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브로브니크
보스니아 네움에서 일박하고 이른 아침에 크로아티아 아드리아 해 남쪽 연안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손꼽히는 두브로브니크로 향했다. 스르지 산 아래쪽에서 바다로 튀어나온 곶 위에 자리잡고 있다. 해안성채가 바닷가에 우뚝 솟아 있으며, 오래된 성벽은 대부분 2겹으로 지어졌다. 주도로인 스트라둔 양 옆에는 후기 르네상스 양식의 집들이 늘어서 있고 구도시는 대부분 가파르고 구불 구불한 좁은 길들이 나 있어 도시 전체가 그림 같은 미로를 이루고 있다.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는 곳으로 주요산업은 리큐어 주, 치즈, 비단, 가죽제품 제조업이다.
거의 석회암이 드러나보이는 스르지 산 아래쪽에서 바다로 튀어나와 있는 곶 위에 해안성채가 바닷가에 우뚝 솟아 있으며, 거대하고 둥근 탑이 육지 쪽에서 이 도시를 굽어보고 서 있다. 성벽 너머로는 정원으로 둘러싸인 별장이 많이 보이고 이 도시의 초기 도시계획은 1292년의 화재 후 항구를 다시 지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1272년까지 라구사의 라틴 섬과 두브로브니크의 숲속 거주지를 나누어주는 습지대였던 계곡을 따라서 이곳의 주도로인 스트라둔이 쭉 뻗어 있고, 그 길 양 옆으로는 후기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은 아름다운 집들이 늘어서 있다.
꽃보다 누나에서 보였던 빨간 지붕들이 사방에 흐터져 있는 이 도시는 성벽 안에서는 자동차 통행이 금지되어 있으며, 스트라둔을 제외한 구도시는 대부분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좁은 길들만 나 있어 도시 전체가 그림 같은 미로를 이루고 있다. 14세기에 지은 2개의 수도원이 도시 양쪽 끝에 서있는데, 프란체스코회 수도원이 서쪽 입구를 지키고, 도미니쿠스회 수도원이 동쪽 통로를 맡아 지켰다.
렉터 궁전은 달마치야 건축의 걸작 가운데 하나이다. 앞바다에 있는 로크름 섬은 정원과 오렌지 나무로 유명하다. 해마다 여는 예술축제를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경치 좋은 이 도시를 찾는다. 이곳은 사라예보와 베오그라드까지 철도로 연결되어 있다. 그루지 가까이에 새로 형성된 항구에서 달마치야의 다른 항구들과 이탈리아까지 정기선이 운항된다.
이 도시는 7세기에 에피다우루스가 슬라브와 아바르를 약탈했을 때 도망나온 로마 피난민들이 동남쪽 지역에 자리잡고, 이름을 라우사 또는 라구시움이라고 부른 것이 그 시작이었다. 슬라브의 식민지인들도 곧 그곳의 로마인들과 합쳐져 일찍부터 이 도시는 2개의 위대한 문명을 잇는 구실을 했다. 로마가 망한 후, 비잔틴의 지배를 받았다. 9~12세기에는 외세의 침략을 물리 쳤으나 1205~1358년에는 대부분의 독립권을 갖고도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는 속국이었다.
이 도시에서는 국적을 가리지 않고 모든 망명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해주었는데, 그들 가운데 영국의 왕 리처드 1세도 있었다. 또한 이 도시 공화정은 조약을 맺거나 공물을 바쳐 영토를 달마치야 해안까지 넓혔다. 비잔틴에서 도나우 지역까지 닿아 있는 육상 교역로가 끝나는 바닷가에 있어 상업이 크게 번성했다. 라구사의 육로 무역은 발칸 반도 전역에 걸쳐 번창했다.
1420년 달마치야가 베네치아에 팔렸지만 두브로브니크는 이름만 빼고 모든 점에서 자유도시 그대로 남았다. 수세기 동안 이곳 사람들은 동·서양 사이에서 책략을 발휘하여 독립을 잃지 않았다. 투르크와 전략협정을 맺어 오랫동안 자유를 지키고, 오스만 제국과 유럽 사이의 교역에서 무역에 중요한 역할을 계속했다.
16세기에는 인도 및 아메리카 대륙과 교역을 했으며, 1588년 영국을 침공하는 스페인에 군대를 지원했으나 그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15~17세기에 예술과 문학이 크게 발전해 '남부 슬라브의 아테네'라는 이름을 얻었다. 남부 슬라브 역사에서 처음으로 이곳 사람들의 말이 문학작품에 나타났다. 그러나 바다에서 이룬 업적이나 상업에서 얻은 성과는 이 도시의 문학사를 훨씬 능가 하는 것이었다.
1667년 지진으로 도시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고 주민의 1/5 정도가 죽었다. 그후 나폴레옹 전쟁 때 다시 한번 옛날의 번영을 누렸다. 1800~05년 이곳은 지중해에서 단 하나뿐인 중립국으로 교역에서 많은 몫을 차지했다. 1808년 나폴레옹 1세가 이곳을 점령했고, 1815년에는 빈 회의를 통해 오스트리아로 넘어갔다. 1918년 유고슬라비아에 합병되었다.
두브로브니크가 세르보크로아티아어로 작은 숲(dubrava)을 뜻하는데 아마도 이런숲들이 많았었는지 아니면 스라브족들이 고향의 숲을 그리워해서 지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 용어부터 재미 있다.
꽃보다 누나에서 내려다 보이던 그 언덕에서 내려다 보니 빨간 지붕들이 정말 정겨웁다.
영국의 리처드 왕이 난파되어 이 곳에서 구출 되었는데 귀국하여 보내준 돈으로 건립한 성당으로 벽화나 조각 하나하나가 문화 유산일만큼 극치의 성스러움을 보여준다.
이곳이 꽃보다 누나에서 이미연이 차를 마시다가 들켯던 그 부자 카페다. 작은 구멍으로 된 문을 통과하면 시원한 바다가 보이는 이 카페를 찾을 수 있으나, 중간에 가짜 부자 카페들이 많으니 주의 해서 찾아야 된다.
꽃보다 누나에서 중식하던 그 식당인데 우리는 이곳에서 스파케티를 먹었다. 해물이 들어간 스파게티는 살짝 매꼼한 맛이 있어 우리 입맛에 아주 익숙한 듯 했다.
아마도 옛날에 성을 공격 해오던 배들이 있으면 성문을 걸어 잠그고 이 통로를 이용하여 특공대를 편성 적들의 배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구멍 뚫기 공격을 하던 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웅장한 거북이 망루를 등에 업고 성안으로 기어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다.
너무 덥고 지쳐서 우리는 그늘에 앉아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거지 같은 우리 모습이지만 그래도 재미있던 추억으로 오래동안 기억속에 머무리라.
형상들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길거리 화가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