, 남은 고을로는 다만 거창·안음(安陰)·함양·산음(山陰)·단성(丹城)·진주·사천·곤양(昆陽)·하동·합천·삼가(三嘉) 등 10여 고을이 있을 뿐인데 인민들이 모두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다만 빈 성만이 남아 있을 뿐이어서 비록 수령(守令)과 가장(假將)이 있다 하더라도 호령이 시행되지 않아 군사를 조달하여 응원할 방책이 없으니 불원간 모두 적의 소굴이 될 것이므로 애통하고 절박한 상황을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신이 보건대 진주는 남쪽 지방의 거진(巨鎭)으로 양도(兩道)1422) 의 요충지에 위치하였으니, 이곳을 지키지 못한다면 이 일대에 보존된 여러 고을이 토붕 와해되어 조석(朝夕)을 보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적이 반드시 호남을 침범할 것입니다. 호남은 지금 근왕(勤王)으로 인하여 도내(道內)가 텅 비었으니 만약 또 적의 침입을 받는다면 더욱 한심하게 될 것입니다. 이곳은 바로 수양(睢陽) 1군(郡)이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이 된 것1423) 과 같으니, 오늘날 꼭 지켜야 할 곳입니다. 그런데 진주의 정병(精兵)이 이미 감병사(監兵使)에게로 갔다가 모두 무너져 산속으로 들어갔고 그 나머지로 성을 지키는 군사는 겨우 천여 명이며 아병(牙兵)으로서 활을 잘 쏘는 자도 겨우 60∼70명뿐입니다. 신은 진주에 머물면서 독려 조치하여 이 고을을 견고하게 지키도록 하여 호남 및 내지를 방어하는 계책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목사 이경(李儆)이 목에 종기가 난 지 1개월이 지나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은데 순찰사는 그가 실제로 아픈 줄을 모르고서 이미 주청하여 그를 파직시켰으므로 다만 판관 1명 만이 있을 뿐이어서 성을 지킬 장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신이 편의에 따라 진(鎭)을 버린 수령·변장 등을 수합하여 공을 세워 스스로 충성을 바치도록 분부하니 가덕 첨사(加德僉使) 전응린(田應麟), 고성 현령(固城縣令) 김현(金絢)이 스스로 나타나므로, 응린은 군관을 거느리고 곽재우와 함께 정암진(鼎巖津)을 지키게 하였으며, 현은 진주의 수성장(守城將)으로 임명하였습니다. 또 권관(權管) 주대청(朱大淸) 등도 왔기에 판관과 함께 성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병사(兵使)·수사(水使)가 패망한 뒤에 휘하에 한 명의 군졸도 없으니 성을 지키는 군졸들을 보내달라고 독촉합니다. 그러나 오합지졸이라서 성을 나가면 모두 흩어질 것이므로 피차간에 도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사유를 갖추어 관문(關文)을 보내고 진주에 현재 남아 있는 군졸에게는 전적으로 성을 지키는 일을 맡겨 호남과 이 지방 고을을 방어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이 또 생각하건대, 이 진주를 보존하려면 반드시 인근을 침범한 적을 공격하여야 병세를 펼칠 듯하기에 곤양 군수(昆陽郡守)를 중위장(中衛將)으로, 사천 현감(泗川縣監) 및 진주 판관(晉州判官)을 좌우 돌격장(左右突擊將)으로 삼아 정병 3백 명을 거느리고 가서 함안군에서 왜적을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연일 비가 내려 접전하지 못하였는데 적은 대군이 이른 것을 바라보고는 곧 퇴각하여 흩어졌습니다. 