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기 마당/내 이야기

사상(四相)과 인간 생활

산울림(능인원) 2024. 10. 19. 09:00

  불생불멸하는 이 마음자리는 어제는 이 모양이고, 오늘은 이 모양이고 내일도 천만년 전후에도 지옥에 갔을 때나 천당에 갔을 때나 성불한 뒤나 똑같은 마음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본래의 성품에 두 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 생겨나고 하는 허망무상한 것이지만 이 마음자리는 중생 때나 부자가 되었을 때나 다 같이 여여부동한 자리이기 때문에 온 중생이 다 평등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부처님의 말씀을 정말 따르는 사람이라면 남을 위해 조건 없이 희생하는 것이 내가 부처되는 방법이고 번뇌를 해탈하는 방법임을 알아야 한다.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거나 무심한 가운데 하고 실패하거나 성공하거나 그것에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 이 현실은 마음에 생긴 꿈이니 집착하지 말고 살아야 된다. 사람이 마음속에 공포증이 조금이라도 있거나 욕심이 조금이라도 앞서 있다면 자기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가령 테니스장 앞을 지나던 선수가 친구의 권유로 아무 부담 없이 잠깐 쳐보려는 마음으로 테니스를 친 것이 아주 잘되어 본인 10년 동안 친 테니스 중 제일 잘 되었다고 한다면 왜 그러냐 하면 꼭 이겨야겠다는 욕심이 생기면 안 된다는 것으로 부담이 전혀 없이 무심한 가운데 쳤기 때문에 그리된 것이다.  사람이 무심한 자성자리에 있으면 초능력이 나오고 묘기도 나오는 것이다. 또 권투나 축구나 마찬가지이다.

기술을 연마한다는 것은 알고 보면 본래 만능이었던 마음자리가 안심이 되어 제 기술이 발휘되는 것이다. 집중력이 잘 되어 공부가 잘된다는 이야기는 다른 생각(망상)을 그만치 안 하고 본래의 성품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무심만 되면 세계 최고의 기술도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 조건 없이 무심한 가운데 마음이 머무는 것이 없는 가운데 하는 보시는 무량 무변한 공덕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무한대의 복덕을 얻게 된다고 하였다.

  그럼 사상(四相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과 우리들의 생활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앞에서 언급한 바 있거니와 육체가 ‘나’라는 생각을 버리고 육체 본위의 생활을 정리하고 하루 종일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해서 살던 생활을 돌려 남을 위해 사는 생활로 차차 전환해야 한다.  내 욕심 생활에서 진리를 위해사는 생활로 바뀌어야 된다. 그것이 결국 내가 영원히 잘되는 생활이 되는 것이다.  남을 잘되라고 해야 내가 잘 된다.

  불교의 생활은 세속생활과 반대라 할 수 있다.  세속 생활은 대체로 나와 내 가족을 위한 생활이지만 불교의 생활이란 남을 위한 생활이다.  남을 돕는 것이 내가 나아지는 길이 되고 남을 존경하면 결국 내가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다. 남을 해치면 결국 내가 해를 받는 것이 된다.  살생으로 남의 목숨을 많이 끊으면 내가 단명 해지고 몸도 많이 아프게 된다. 이 간단한 이치를 모르고 고통바다에서 헤매니 안타까운 일이다. 또는 알기는 하지만 잊어버리고 막상 생활 일선에 나서면 육심 부리고 나를 내세우고 집착하게 된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라 했다.  세속적인 생각은 많이 잊어버리고 진리적 생활을 하도록 습관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차차 남만을 위해서 사는 보살행을 하여야 된다. 보살행은 위로는 부처님의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인데 보리라 함은 생사의 열반도 없고 시간 공간도 초월하고 부처도 중생도 초월하여 초월했다는 생각까지 떠난 상태가 된다.  이것을 깨친 마음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보리를 이루어 무심한 마음으로 오직 중생을 위해 봉사하는 생활을 보살행이라 하는 것이다.  이 마음을 깨달아 놓으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에 하루 종일 밥도 안 먹고 이야기해도 괴로워하지도 않고 배고픈 것도 모르게 된다.  또 마음을 전한다는 것은 불입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 했다. 말이나 문자를 가지고 설명할 수 없으므로 부처님께서 가섭존자에게 이심전심의 법으로 전하셨다고 한다.

