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코펜하겐, 스웨덴 말뫼섬
외레순 해협의 남단에 있는 셸란 섬과 아마게르 섬에 자리 잡고 있다. 코펜하겐은 1445년 덴마크의 수도이자 왕실 거주지가 되었으며, 종교개혁에 따른 갈등으로 자주 약탈당했다. 16세기 후반에 무역이 번성하기 시작했고 시도 확장되었다. 하지만 스웨덴과의 전쟁(1658~60)으로 2년 동안 점령당했고 19세기 초반에는 영국의 폭격을 받기도 했다. 1856년에 성벽이 해체된 후로 도시의 시역이 크게 확장되어 주변의 많은 행정구들을 합병하게 되었다.
도심에는 라드후스플라센(시청 광장)이 있고, 이 광장에서부터 오래되고 구불구불한 상가들이 북동쪽으로 콩겐스뉘토르(왕의 새 광장)까지 뻗어 있다. 이전에는 무역과 선박의 중심지였으나 지금은 공업도시이기도 하다. 주요 공업으로 조선, 기계류 생산, 통조림 가공, 양조 등이 있다.
10세기에는 지금의 도시가 있던 자리에 작은 마을이 있었다. 1167년 로스킬레의 주교 압살론이 이곳 해안에 성을 세우고 성벽과 해자를 둘러 요새 화했다. 1445년 코펜하겐은 덴마크의 수도이자 왕실 거주지가 되었으며, 종교개혁에 따른 갈등으로 자주 약탈당했다. 16세기 후반에 무역이 번성하기 시작했고 시도 확장되었다. 신축된 건물들로는 뵈르센(환전소), 홀멘스 교회, 삼위일체 교회(유명한 둥근 탑이 인접해 있음), 로센보르 궁전(지금은 왕실 박물관) 등이 있다.
스웨덴과의 전쟁(1658~60)으로 2년 동안 점령당했다. 1728, 1795년에 일어난 화재로 많은 주택과 건물이 파괴되었으며, 19세기 초반에는 영국의 폭격을 받았다. 1856년에 성벽이 해체된 후로 도시의 시역이 크게 확장되어 주변의 많은 행정구들을 합병하게 되었다. 도심에는 라드후스플라센(시청 광장)이 있고, 이 광장에서부터 오래되고 구불구불한 상가들이 북동쪽으로 17세기에 구획된 옛 도심인 콩겐스뉘토르(왕의 새 광장)까지 뻗어 있다. 이곳에 있는 건물들로는 17세기에 세워진 토트 궁전(지금은 프랑스 대사관)과 카를로텐보르 궁전(지금은 왕립미술협회), 그리고 왕립극장(1874)이 있다.
슬로드스홀멘 섬에 있는 크리스디안보르 궁전은 1167년 압살론 주교가 세운 성이 있던 자리에 건설되었다. 1928년 이후 이 궁에는 의회·대법원·외무부 등이 들어섰다. 그 밖에도 주변 건물에는 관공서들이 들어서 있다. 또한 슬로드스홀멘에는 베르텔 토르발드센 박물관, 무기고, 국립 고문서보관소, 왕립 도서관 등이 있다. 다른 주요 건물로는 프린센스 궁(지금의 국립박물관), 성모교회, 코펜하겐대학교(1479), 페트리 교회(1585년 이후 이 도시에 사는 독일 주민들의 교회 구 교회로 쓰임), 17세기 요새, 아말리엔보르 궁 등이 있다. 1874년에 만들어진 식물원에는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의 동상이 있는 관측소가 있다. 그밖에 인기 있는 명소로는 티볼리 오락 공원과 고전 및 현대 예술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뉘 카를스베르 글뤼토브테크가 있다.
크리스디안스하운의 옛 구역은 남쪽 항구에 자리 잡고 있으며, 그곳에는 17세기의 예수교회가 있다. 서쪽 구역에는 궁전과 동물원이 있는 프레드레그스베르 공원이 있다. 이전에는 무역과 선박의 중심지였으나 지금은 공업도시이기도 하다. 주요 공업으로 조선, 기계류 생산, 통조림 가공, 양조 등이 있다.
수많은 도로는 항구의 다리들을 가로질러 도심으로 향하는 차량들을 소통시킨다. 통근자들을 위한 전철(S-baner)과 시내 버스 노선이 지난다. 1972년에 시가전차의 운행이 중단되었으며, 공항은 남동쪽의 카스트루프에 있다. 코펜하겐대학교 외에도 많은 고등교육기관들이 있다. 이런 기관들로는 덴마크공과대학(1829), 덴마크 공학 아카데미(1957), 덴마크 왕립 음악 아카데미(1867), 왕립 농업대학(1856), 코펜하겐 상과대학(1917) 등이 포함된다.