잠시 후에 왜적 1백여 명이 또 고성(固城)을 침범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고성은 진주와 사천에서 매우 가깝기 때문에 부득이 회군하여 합동으로 공격하였은데, 적이 배반한 백성을 거느리고 현성(縣城)에 웅거하여 철환(鐵丸)을 많이 쏘고 또 배반한 백성을 시켜 활을 마구 쏘도록 하니 관군이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도내(道內)에 감사(監司)가 없으니 모든 적변(賊變)을 당연히 신이 아뢰어야 합니다. 신이 도내에 있으면서 여러 성이 함락된 사유와 여러 장수들이 패전한 상황을 목격하였는데, 말하는 자는 모두 ‘군졸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적과 대진하자 무너져 흩어졌기 때문에 장수가 속수 무책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이 본 바로는 좌수사(左水使) 박홍(朴泓)은 화살 한 개도 쏘지 않고 먼저 성을 버렸으며, 좌병사(左兵使) 이각(李珏)은 뒤이어 동래(東萊)로 도망하였으며, 우병사(右兵使) 조대곤(曺大坤)은 연로하고 겁이 많아 시종 물러나 움츠렸고, 우수사(右水使) 원균(元均)은 군영을 불태우고 바다로 나가 다만 배 한 척만을 보전하였습니다. 병사와 수사는 한 도(道)의 주장(主將)인데 하는 짓이 이와 같으니 그 휘하의 장졸(將卒)들이 어찌 도망하거나 흩어지지 않겠습니까. 양산(梁山)의 가장(假將) 밀양 부사(密陽府使) 박진(朴晉)도 창고와 병기(兵器)를 불태우고 도망하였습니다. 【그 때에 경상우도 방어사 조준(趙俊)의 종사관 이수광(李睟光)이 말하기를,“박진(朴晉)이 밀양 부사로서 왜적이 크게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성을 지키다가는 반드시 빠져나가지 못할 것으로 여겨 도망갈 계책을 내어 황산(黃山)으로 잔도(棧道)에서 왜적들을 방어하겠다고 핑계하고서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나가 그대로 도망갔다.” 하였다. 영남 사람들은 오로지 밀양의 방어만을 믿고 있었는데 밀양이 이미 스스로 무너지자 적은 아무 장애도 없이 승승 장구하였다. 비록 그때 왜적의 기세가 하늘을 뒤덮었지만 그들의 승승 장구하는 기세를 펼치도록 한 것은 실로 박진의 소치였다. 진은 순찰사가 군령을 집행할까 두려워 감히 바로 순찰사 앞에 나타나지 못하고 순찰사가 근왕(勤王)하는 일로 충청도에 도착하자, 진은 그의 친한 사람을 시켜 순찰사에게 통정(通情)하도록 하여 군령을 집행하지 않을 것을 안 뒤에야 비로소 나타났다. 순찰사도 역시 실지는 형벌을 시행할 뜻이 없어 진을 뜰 아래에 꿇려 놓고 잠시 꾸짖는 말을 하고는 즉시 풀어주었다. 대개 순찰사는 진과 서로 친하였기 때문에 비록 거느린 휘하의 여러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는 부득이 약간 꾸짖는 말을 보였지만 일찍이 치계한 말에서는 진이 공로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조정에서는 그 곡절을 모르고서 죄를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상까지 주어 당상으로 승급시켜 병사(兵使)로 삼기까지 하였다. 뜰 아래에 꿇렸던 그 이튿날, 병사로 제수하는 관교(官敎)가 이르니 진이 순찰사에게 하직하고 영남으로 도로 내려갔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에 대하여 말한 이가 없었으되 유독 성일(誠一)만이 이렇게 직절(直切)한 말을 하였다. 왜적을 정벌하는 명나라 장군들이 한창 창궐하는 왜적을 이미 물러갔다고 천자께 거짓 주달하니 우리 나라 사람들은 모두 천자를 속인다고 하였다. 우리 나라는 작은 나라여서 이목(耳目)이 미치지 않는 바가 없는 데도 이와 같은 것이 있으니, 이로써 말한다면 옛날 사람들의 변공(邊功)에도 더러 이런 거짓된 일이 있었을 것이다. 진(晉)은 얌전하고 아담하여 선비같을 뿐 기국이 협소하여 많은 무리를 부릴 만한 재주는 없었다. 