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했습니다
내가 잘못을 저질러 놓고
"어, 내가 왜 이랬지?"하고 딴전을 피운다면 이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된다.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에서 벗어나려면 실수로 그랬든 고의로 그랬든 결과(業果: 지난날에 지은 업의 과보)가 분명하면 즉시 "예 제가 잘못했습니다."하고 잘못을 시인해야 된다. 잘못을 잘못이라 시인하면 더 이상 잘못은 찾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러나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속이게 되면 영영 잘못은 지울 길 없고 그 괴로움은 끊을 수 없게 되어 괴로움이 다 할 때까지 괴로움 속에 잠길 수밖에 없다. 즉 하나의 잘못을 감추려고 또다시 수많은 잘못을 저지르게 되어 현재도 괴롭고 미래의 괴로움도 더욱더 커지게 된다.
예를 들어,
지나가다 잘못하여 발끝에 걸려 물컵이 엎질러지고 컵이 깨졌다고 할 때 이를 본 어떤 사람이
"왜 물컵을 차서 깨는 거요?"
"내가 언제요?"
이 말은 속에서는 물컵을 차서 깰 뜻이 추호도 없었기에 이것만이 자기인 줄 알고 일으킨 업을 의아해하여 분명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니, 이는 있는 것을 없다 하는 것과 같은 속이는 말(망어 : 妄語 : 속이는 말)이 된다.
"방금 가다가 물컵을 차지 않았습니까?"
"아, 제가 실수했군요?"
이 말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실수로 한 것이기 때문에 속에서는 남의 컵을 깨고(남의 물건을 해치고) 남이 마실 물을 엎질러 놓고도(남의 물건을 훔치고) 실수를 빙자해서 잘못을 인정해도 거기에 따르는 죄업의 대가(죄를 인정함)는 치르지 않겠다는 무죄의식(無罪意識)으로 남을 기만하는 말(기어 : 꾸미는 말)이 된다.
"실수했으면 다요? 물어내든 잘못을 빌어지지요."
"누가 사람 다니는데 물컵을 놓으라고 했나요? 이런데 안 놨으면 안 깼을 것 아니요."
이 말은 자기 잘못은 접어두고 남 때문에 깼으니 갖다 놓은 사람이 잘못이라는 식이다. 이러한 일이 비일지재하니 얼핏 보면 말이 되는 것 같아도 이는 자기가 잘못되면 부모 보고 물어내라는 것과도 같고 남을 때리면서 맞는 사람보고 "너 왜 맞아. 왜 맞아." 하며 때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말은 양설(兩舌 : 남과 이간질하는 말)이 된다.
"이 양반 웃겨, 자기가 깨 놓고 왜 남의 탓이요?"
"아니 이까짓 컵이 얼마나 된다고 컵하나 깼다고 그렇게 야단이요." 하며 성질을 낼 때도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이까짓 컵 하나.' 할 것이 아니라 이까짓 컵하나 일지라도 깬 잘못을 사과하고 잘못을 지울 수 있을 때 물어주면 될 텐데 그게 싫으니 남에게 덮어 씌우는 것이며 거기에 더해 성질까지 부리는 격이니 이는 남의 물건 떼어먹는 것과 같고 훔치는 일과 같으며 훔치다 안되니 이제는 강도로 변해 가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이 같은 말은 악구(惡口 : 나쁜 말, 험한 말, 욕하는 말)가 된다. 이처럼 분명한 것을 인정하지 않아서 한번 잘못으로 네 가지 망어, 기어, 양설, 악구의 죄업 씨앗을 또 뿌리게 되니 괴로움은 그칠 날이 없는 것이다. 죄를 짓지 않아야 첫째 편안한 인생이 된다.
무슨 일 때문이든 마음속에 괴로움이 있다면 착한 척하지 말고 내가 무슨 잘못을 범하고 있으며 이것도 모르고 또 다른 업을 짓지 않나를 바로 보아야 한다. 도둑이 남의 재물을 훔쳐서 아무리 잘 산다 해도 항상 마음속에는 불안과 떳떳지 못한 괴로움은 있기 마련이다. 누가 벌을 주지 않아도 아무리 잘 먹고 잘살아도 내가 나를 한번 가두면 그 감옥에서는 나올 수 없다.
마음의 괴로움(감옥) 속에 갇힌 사람은 빨리 죄업을 찾아 스스로 인식해서 죄를 감추고, 숨기고, 우기는 인생에서 벗어나 죄를 인정하고 잘못을 참회라고 배우는 삶으로 바꿔야 만이 스스로 선한 삶 속에 진실로 밝고 맑은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