  그러면 사상(四相)과 우리 일반인 하고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살펴보겠다. 한국사람은 대체로 상(相)이 많다고 한다.  금강경은 상을 파하는 경이기 때문에 우리 국민과 잘 맞는다고 본다.  그래서 그런지 조계종에서도 금강경을 소이경전으로 삼고 있다. 우리나라는 중세조선시대 500년간 유교 윤리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인 체면이나 위신을 많이 채우려 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대부 집안에서 어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하고 양반이 상놈하고 벗할 수 없다 하며 차별하고 학대하고 물론 민주화 시대인 지금이야 많이 변모되었지만 그 밑바닥 근처에는 뿌리 깊은 사상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없어도 있는 척 몰라도 아는 척 이 ‘척’하는 병에 걸리게 된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농촌 젊은이에게 직업이 뭐냐고 물으면 그냥 놀고 있다고 답변한다.  그러니까 농사는 직업으로 취급도 안 한다.  왜 그럴까.  그뿐 아니라 도시에 초등학교 4 ~ 5학년 아동에게 아버지 직업이 뭐냐고 물으면 아버지 직장이 좋다고 생각되는 아동은 우리 아빠 시청에 다녀요.  또는 무슨 회사 과장이에요 하지만 품팔이를 하거나 시장에서 노점상을 한다면 뭐라고 답변할까?  ‘우리 아빠 사업해요.’  ‘그래 무슨 사업하시지.’  ‘장사해요’ 그래 무슨 장사하시나.‘  재차 물어보면 ’그냥 해요 ‘하고 목청을 높이게 된다.  왜 그리 했겠는가?  돈도 명예도 몰라야 할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왜 자기 아버지 직업에 대해 떳떳하지 못할까.  직업이란 먹고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지 직업 자체에 인격이 걸려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모두가 나라는 생각 때문이다.  보통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좀 손해를 보게 된 데 대해서는 비교적 이해를 잘하는데 이유 없이 무시당했다거나 자존심을 많이 상하게 한 데 대해서는 용서치 않으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도 인상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나라만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선진국에 비해 정도가 조금 심하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은 자기 가족과 같이 찍은 사진 중에서도 자기 얼굴을 먼저 쳐다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상이 심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절에 오는 많은 신도가 자기 사업만 잘되기를 바라고 나의 이익만을 위해서 온다면 이는 ’ 아상‘이고 남과 같이 승진도 하고 돈 많이 벌기를 바란다면 이는 ’ 인상‘이다. 좋은 사람과 결혼하기를 바란다면 ’중생상‘이다, 오래 살기를 바란다면 ’ 수자상‘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나‘를 주관으로 세워놓고 일체 것을 객관시 하지만 내가 있는 이상 남이 있게 마련이다.  사상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내 몸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나‘하나 죽어서 세계 인류가 다 잘 산다 하더라도 죽기는 싫어하게 된다.  남을 돕는 데는 인색한 사람도 어디 보신약이 좋은 게 있다 하면 돈 아까운 줄 모르고 사다가 쓰려고 한다.  몇 년 전에 웅담(熊膽)이 나와 공개 입찰을 했는데 몇 천만 원을 선뜻 내놓겠단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수자상이 많은 사람들은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게 된다.

  만일 어떤 한 사람의 수명을 1 년간 단축시키고 대신 100 만 사람의 수명을 연장시킨다고 하면 선뜻 허락하겠는가.  불교를 바르게 잘 믿는 사람은 죽는데 대해 크게 겁을 먹지 않는다.  어차피 가야 할 것 조금 먼저 가면 어떻고 좀 나중에 가면 어떤가.  단 염려가 있다면 불교를 바로 믿고 수행을 잘해 불도를 이루지 못한 것만이 염려가 될 것이다.  진짜 나는 마음이니 이 몸이야 백번 만 번 죽어도 나하고는 직접 관계가 없는 일 아니겠는가. 우리가 실지는 그렇게 안되더라도 우선 이론 상으로나마 마음을 확실히 해야 된다. 우리는 생각을 정리해야 된다.  무엇 때문에 생활이 복잡하고 세상이 복잡한가?  무엇 때문에 신경을 써야 하고 괴로워야 하겠는가.  깊이 생각하면 걱정할 일 하나도 없는데 사람들은 공연히 사서 걱정하고 있는 결과가 된다.  중생들은 이 몸뚱이를 나로 잘못 알고 살기 때문에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한 생각 돌려 이 몸은 내가 아니고 이 마음만이 진짜 나인 줄 확실히 알고 어떤 일이 닥쳐도 이 내가 전생에 다지어서 이제 빚 갚는 것같이 받느라고 그렇구나.  달게 받아야지 하고 살아야 편안 해진다.  누가 죽어 화장터에 가면 숙연해지게 되는데 이 좋은 비교적 장사 집이나 화장터에 자주 가서 조문을 하고 마지막 길을 지켜주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사람이 많은 경사에는 일일이 가지 못하지만 사람이 마지막 가는 때에는 아주 특별하 경우가 아니면 꼭 가서 문상을 하고 위로를 해주게 된다.  그래서 화장터에서는 숙연해지고 무상을 느끼게 된다.  왜 그럴까.  나도 죽으면 저렇게 되려니 하니 그런 것이다.  사람의 죽음이 나와 인연 관계가 없다면 무상을 그같이 느끼지 않을 것이다.

  짐승이 죽었을 때 무상을 느끼게 될까.  슬픈 생각이 우러날까.  자비한 불자는 그렇겠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안 그렇다.  짐승은 내 목숨하고 전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그렇다.  또 화장터에서 승진 운동을 하거나 사랑을 속삭이는 사람도 없다. 그만치 무상을 보았기에 마음이 좀 정화되어 그런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다.  집에 돌아와 하루 이틀 지나면 또 탐내고 성내고 하여 죄업을 짓게 된다.  우리가 무량겁으로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악업을 익혀 왔기에 그런 것인가.  한심하고 통탄할 일이다.  사람들이 자기 가족이 죽었을 때는 진실로 돌아가신 이를 위해 100% 눈물을 흘려주는 것일까.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반은 돌아가신 이를 위해 울고 나머지 반은 자기와 관계해서 우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아상 인상하지만 나에게 얼마나 상이 많은지 잘 모르고 산다. 나에게 상(相)이 얼마나 많은지를 먼저 알아야 제기할 것이 아닌가.  내 허물이 무엇인가.  얼마나 ’나‘를 아끼고 생각하는가를 냉정히 인정하고 하나하나 제거해야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