왜적이 동래를 함락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작원(鵲院)으로 나가 진을 치고서 황산(黃山)의 잔도(棧道)를 방어하였는데 바야흐로 싸울 때에 이각(李珏)이 화현내(化縣內)에 있다가 먼저 도망하니 왜적이 포위하여 진의 후편으로 나오려고 하였다. 그러자 진은 대적할 수 없음을 알고 밀양으로 달려와서 먼저 창고와 군기(軍器)를 불사르고 어미와 아내를 피란시킨 다음 몸소 수하의 정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풍찬 노숙하면서 왜적이 가는 곳마다 출몰하여 응원하고 계속 왜적의 형세를 신속히 통보하였다. 본도에서는 당초에 진이 밀양을 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들 말하기를,“나이 젊은 무부(武夫)가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고서 위급해지자 성을 버렸으니 그 죄는 주살(誅殺)하여야 마땅하다.” 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성을 나온 뒤에는 하루도 편히 쉬지 않고 하루도 갑옷을 벗지 않고서 동서로 달리며 칼날을 무릅쓰고 돌진하여 싸웠다. 왜적이 이미 온 도내에 가득하여 여러 고을의 모든 장수들이 한 사람도 제 고을에 있는 이가 없었으나 유독 진만이 이와 같이 하니 영남에서 온 사람은 진의 공을 대단히 칭찬하였고, 전후의 장계도 모두 진의 통보에 의하여 왜적의 실정을 아뢰게 되었으니 조정에서도 그를 가상하게 여겨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상이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진의 하는 일을 보니 이미 사생(死生)을 각오하고서 반드시 적과 싸워 죽으려고 작정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가엾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르기를,“진이 죽는다면 의사(義士)가 아니다. 영남에 진이 없다면 국가가 보전될 수 없는데 진이 어찌 작은 절개를 위하여 국가의 큰 계책을 잊어서야 되겠는가. 그러니 적을 따라 진퇴하는 것만 못하다. 어찌 초야(草野)에서 죽어서야 되겠는가.” 하였으니, 당시 진을 의뢰하여 소중하게 여김이 이와 같았다. 바야흐로 진이 작원(鵲院)에서 패전하여 돌아올 적에 도중에서 굶주려 수하의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민가(民家)로 달려 들어가니, 언양(彦陽)의 선비 세 사람이 막 음식을 성대히 마련하여 왜적을 맞이하려다가 진 등이 온 것을 보고 두려워 어떻게 할 줄을 몰라했다. 진은 손수 그 선비들을 참수하였는데, 그중에 한 사람은 전일에 학행(學行)으로 계문(啓聞)되어 누차 전조(銓曹)의 주의(注擬)에 참여되었던 자이다. 이 뒤로부터 진은 선비를 만나면 반드시 조롱하기를,“학행으로 칭송된 자가 위급할 때를 만나 이 꼴이니 그 학행이라는 것을 내가 알 만하다.” 하였다. 김성일(金誠一)이 초유사(招諭使)가 되어 온 도의 관병을 전관(專管)하면서 진에게 통제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금하려고 공문을 보내 꾸짖자, 진이 회보(回報)하기를,“나이가 젊은 무부라서 사체를 모릅니다마는 본직(本職)을 제수한 관교(官敎)를 보니 ‘경상도 병마 절도사로 삼는다.’고 하였으니 본도의 병마를 본인이 통제해야 합니까? 초유사가 통제해야 합니까? 반드시 먼저 이 문제를 논하여 결정한 뒤에야 일이 하나로 귀착되겠습니다.” 하니, 성일이 화를 내었다.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켜 김수를 공격하려고 할 때 진이 병사(兵使)로서 좌도에 있었는데 수와 재우에게 공문을 보내기를,“광생(狂生)이 본성을 잃어 이런 불궤(不軌)한 말을 한 것이니 모두 사실이 아닐 것입니다. 