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울림(능인원) 2014. 8. 13. 16:15

  부석사를 뒤로하여 부지런히 봉화를 향해서 가던중 우연이 이몽룡 생가라는 이정표에 무척이나 반가움이 든다. 이제까지는 소설속의 인물로 생각했는데 실존 인물이라고 생각을 하니 감개가 무량하다.

  그 이몽룡(성이성)이 살았던 고향집을 가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301번지, 당시엔 영주 땅이었다. 잘 지어진 이 사대부의 집 또한 고택탐방으로 손색이 없다. 성이성이 남원 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 1613년(19살)에 지어진 조선 중기 전형적인사대부 가옥이다. 정면 7칸, 측면 6칸의 ‘ㅁ’자 형이다. 건물 배치를 보면, 아래쪽 마당 끝에 대문간채를 뒀고 북쪽 높은 곳에 사랑채와 안채가 하나로 연결돼 있다. 대문간채를 들어서면 비교적 넓은 사랑마당이 있고 맞은편 서쪽 높은 곳에는 중문간채, 동쪽에는 사랑채가 있으며 사랑채 서쪽에 중무능로 들어가면 안채가 보인다. 특이한 점은 안채에 도장방(導掌房ㆍ부녀자가 거처하는 방)을 많이 뒀다는 점과 일반적으로 홑집인 사랑방을 겹집으로 한 점이다. 안채는 약간의 변형이 있지만 조선시대 경북 북부지방의 ‘ㅁ’자 형 전통가옥의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택발달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이 집은 풍수가들이 말하는 전국 최고 명당 43집 중의 하나라고 했다. 집 뒷산은 암소가 누운 
형상이고 이 집은 소의 유방에 들어앉은 터라고 했다. 솟을대문 안에 들어가 두리번 거리자 안채에서 일하시던 종부로 보이는 아주머니께서 들어오라고 하신다. 들어가니 앉으라며 음료를 내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곧바로 주인이신 성이성 선생의 13대손 임천(林泉) 성기호(成基浩ㆍ73) 선생이 들어오셨다.

   마루에 걸터앉아 성이성 선생과 춘향이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종손 성기호 선생은 
“그 어르신은 실제로는 이몽룡의 캐릭터와는 다소 다른 품성을 갖고 있다”고 했다. 평소에 꼭 필요한 말 아니면 한마디도 않고 조용히 자기 할 일만 하는 점잖은 선비였다고 한다. 그러나사춘기때 춘향이를 만났으니 남자인 그도 어찌 사랑의 감정을 피해갈 수 있었으랴. 가문에선 선친때까지만 해도 이 이야기가 밖으로 나가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성이성 선생은 외가인 영주에서 태어나자 마자 이곳 본가로 왔다. 태어나면서부터 눈에 광채가 빛났다고 한다. 어머니가 젖을 먹일 때에도 눈을 가리고 먹였다. 훗날 성이성은 왠만해서는 상대방을 쳐다보지 않았다. 어사가 된 후 성이성의 광채를 보고 임금(인조)이 놀라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로 인해 눈에 빛이 나는 사람을 ‘성어사’라고 하는 유행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성이성은 네 번의 어사를 지냈다. 처음엔 경상도 진휼어사, 두 번째는 충청도 암행어사, 그리고 
세 번째와 네 번째는 전라도 암행어사로 나갔다. 전라도 암행어사로 처음 갔을 땐 스승 조경남을 만났고 두 번째 갔을 땐 스승은 작고했고 그의 서자 둘이 영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이성 선생에 대한 장황한 이야기를 듣는데 무려 2시간이 흘렀다. 종부께서는 성이성 선생이 공부했던 방을 가리키며 꼭 들어가 보라고 권하신다. 많은 풍수가들이 와서 기가 센 방이라고 흥분했다고 한다. 아버지 성안의 선생 방을 지나 아주 작은 공간이었다. 이 방에 하루만 앉아 있으라고 해도 갑갑해서 못견딜 만큼 작은 방이다. 하지만 몇차례나 과거에 급제한 방이니 어찌 그냥 지나칠까. 그의 방 앞에는 마루가 조금 넓게 꾸며져 있었다. 또 보기 드문 ‘우물 정(井)’ 자 천정이 눈에 확 들어왔다. 성이성의 방 앞 모퉁이에는 그가 소변보던 간이 소변실이 있다. 판자를 대 작은 사각형으로 둘러쌌다. 사대부 집안의 도령이었으니. 마당과 마루 사이의 흙벽엔 참으로 재밌는 그림이 있다. 요즘으로 말하면 ‘스마일’ 이모티콘이 기와로 도안돼 있다. 두 가지 모양이 있다. 기발하다. 종부 말씀으로는 옛날부터 있던 그대로의 벽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정확히 400년 전에 이 스마일 이모티콘이 조선 사대부 집에서 출발한 셈이다.

  집 옆에는 작은 사당이 있다. 성이성 선생에게 제향하는 사당이다. 성이성 선생은 불천위(不遷位)로 모신다. 아버지 성안의도 임진왜란 때 곽재우, 정인홍과 손잡고 큰 공을 세워 불천위가 됐는데 부자가 불천위로 모셔지는 아주 보기 드문 가문의 영광이다. 그 옆엔 성이성의 방을 향해 완전히 누운 소나무가 눈길을 끈다. 500살 됐다. 어릴 때 올라타고 놀았던 나무다. 그런데 지난해 한 스님이 와서 이 소나무를 보고 놀라운 이야기를 하고 갔다. 이 소나무는 100년에 한 번 꽈배기 처럼 뒤틀림을 한다는 것. 그러고 보니 나무 줄기가 정말 다섯군데서 뒤틀림이 있었다. 기이한 나무다. 6번째 뒤틀림은 후세들에게 관찰해보라고 기록으로 남겨야겠다.

