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인의 나들이/해외나들이

항가리 부다페스트

산울림(능인원) 2016. 9. 20. 14:27

 

부다페스트는 89년경에 건설된 로마제국의 아쿠인쿰(Aquincum) 성에서 시작된다. 이 성은 훗날의 오부더의 터에 가까운 곳에 자리잡았던 켈트족의 거주지역에 세워졌으며 106년부터 4세기말까지는 로마제국의 저(低) 판토니아(Lower Pannonia) 주의 주도였다. 훗날의 페슈트 자리에는 '아쿠인쿰 반대편'의 뜻인 콘트라 아쿠인쿰(Contra Aquincum) (또는 트란스 아쿠인쿰 Trans Aquincum)이 세워졌다.

 

900년경 이 지역은 오늘날 항가리인들의 조상인 마자르(Magyar)인들이 아르파드의 인솔하에 들어왔다. 이들은 판노니아와 도시를 점령하고, 1세기 후 항가리 왕국을 세웠다. 이때 이미 중요한 성이었던 페슈트는 1241년 몽골제국(흉노)의 바투가 이끄는 정서군(征西軍)의 침략을 받았다. 벨라 4세의 통치하에, 곧 피해를 복구하였다. 그러나, 1247년부터 왕궁 소재지였던 부더가 페슈트를 대체하여 헝가리의 수도가 되었다.

 

16세기 오스만 제국이 항가리 대부분을 정복하면서 항가리 수도의 자리를 잃게 되어 이들 도시의 성장은 지체되었다. 페슈트는 모하치 전투에 의해 항가리 왕국이 거의 붕괴된 1526년에 오스만제국에 의해 침략당했다. 1541년에는 부더가 점령되고 항가리중앙부를 지배하는 오스만제국 속령으로서 부더주(州)가 설치되어 부더는 오스만 총독의 주류지가 되었다. 한편, 페슈토지구는 그 시기에 대부분 버려진 상태였다. 1526년 이후, 명목 뿐이긴 하였으나 오스트리아 대공인 합스부르크 왕가가 항가리 왕을 겸하게 되었다(항가리 영토 대부분은 잃었지만). 합스부르크가는 1686녕 왕국령을 탈환하였다.

 

1686년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에 다시 점령될 때까지 페슈트는 상당히 낙후되었다. 1723년부터 왕국의 행정 기관 소재지였던 페슈트는 18세기와 19세기에 빠른 속도로 성장을 하게 된. 1873년부터 오부더와 합쳐진 후에도 부다페스트의 성장은 페슈트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1800년에 이미 부더와 오부더를 합친 인구보다 많은 인구가 페슈트에서 살았으며 그 후 백년동안 20배로 증가하여 60만이 되었다. 같은 기간 부더와 오부더의 인구는 5배 증가에 그쳤다.

 

부더와 오부더, 페슈트의 행정 통합은 1849년 항가리의 혁명 정부가 처음 추진했지만 합스부르크 지배가 돌아오면서 철회되었다. 하지만 1867년 합스부르크와 항가리의 대타협으로 항가리 왕국의 자치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들은 드디어 현재의 부다페스트로 합쳐졌다.

 

부다페스트의 총 인구는 1840년에서 1900년 사이 7배로 증가해 73만이 되었다. 1896년에는 런던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지하철 개통됐다.

 

20세기 부다페스트의 인구 성장은 주로 외곽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항가리의 산업이 수도에 집중되면서 우이페슈트(Újpest) 지역의 인구는 1890년-1910년간 2배 이상 증가했으며 키슈페슈트 (Kispest) 인구는 1900년-1920년 사이에 5배 이상 증가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인명 피해와 1920년 항가리 왕국이 원래 영토의 반 이상을 잃은 것도 부다페스트의 성장을 일시적으로 밖에 막지 못하였다. 항가리의 영토가 축소된 뒤에도 부다페스트가 독립한 항가리의 수도가 된 것이다.

 

1930년에 부다페스트의 인구는 백만이었으며 그 외곽 지역에는 40만이 더 살았다. 부다페스트에 거주하던 20만 유대인 인구의 3분의 1 정도가 제2차 세계대전 때인 나치독일 점령하에 행해진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에 희생되었다. 곧이어 1944년 겨울에는 소련의 포위 공격으로 도시가 심하게 파괴되었다.

 

그 후 부다페스트는 1950년대와 1968년대에 재건되면서 항가리의 공산 정부(1947년-1989년)가 1960년부터 추진한 실용주의 노선의 선전에 어느 정도 이용 되기도 하였다. 1980년 이후 부다페스트는 항가리에서 전체적으로 나타난 이민 증가와 자연적 인구 감소로 인구가 줄어드는 추세다.

 

 

 

 

 

 

 

 

항가리 야경은 참으로 아름답다. 이곳이 바로 국회의사당이다.

 

 

 

 

 

 

 

항가리 옛왕궁 모습

 

 

 

 

 

 

 

왕궁의 너무 아름답다.

 

아내는 늘 웃음 소리만 크지 별다른 제스쳐가 없는 여자인데 아름다움에 취해 있는 듯 하다.

 

 

 

 

 

 

 

 

 

 

 

 

 

 

 

낮과 밤의 차이가 이토록 클까

 

 

 

강을 사이에 두고 부다와 페스트가 갈라진다. 다리 여러개 설치 되어 지금은 하나지만

 

 

 

 

 

 

 

 

 

어부의 요새에서

 

요새에서 내려다보고

어부요새에서 옆으로 보고

 

대통령 집무실(옛날 왕궁)

 

 

 

 

 

근위병 교대식 장면항가리를 상징하는 독수리 아마도 대몽골 제국을 상징이라도 하듯 느낌이 와 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