만약 정말로 이와 같다면 병사가 아무리 용렬하지만 군관 10여 명을 보내어 재우를 결박하여 산 채로 휘하에 바치겠으니 순상(巡相)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이 때문에 본도(本道)의 선비들이 대부분 진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단점을 들어 헐뜯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중에 유식한 사람들은 모두,“영남에 진이 없었다면 결국 왜적의 소굴이 되었을 것이다.” 하였다. 만약 진이 국량이 협소하여 많은 무리를 다스릴 만한 재주가 없다고 한다면 모르지만, 종시(終始)에 세운 일체의 공까지 모두 허망한 것이라고 한다면 옳지 않다. 】 해중(海中)의 여러 고을들이 왜적의 배를 바라보고는 일시에 달아나 흩어져 육지로 나와 장수는 도주하는 것으로 상책(上策)을 삼고 수령(守令)은 성(城)을 죽는 지역으로 여기는데, 온 도내가 다 그러하여 적들로 하여금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파죽지세로 수십 일 동안에 서울에 들어오게 하였으니, 예로부터 남의 나라의 수도를 이렇게 쉽게 함락한 것이 오늘날과 같은 적은 없었습니다. 군법이 만약 엄중하여 패전한 자는 반드시 죽이고, 나아가지 않고 머뭇거린 자를 반드시 죽이며, 성을 포기한 자를 반드시 죽이며, 또한 변란이 발생한 뒤에 장수가 군법을 잘 시행하여 범죄자를 즉시 참수하였다면, 사람들이 후퇴하면 반드시 처형당한 줄을 알았을 것이니 어찌 오늘날처럼 달아나 무너지는 데까지 이르겠습니까. 장수나 수령 등을 처벌하지 않고 도망한 군졸들만 처벌하는 것은 아무래도 근본이 아닌 듯합니다. 신이 지금 성지(聖旨)를 받들어 흩어져 도망한 사람들을 초유(招諭)하여 돌아와 모이도록 하니, 유식한 부로(父老)나 유생(儒生)들이 모두 ‘백성들도 이대로 있다가는 끝내 반드시 죽게 될 것임을 알고서 모두 스스로 분기(奮起)할 것을 생각하고 있지만, 도내에 장수가 없으니 우리들이 비록 나가더라도 누구에게 의뢰하여 성공할 것인가.’고 하기에, 신도 어떻게 답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근래에 부역(賦役)이 번거롭고 무거워 백성들이 편히 살 수 없는 데다가 형벌마저 매우 가혹하므로 군졸이나 백성들의 원망하는 마음이 뱃속에 가득한데도 호소할 길마저 없어 그들의 마음이 이산된 지 벌써 오래입니다. 그러므로 왜국은 정수(征戍)나 요역(徭役)이 없다는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이미 그들을 좋아하고 있는데 왜적이 또 민간에 명을 내려 회유(誨誘)하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모두 왜적의 말을 믿어 항복하면 반드시 살고 싸우면 반드시 죽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므로 연해의 무지한 백성들이 모두 머리를 깎고 의복도 바꾸어 입고서 왜적을 따라 곳곳에서 도적질하는데 왜적은 몇 명 안되고 절반이 배반한 백성들이니 매우 한심합니다. 지난번 애통해 하시는 교서가 내리자 들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인심이 쉽게 감동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관대한 명령을 내리어 전쟁이 평장된 뒤에는 요역을 경감하고 부세를 가볍게 하며, 형벌을 완화하고 옥사(獄事)를 느슨히 하며, 진공(進貢)을 감축하고 포흠을 면제하며, 일족(一族)이 연대 책임지는 법을 제거하고 공적을 세운 장수에 대한 율(律)을 소중히 하여 일체 군민(軍民)에 해가 되는 것은 모두 면제하겠다고 약속하여, 국가가 구습을 개혁하고 백성들과 다시 시작한다는 뜻을 알게 하면 백성들의 마음이 거의 감격하여 기뻐할 