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물이 되고 물이 산이 된다(禪)
“산이 물이 되고 물이 산이 된다.”라는 말이 하나 있다. 이것은 제행무상 시생멸법이라. 세상에 모든 것은 허망하다는 것이다. 실체 없이 모두가 변하고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태어나고 죽는 것은 없는 것이다. 또 범소유상 개시허망이라. 모든 형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다 하였으니 산이든 물이든 사람의 몸이든 형체가 있으면 다 허망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이 허망하고 따라서 유상세계가 다 허망하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산을 산이랄 것도 없으며 물을 물이랄 것도 없다는 것이다. 또 산이 높은 것도 아니고 물이 깊은 것도 아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성철스님의 산은 산이로되 물은 물이로다와 일맥 상통하는 말이다.
중생들이 형상에 집착하고 있으니까 부처님께서 이 상을 없애시려고 산이 물이 되고 물이 산이 된다고 하신 것이다. 이 세상은 상생원리가 적용되고 있는 세상이 되었다. 큰 것이 있으면 작은 것이 있으며, 높은 것이 있으면 낮은 것이 있게 되어 있고 멀고 가깝고, 더럽고 깨끗하고 등 상대적 관념을 가지고 살게 되어 있다.
그러나 실상의 진리의 세계에서는 상대적 관념이 뚝 떨어진 양변의 적적부동의 세계기 된다. 그러니 산이 높다는 것도 중생의 생각이고 물이 흘러간다는 것도 중생들이 생각으로 징서 하는 소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산이 물 위로 간다고 해도 말이 되고 물이 산 위로 간다 해도 된다는 것이다. 이 것도 저 것도 아니니 형상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이다.
水山 山水 水山空이라 산도 공 했고 물도 공 했다. 다시 살펴보면 산도 없고 물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공(空) 도리이다. 반야의 진리라고도 할 수 있다. 반야심경에 색(色)즉시공(空) 이요 공즉시색이라. 물질이 텅 빈 허공과 다르지 않고 또 텅 빈 허공이 물질과 같다. 이 본체 자리는 다 비어 있다는 것이며 부처님께서는 반야의 진리를 21년간이나 설하셨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산은 그대로 산이요, 물은 그대로 물이라는 것이다. 이 것은 생각을 비워라. 사람이 분별하는 마음 즉 번뇌 망상이 뚝 끊어지면 마음이 고요적적하며 맑은 거울과 같이 되고 맑은 거울 같이 되면 산이 오면 산이 비치고 물이 오면 물이 비치니 있는 그대로가 나타나, 산은 바로 산이요 물은 바로 물이 되는 것이다. 우리 인생살이는 생각이 많아서 탈이다 세상살이에 대한 생각은 다 잊어버려야 된다. 잊어버리는 공부가 큰 공부라는 것이다. 생각을 완전히 없애면 마음까지도 공과 같아서 맑은 거울과 같이 되니 거기에는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비치게 된다. 그러니 산은 산이요. 물은 그대로 물이 되는 것이며 집이며 길이며 바위들도 다 그대로 실상 아님이 없다. 이 우주를 상주법계(常住法界)라고 하는 것이다. 항상 머물러 있는 법의 세계라고 법화경에 이르기를 “시법주 법위 세간상 상주(是法住 法位 世間相 常住)”라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물러 세간상 이대로가 항상 있어 없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세간상이란 시시각각으로 생겼다 없어졌다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겉보기에 그렇고 실지 내용은 항상 있어 멸하지 않은다는 것이 법화경의 제법실상론이다.