도시는 좋은 것으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사건으로 오명(汚名)을 뒤집어써 도시 안의 좋은 것들도 다 가려져 버릴 때가 있다. 순식간에 벌어진 안 좋은 일로 긴 세월에 걸쳐 쌓아 온 도시의 이미지가 훼손되기도 한다. 스웨덴 최남단의 도시 말뫼(Malmö)가 좋은 예이다. 말뫼는 유럽의 조선업계에서 선두 주자였던 코쿰스(Kockums) 사가 있던 곳이다. 코쿰스는 도시의 경제를 살리고 일자리를 창조하는 회사였다. 시민들은 코쿰스라는 회사 덕분에 윤택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고, 말뫼가 스웨덴 전체에서 담당하는 경제적 영향력도 상당했다. ‘코쿰스 크레인’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기계는 높이 128미터, 폭 164미터의 위용을 자랑했고, 세계 최대의 크레인으로 기록되었다. 이 거대한 크레인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선박이 건조되었고, 근로자들의 행복도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코쿰 스사는 글로벌 경쟁에서 패배하며 파산하였고 한국의 현대중공업은 코쿰스 크레인을 단돈 1불에 인수하였다. 크레인을 해체할 돈조차 없어 해체비용을 현대중공업이 부담하는 조건으로 헐값에 매각한 것이다. 크레인이 해체되어 한국행 운송선에 실리는 장면을 보며 말뫼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이런 모습을 스웨덴 국영방송은 장송곡과 함께 보여주면서 ‘말뫼의 눈물(Tears of Malmö)’이라고 표현했다. 한국으로 옮겨진 크레인의 부품들은 미포조선소에서 다시 조립되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스웨덴 남부의 아름다운 도시 말뫼를 ‘말뫼의 눈물’로 기억한다. 불과 16년 전인 2002년 9월 25일의 일이었다.
북해와 발트해의 관문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를 십분 이용하여 조선업의 메카로 번영하였던 말뫼는 잘 나가던 회사의 몰락으로 암울한 시기를 보내기도 했지만 지금은 35세 이하의 젊은 인구가 유입되며 다시 태어나고 있다. 23만 명까지 줄었던 인구가 40만 명으로 늘어났고, 공장이 있던 곳은 IT 분야로 유명한 말뫼대학교 캠퍼스로 확장되었고, 변전소로 사용되었던 곳은 말뫼 현대미술관의 전시공간으로 재탄생되고 있다고 한다.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말뫼에도 아름다운 교회와 파란 눈의 미녀도 꽤 많았는데 왜 나는 경제와 관련된 말뫼의 비운만을 생각하며 이 도시를 돌아다녔는지 나 스스로도 의문이다.
안테르센이 살던 집
덴마크 여왕이 살고 있는 왕궁
여왕의 요트
인어상
천사상
국기가 게양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여왕이 집무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왕은 남편이 죽고 나서 심한 우울증을 알고 있었으나 최근에는 하루에 담배 2갑을 태우고 있는 등 건강이 회복되어 정상 업무를 하고 있다고 한다.
안테르 센 동상 앞에서
배 모양으로 설계한 건물, 건축기술이 발달되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이번 여행에서는 이렇듯 아름다운 노르웨이의 피오르 및 눈이 녹으면서 생성된 장엄한 폭포를 볼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우리 일행 중 누군가가 성심을 다해 기도한 덕이라고 밖에 말할 수가 없다. 유럽 인솔자로 10여 년을 근무한 이승한은 가이드 생활을 하면서 처음 맞이한 장관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여행을 간다는 것은 바로 인문학의 길을 따라간다는 것이다, 인문학이 통섭의 학문으로 발전하면서 역사, 철학, 문학, 지리, 자연, 예술을 아우르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현장에서 생생하게 인식하고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북유럽 4개국을 여행하고도 이런 장관을 보시지 못한 분들께 대단히 죄송할 따름이다. 그리고 버스가 고장이 나서 운행이 불가할 때 순발력 있는 위기 대처능력에 감복할 따름이며 그것도 2시간이 지난기 전에 다른 버스로 대처했다. 이런 인솔자는 처음이다. 워낙 음악을 좋아하는 나는 시벨리우스 공원에서 그가 핀란디아를 지휘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했으며 노르웨이에서는 드볼작이나, 리스트 같은 스케일 및 능력은 뒤떨어지나 "그리그"는 "페리 퀸트"를 모음곡으로 상쾌한 아침부터 비운의 여인에 이르기까지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음악가인데 이동 중에 모닝을 틀어주는 등 센스 있는 관광안내자였다는 것에 대해 이승한 인솔자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고 서로를 배려한 우리 일행 모두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특히 허리 통증으로 차량에 오르 내리기가 불편한 나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신 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