것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이미 기뻐하면 하늘의 뜻을 돌이킬 수 있으며, 왜적이 아무리 창궐한다 해도 섬멸의 공을 거둘 날이 멀지 않을 것입니다. [註 1421]가장(假將) : 임시 장수. ☞ [註 1422]양도(兩道) : 호남과 영남. ☞ [註 1423]수양(睢陽) 1군(郡)이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이 된 것 : 당(唐)나라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 장순(張巡)·허원(許遠)이 수양성을 사수하여 적의 남하(南下)를 저지한 고사로 그와 같은 전략적 요충지임을 비유한 것임. ☞ 선조 2권, 1년(1568 무진 / 명 융경(隆慶) 2년) 5월 10일(기미) 1번째기사 전라 감사가 유일을 천거하라는 전교에 따라 김천일·나사침을 아뢰다 전라 감사의 서장(書狀)에, “유일(遺逸)의 선비를 천거하라는 유지(有旨)에 따라 각 고을을 조사하니, 나주 목사(羅州牧使) 한복(韓輹)의 첩정에 ‘생원(生員) 나사침(羅士忱)이 어미 신병이 여러달 낫지 않고 치료할 방도가 없어 고민하다가 손가락을 끊어 물에 타 드렸더니 어미 병이 곧 나았는데 이미 중종조에서 그 사실을 듣고 정표(旌表)하였다. 사람됨이 성품은 진실하고 순후하며 학문과 행실을 모두 갖추어 부모 형제 사이에 그르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일처리나 사물(事物)을 대할 때엔 믿음과 의리를 아울러 행하였고, 부모상에는 오로지 예법을 따랐으며, 전상(前喪)이나 후상에 모두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한번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추모하는 일을 반드시 삼갔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였으며 일찍부터 과거 공부를 폐하여 출세를 구하지 않으니, 온 고을 사람들이 그의 행실에 감복하였다. 김천일(金千鎰)은 기질이 온화하고 순수하며 학문에도 힘썼다. 일찍 부모를 여의어 외조모에게서 자랐는데 슬하를 떠나지 않고 친어미 섬기듯 하였으며 돌아간 다음에는 심상(心喪) 3년을 치루면서 죽으로 연명하기까지 하였으므로 듣는 사람마다 공경하고 심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선조 2권, 1년(1568 무진 / 명 융경(隆慶) 2년) 6월 9일(정해) 2번째기사 헌납 최옹과 유희춘이 김천일을 강력히 추천하다 헌납 최옹이 아뢰기를, “호남에 묻혀 있는 선비 김천일(金千鎰)은 학식과 품행이 매우 탁월한데도 관직에 서용되는 반열에 오르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흠사(欠事)입니다.” 하자, 유희춘이 앞으로 나와 이르기를, “김천일이 뜻을 독실히 갖고 마음 공부를 한다는 것을 신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나이가 겨우 32세로서 한창 학문을 해야 할 때이고 또한 질병이 많아 헛된 명성으로 벼슬길에 나오기를 원치 않는 것이 마치 칠조개(漆彫開)의 마음가짐77) 과 같습니다. 우선 그대로 두고 배양시켜 대성(大成)하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고 급작스레 소소한 관직에 써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 선조 7권, 6년(1573 계유 / 명 만력(萬曆) 1년) 6월 3일(신해) 2번째기사 삼공 이하가 초야에 있는 조목·이지함·정인홍·최영경·김천일을 추천하다 삼공(三公)과 이조(吏曹)가 같이 의논하여 이조의 낭청(郞廳)이 아뢰기를, “암혈(巖穴)에 은둔한 선비는 신들이 아직 들은 바가 없으므로 감히 논천(論薦)할 수 없으나, 우선 지금 학행(學行)이 두드러지게 알려진 전 참봉(參奉) 조목(趙穆), 학생(學生) 이지함(李之菡), 생원(生員) 정인홍(鄭仁弘), 학생 최영경(崔永慶)·김천일(金千鎰) 5인을 초계(抄啓)합니다. 