  한국의 대표 국문소설이자 신분을 초월한 로맨스의 주인공 성이성의 종가 고택은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 성지’가 될 수는 없을까. 이 멋진 관광자원임에도 불편한게 너무나 많다. 관광객도 불편하고 주인도 불편하다. 성기호 선생 부부는 현재의 생활에 혀를 내두른다. 집도 마음대로 꾸미고 살 수 없다. 부엌문도 뜯어내라고 해서 뜯고 지내는데 겨울철에는 춥고 온갖 흙먼지 날아들어 견디기 힘든다. 건물도 3채나 헐렸다. 홍수땐 토사가 내려와 배수로도 막히는데 담장도 필요한 실정이다. 게다가 관광객이 모여들어 프라이버시라고는 보장받을 길이 없다. 하다못해 힘없는 나 에게 집 옆에 아주 작은 살림집을 마련해주고 이 집은 스토리텔링을 잘 해 국내외 관광객을 불러들이는게 모든면에서 더 낫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수긍이 갔다. 


  안채 마루에서 주인 부부를 만나는 도중 바깥 마당에 이따금 여행객이 와서 슬쩍 들여다 보고 서로 
불편해서 그냥 돌아가버리곤 했다. 일상으로 사는 방과 부엌에 매일 낯선 사람들이 드나드는게 얼마나 불편할까. 보는 사람도 민망할 수 있겠다. 그런데 바깥마당에서 슬쩍 훑어보고 가서는 이 종가 고택탐방과 이몽룡의 흔적을 제대로 느껴볼 수 없다. 게다가 이 집 진입로도 좁은데다 바로 이웃엔 가축축사도 있어 파리떼며 냄새까지 ‘불쾌한 관광‘에 가세하고 있었다. 주차장도 개선해야 한다.

   이 좋은 관광자원을 갖고도 지금 제대로 활용 못하고 있는게 너무 안타까웠다. 봉화군은 재정문제를 들어 적극적으로 손길을 내밀지 못하고 있다. 이몽룡과 성춘향의 러브스토리, 남원이 그 현장이라면 봉화는 그 발원지가 될 수 있다. 지금은 고작 1주일에 관광버스 두 차례 오는 것 외엔 알음알음 개인 여행객들이 와서 스치며 지나가는 관광이 전부라고 했다. 그나마 와서 충분히 느끼고 가는 여행객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뭘 보여줄 수도 없고 뭘 볼 수도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이몽룡 축제’라도 만들어 남원시의 ‘춘향제’와 서로 교류하면 시너지효과도 높일 수 도 있는데... 성이성 선생은 봉화 금씨 부인과 결혼, 27세에 첫아들을 얻으면서 모두 6남매를 뒀다. 아버지 성안의는 경남 창녕 출신. 이곳에 입향하면서 성이성은 1595년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외가에서 셋째아들로 태어나고 지금은 성기호 선생이 대를 이어가며 살고 있다. 이 집 택호가성이성의 호를 딴 계서당(溪西堂)이다.

  1627년 문과급제 후 사간원 사간, 홍문관 교리, 응교 등을 역임했고 암행어사 4차례, 고을 수령 5번 임명받았다. 합천현감, 담양부사, 창원부사, 진주목사, 강계부사를 맡아 선치(善治)해 청덕유애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성이성은 권세와 야합하지 않고 청렴결백했으며 항상 빈민 편에 선 선비였다. 평소 말 수가 적었던 그는 임금에게도 직언을 하고 충언을 했지만 결국 미움을 사게 돼 승진이 순조롭지 못했고 한직으로 쫓겨났다. 강계부사 시절 아랫사람이 부정을 저지르다 잡히자 부사가 시켰다고 허위진술해 국문을 당하고 충청도 단양으로 유배가기도 했다. 하지만 곧바로 진실이 밝혀지면서 풀려났지만 국문 후유증으로고향에 돌아와 얼마안돼 70세로 사망했다. 춘향이와의 사랑이야기 이후 그는 평생 기녀를 가까이 하지 않았고 과음도 하지 않았다. 사후 30년이 지난 1695년(숙종21년) 청백리에 녹선됐다고 한다.

  이집 종부는 성기호씨가 허리를 다쳐서 이제는 이 고택을 찾는 관광객에게 끓인 물도 제대로 대접 할 수 없고 조금 있으면 관광버스 예약팀이 오는데 제대로 설명이나 할지 걱정된다며 안타까워했다. 너무나 애처로워 그 집 밀크로숀을 얻어 허리 맛사지를 해주니 아주 수월해졌다며 고맙다고 비듬액기스와 토마토를 싸주시는 그 정성이 지금도 눈에 훤하게 비취는 것 같다. 

  우리는 그 집을 출발하여 봉화에서 송이덥밥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안동의 명물 도산 온천을 찾아 중탄산수의 따뜻함과 지하수의 시원함으로 여행의 피로를 원없이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