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충효체함관에서 충론 김응상을 검색하면 찾을 수 있는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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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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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혼 김응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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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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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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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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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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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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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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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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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충청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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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임금 때의 명장 김응상은 자가 서백이고 관향은 언양이다. 서백은 고려 명장 취려의 후예이며 5대조의 자는 이조참판이요, 현감 덕윤의 아들이다. 후손들의 말에 따르면 대대로 구차산 이남면 천흥리에서 거주하였다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선천적으로 문무재략에 뛰어났다. 활쏘기를 잘했으며 말타기 또한 즐기나 그 솜씨가 날로 발전해 많은 사람들의 칭찬과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다 한다. 당시 조정에서는 종계변무로 명예주청사를 보내게 되었다. 이때 응상은 장인 의성군 황림이 주청사로 갈 적에 따라갔다가 일이 잘되어 성공하고 돌아오니 광국원종훈에 책훈되었다.
그후 선조 16년에 두만강변에서는 여진의 일대 침구가 일어났다. 세종때 육친을 설치하여 방비가 튼튼했던 곳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국기가 해이해지고 여진족들은 종종 난을 일으켜 그때마다 조정에서는 많은 군대를 보내어 물리쳤는데 이 해에는 여진족의 추장 이탕개가 진장의 대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경원부로 입구하고 아산 안원을 점령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조신들에게 능히 오랑캐를 맞아 싸울 사람을 천거하라 하니 곽홀이 김응상과 이종, 유극량 세 사람을 추천하였으며, 재신 남치훈은 응상과 이순신을 천거하였다. 하루는 북보(北報 - 압록강변사태)가 매우 위급하자 임금이 「김응상과 이순신은 어디 있느냐?」물으니 「연신 이순신은 고향에 있으며 응상은 지금 서울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임금은 응상을 급히 소명입시하라고 하고 편전으로 불러 절제사를 제수 하셨다. 또 임금님은 그를 편전에서 인견 하시고 패검을 내려 우례로 대접하시니 응상은 감격하여 멸사보은 할 것을 다짐하고 병정을 이끌고 육진에 당도하여 싸우니 사기는 충천하여 싸울 때마다 승전하였다.
얼마가지 않아 소탕하게 될 무렵 진에 머물러 잠시 군대를 수습하는 동안 적병이 돌연 급습하여 왔다. 절제사 김응상은 죽음을 각오하고 응전하여 도망가는 것을 한사람도 남기지 말 것을 외치며 도망가는 적을 따라 가던 중 화살이 그에게 박히자 화살을 뽑아 내던지면서 좌우에 명을 내려 "내가 다쳤다 하지 말라 적이 나를 가볍게 볼까 두렵다"하였다. 그리고 종일 혈전하더니 마침 등창을 앓고 있던 중이라 부상까지 입어 선조 16년(1583년) 2월 13일에 절명하였다.
조정에서는 애도의 뜻을 표하고 좌승지를 특중하고 부상의 편의를 돌보아 주는 한편 3년 상기가 지나자 그 아들에게 관작을 제수 했다. 후에 순절록에 이순신, 고경명 등 21명이 수록되었는데 여기에 응상도 함께 기록되었다.
응상의 후손은 대대로 융성하여 읍중에 망족이며 6세손 경연, 의연히 효로서 저명하여 의연은 교관에 증직되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응상이 육진에서 전사하였을 때 그의 애마가 시신의 일부를 몰고 와 전사하였음을 알려 주었다는 것이며, 그의 묘소 앞에는 말 무덤도 있다고 한다. 현대 성거읍 성거산 아래에 묘소와 묘비가 있다.
김응상이 전사한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이없게도 동래, 상주, 충주의 싸움에서 패하여 선조가 의주로 몽진하게 되었을 때, 김응상이 살아있었더라면 이렇게 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라 하며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았다 한다.
당시 남치훈이 지목한 것처럼 김응상과 이순신이 당대 제일의 군략가이었으므로 아마도 김응상이 전사하지 않았다면 임진왜란이 다르게 전개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모두가 국운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후일 직산 장보들이 김응상등 직산 출신으로 전몰한 다섯 분을 모시는 오충사를 지으려고 조정의 윤허까지 얻었으나 사당 건립 자금을 마련하지 못하여 세우지 못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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