이 사람들에게 관례에 따라 참봉(參奉)의 말직(末職)을 준다면 각별히 거두어 쓰는 뜻에 맞지 않을 듯하니, 참상(參上)의 상당한 벼슬을 제수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선조 7권, 6년(1573 계유 / 명 만력(萬曆) 1년) 6월 5일(계축) 1번째기사 홍혼·조정기·박점·김천일·신점·윤희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날 정사가 있었다. 홍혼(洪渾)을 정언(正言)으로, 조정기(趙廷機)를 교리(校理)로, 박점(朴漸)을 부수찬(副修撰)으로, 김천일(金千鎰)을 군기 주부(軍器主簿)로, 신점(申點)을 수찬(修撰)으로, 윤희길(尹希吉)을 헌납으로 삼았다. 선조 7권, 6년(1573 계유 / 명 만력(萬曆) 1년) 6월 5일(계축) 2번째기사 대신이 천거한 5인에게 6품직을 내리다 대신들이 천거한 선사(善士) 5인 중에서 상중(喪中)에 있는 조목(趙穆)을 제외한 이지함(李之菡)·정인홍(鄭仁弘)·최영경(崔永慶)·김천일(金千鎰)은 다 6품(品)의 벼슬을 받았다. 선조 28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7월 20일(정축) 3번째기사 비변사의 회계에 따라 김천일을 창의사라고 호칭하다. 전교하기를, “김천일의 칭호에 대한 일을 의계(議啓)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이런 급난한 때를 당하여 진실로 칭호가 없으면 체통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김천일은 창의사(倡義使)로 칭호함이 타당합니다. 공조 참의 고경명은 이미 김천일과 함께 동시에 창의(倡義)하였으니, 사신(使臣)이라는 칭호에는 다른 점이 없을 듯합니다. 초토사(招討使)로 칭호하고 절제(節制) 등의 일에 있어서도 똑같은 예로 시행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선조 28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7월 24일(신사) 4번째기사 창의사 김천일의 장계를 가져온 곽현 등을 인견하여 전라도 의병 상황을 묻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이 그의 막하(幕下) 군사 양산숙(梁山璹)·곽현(郭賢) 등에게 장계를 주어 행재소로 보내었다. 상이 곽현·양산숙 등을 인견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유근(柳根), 가주서(假注書) 강욱(康昱), 봉교(奉敎) 기자헌(奇自獻). 】 상이 이르기를, “그대들은 어느 곳으로 왔는가?” 하니, 현이 아뢰기를, “풍천(豊川)에서 삼화(三和) 큰 나루를 건너서 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들은 험한 도로를 애써서 왔는데 앞으로 어떻게 돌아가겠는가?” 하니, 현 등이 울면서 아뢰기를, “소신들이 어려서부터 문(文)을 업으로 삼았으나 어느 한 과거에도 합격하지 못하여 평소에는 용안(龍顔)을 뵙지 못하였는데, 이제 난리 가운데에서 모시게 되었으니 신들은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들의 의병이 1천 명이라 하니 어찌 그렇게 적은가?” 하니, 현이 아뢰기를, “신들이 여기에 온 뒤에 반드시 많은 군사가 모였을 것입니다. 또 방어사(防禦使)·조방장(助肪將) 등 정령(政令)이 여러 곳에서 나오는 까닭에 수령들이 따를 바를 모르고 있고, 장수된 자는 재물을 빼앗고 못살게 하는 것으로 일을 삼기 때문에 군정(軍情)이 이반되어 있습니다. 