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행복이 행복이 아닐 때가 있는가 하면
불행이 더 큰 불행을 막아줄 때면
마치 미리 예방주사가 큰 질병을 막아주듯
시련이 불행하다고만 할 수 없을 때도 있다.
극단적인 예지만 로또 당첨으로 자기 이기주의에 빠져
가정이 파탄 나고 아주 인생이 망가진 자도 있고
조그마한 시련이지만 큰 깨우침을 얻어 사전에 큰 불행을 막고
전화위복이 된 경우도 있고 주변에는 이런 사례들이 숱하게 있다.
생각해보면 누구나 이와 비슷한 사례를 겪고 살아왔건만
내 틀(아집)에 갇혀 깨닫지 못하고 살아간다.
아직은 그 절박함을 모르기에 고집대로 가고 있지만
막다른 골목에 다 달으면 그 후회 막심하며 이미 때는 늦다.
이렇게 깨달음의 기준이 되는 삶의 기치관은
시대따라 인격.품격따라 저마다 다를 수가 있다.
그래서 행복과 불행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요지경 세상이다.
지나온 과거를 생각하면 아쉬움이 있지만 그때는 그것이 최선 이였다.
그래서 과거는 과거 현재를 잘살아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왜 그럴까 생각과 말과 행동이 체면과 욕심 때문에 다르기 때문이다.
지역감정 배제하자며 선거 때 마다
모두가 그렇게 외쳐왔건만 결과는 아직도 글쎄요??다.
여러 분석을 내 놓지만 변명과 자기합리화이고
다음선거를 위하여 그냥 듣기 좋은 소리만 한다.
개인적으로도 이론(말)과 행동이 다를 때가 있다
이것이 이중성이고 그 정도가 심하면 이상한 사람이 된다.
학년 지연 혈연에 억매일 때면 공정? 정의? 라는 말은 뒷전이다.
좋은 말로 하면 인지상정(人之常情) 온정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온정주의가 당장은 편안하고 행복하지만 개인도 사회도 불행해진다.
선진국과 다른 점은 여기서 확연히 차이가 난다.
그래서 아직도 빽이니 연줄이니 하는 말이 횡횡하고
고위층을 사칭하는 사기도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사기친자도 당한자도 사칭대상에 오른자(기관)도 모두 문제가 있다
즉 삼위일체가 되었기에 이런 것이 통하지
하나라도 반듯하다면 통할 리가 없다
대중매체 앞에서는 도덕과 인성을 말하지만
청문회장이나 비리가 들통 날 때를 보면 한심하다.
그래도 선거에 나오면 당선되니 우리의 이중성을 잘 보여준다.
제도적으로는 주민소환. 지방자치. 청문회 기타 등등.....
민주주의에서 좋다는 것은 다 갖추었다.
문제는 운용의 묘인데 이중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 나물에 그 밥이라 할까 지도층도 유권자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