즉 모든 것의 참모습이란 것이다. 또 화엄경의 무진연기론(無盡緣起論)은 불생불멸인 동시에 전체가 또 융화해서 온 우주를 구성하고 아무리 처변만화하더라도 불생불멸 그대로이며 상주법계(常住法界) 그대로인 것이다. 위와 같이 첫째는 “산이 물 위로 가고 물이 산 위로 간다.” 둘째는 “산도 공했고 물도 공했다.” 셋째는 산은 그대로 산이요 물은 그대로 물이다. “ 이 세 가지 말씀이 있는데 대중에게 묻노니 셋 중 어느 것이 맞는가? 이중 오른 것을 찾아냈다 해도 이 주장자로 30 방망이를 맞을 것이요, 못 찾아냈다 하더라도 30 방망이를 맞을 것이다. 거참 이 중 맞는 말씀이 있을 터인데 어째서 옳은 문구를 찾아내도 맞고 못 찾아도 맞는가? 깊이 있는 탐구가 필요할 것이다. 네 번째는 청산유수(靑山流水)라,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 위에서 말한 것이 실상인데 이 실상을 알아 가지고 있기만 해도 부족함이 있으니 한발 더 나아가서 이것을 수용하고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용(用) “이라 한다. 우리 생활 속에 대입해서 올바른 행을 하는 것을 실용이라 했다. 현실의 삶 속에서 활용해야 올바른 인생을 사는 것이다. 사람이 생각이 많으면 병이 난다. 생각이 많은 사람은 이 생각 저 생각에 매달려 잠도 잘 안 오고 새벽에 잠이 깨면 또 안 오게 된다. 그것이 심하면 머리도 아프고 가슴이 답답하게 된다. 그래서 마음의 병이 심하면 몸에 병까지 일으키게 된다. 모든 것은 놓아 버리고 잊어버려야 된다.
꿈과 같은 인생 좋으면 어떻고 나쁘면 어떻한가 전부 내가 지어서 내가 받는 것인데 잘되려고 해서 잘되며 못 되려고 해서 못 되는 것도 아니다. 단 현재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다. 우리가 장사를 하거나 농사를 짓거나 이것으로 내가 얼마를 벌어서 우리 식구가 잘살아야 할 텐데 하지 말고 내가 열심히만 하면 되고 잘되면 좋고 못돼도 좋다. 그리고 농사든 장사든 해서 돈 벌면 나도 먹고살고 남들도 같이 나눠 먹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그저 무심한 가운데 생업을 해야 일도 잘 되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가끔가다가 찾아오는 사람들이 절에 가서 불공을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질문할 때가 있는데 그러면 이렇게 말해 줍니다. ”세상살이 생각 다 잊어버리고 고요하고 청정한 마음으로 발원할 때만 생각하되 나와 내 가정이 잘되려니와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전부 나와 같이 잘 되라고 발원하고 내가 불공드린 공덕으로 내 가족만 잘될 게 아니라 세상사람이 다 잘되고 짐승들도 해탈하고 귀신들도 극락세계에 왕생하라 “고 그렇게 발원하도록 알려 준다. 여기서 더 잘 발원하려면 어떻게 하느냐. 나는 안 돼도 좋으니 내가 불공한 공덕으로 전부 남이 잘되게 해달라고 해야 되며 이렇게 발원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보면 내가 잘되게 된다.
달마선사께서 말씀하시길 ”자기 성품이 진실해서 인(因)도 과(果)도 아니며 또 법 그대로가 마음이니 스스로의 마음이 부처이며 자기의 마음이 뚜렷이 밝아 고요히 비추는 열반이니라. 부처란 자기 마음으로 지어서 믿는 것이거늘 어찌 마음을 떠나서 부처를 찾으리오. 염불은 왕생(往生)의 인과(仁果)를 얻고 경(經)을 잃으면 총명해지고 계(戒)를 지키면 하늘에 태어나서 보시를 하면 복스러운 과보를 받거니와 부처는 끝내 찾을 수 없느니라. “하셨다.
우리가 불교를 종교로 선택하는 것은 수행하면서 성불하기 위함이다. 잘 살고 존경받으려는 것이 아니다. 이 사바세계에서 중생의 몸으로 아무리 잘 살아봐야 고통일 뿐이다. 우리는 마음의 해탈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려면 마음공부를 게을리하지 말고 정진해야 된다. 달마 대사께서 말씀하시길 ” 진귀한 보물이 집채같이 쌓이고 정다운 권속이 수없이 많더라도 눈 떴을 때 내 것이지 눈만 감으면 모르고 잠이 들면 더욱 컴컴하다. 그래서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은 허깨비 같음을 알 수 있다 “ 하였다.
또 ”이 마음이 끝없이 옛날부터 지금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서 전혀 나고 죽은 적이 없는지라 불생불멸이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고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아니며 옳고 그름도 없으며 남녀노소의 차별도 없으며 인도 없고 과도 없는 것이 마치 허공과 같아서 취할 수도 버릴 수도 없느니라. “고 하였다. 모든 끈을 놓고 잊어버리고 베풂이 가득한 마음을 가져 보면 참으로 편안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