이광(李洸)은 죽어도 남은 죄가 있고, 권율은 수령의 재주는 있으나 방백(方伯)의 지략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런 때에 사람을 얻기가 어려운 까닭에 임명한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왜적이 전라도는 침범하지 않았는데 무엇을 두려워하여 그러는 것인가?” 하니, 현이 아뢰기를, “이는 천행입니다. 그러나 왜적이 힘을 합하여 공격할까 두렵습니다. 또 곽재우(郭再祐)는 사인(士人)으로서 군사를 일으켰는데, 근왕(勤王)하려는 뜻은 있으나 반드시 공(功)을 바란다는 혐의를 피하기 위하여 감히 오지 않는 것입니다. 재우의 공이 적지 않으니 글을 내려 권장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의 장수에게 말하여 경성(京城)을 수복(收復)하고 나를 맞이하여 돌아가도록 하게 하라.” 하니, 현 등이 그칠줄 모르고 눈물을 흘렸다. 상이 술을 내리고 또 약봉(藥封)도 하사하였다. 선조 31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10월 13일(기해) 1번째기사 강원도에 우상을 보내는 일과 최원의 군사에게 의복을 지급하는 일을 논의하다 상이 정원에 전교하기를, “우상을 강화로 보내야 하겠지만 강화에는 이미 도순찰사(都巡察使) 권징(權徵)이 있고 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이 있다. 우상을 가게 한다 하더라도 용이하게 조처할 만한 일이 별로 없을 것이다. 강원도는 꼴이 말이 아니어서 감사는 달아나버리고 병사마저 없으니 우상을 그 곳으로 보내면 어떻겠는가? 또 듣건대 최원(崔遠)의 군사가 모두 짚이나 풀로 만든 옷을 입고 있다 하는데, 이런 상태로 어떻게 적을 토포(討捕)할 수 있겠는가. 만일 동사자라고 생긴다면 매우 측은한 일이니, 돌려보내는 것이 온당할 듯하다. 본도로 하여금 다시 군사를 뽑아 대체시키게 하라는 뜻으로 비변사에 이르라.” 하였는데,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강화도에는 피란민이 많이 모여 있습니다. 정철이 마침 그곳을 지나 피란민들이 모두 ‘대신이 와서 다스린다면 수복의 계기가 될 것이다.’라는 말을 한다고 해서 우상을 보내자고 청하였던 것입니다. 강원도는 곳곳이 잔폐되었고 또 성자(城子)도 없습니다. 대신을 보낸다 하더라 일을 할 수가 없으니 대신을 보내어 다스리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최원의 군사는 여름에 이곳으로 왔는데 이제 눈내리는 시절이 되었으니 쓸모가 없을까 우려됩니다. 교체하려 하였으나, 이번에 듣건대, 본도(本道)에서 의복과 군량을 준비하여 보낸다고 합니다. 지금은 우선 머무르게 하였다가 후일의 성공을 살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선조 32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11월 16일(임신) 4번째기사 조현범이 소혜 왕후의 위판을 가져왔다고 김천일이 보고하자 군직 제수를 명하다 서리(書吏) 조현범(趙賢範)이 소혜 왕후(昭惠王后)의 위판(位版)을 보관했다가 친히 가지고 왔다고 창의사(倡義使) 김천일이 아뢰니, 상당한 군직(軍職)을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처음 도성을 출발할 때에 묘사(廟社)의 신주만 싣고 떠났으며 원묘(原廟)의 위판은 땅속에 묻었는데 적이 입성(入城)하여 파내 땅에 깔려 있는 것을 도성의 유식한 사람들이 거두어 보관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그걸 훔쳐 짊어지고 온 자는 조정에서 모두 포상하였다. |
출처 : 언양 김씨 종친회
글쓴이 : 國峯 김종식(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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