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중세사학회 제 84회 연구발표회에서 고려시대 김취려 장군의 활약상에 대해 발표한 논문을 살피고 이해를 돕기 위해 한마디 한다. 먼저 논문에 실린 글을 인용해보겠다. ‘김취려는 태자부 견룡이라는 첫 보직부터 대장군이라는 고위직에 오를 때까지 거의 국왕 측근의 친위군 소속으로 복무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철저하게 무반의 엘리트 코스만을 따라 승진해갔던 것이다.’ 근거로 김취려 장군이 대장군의 직위에 오르기까지 어견룡행수(御牽龍行首), 지유(指諭), 중랑장(中郞將), 장군(將軍) 등을 거친 점을 예로 들었다. 그러나 상기에 언급한 직위 중 어견룡행수를 제하고는 견룡 고유의 직급이 아니다.
고려시대의 군제는 각 군과 위에 각각 상장군(정3품)·대장군(종3품)이 1명씩 있었는데, 그 지휘하는 영의 수에 따라 영마다 장군(정4품) 1명, 중랑장(정5품) 2명이 있었다. 그 아래 낭장(정6품)·별장(정7품)·산원(정8품)·위(정9품) 등 군관이 배치되었다. 즉 상기에서 실례로 든 직급은 고려시대 모든 군인들의 직급체계였을 뿐 그를 근거로 친위군 운운할 수는 없다고 본다. 아울러 ‘거란의 침입이 있기까지 최충헌에게 충성을 다했다’고 기술했다. 친위군인 견룡으로 시작하고 이후 대장군에 오를 때까지 역사에서 기록은 나오지 않으니 친위군에 머물러 당시의 실권자인 최충헌에게 의지했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러나 최충헌과 김취려는 달랐다. 최충헌이 권력을 좇은 반면에 김취려는 명예를 선택했다. 비록 뛰어난 무인으로 최충헌의 경계의 대상이기는 했지만 권력에 연연하지 않은 김취려가 그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없었다.
사서를 찬찬히 살피면 능히 최충헌과의 관계를 유추해낼 수 있다. 최충헌에게 있어 김취려는 이른바 가까이 하고 싶으나 가까이 할 수 없는 존재였으며 항상 의(義)를 따르는 김취려를 최충헌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나는 역사소설을 주로 집필하면서 선인의 기왕의 행적을 중시 여기며 어떤 사견이나 추측과 가설도 첨가시키지 않고 글을 끌어간다. 그러나 역사 속 인물, 특히 고려시대의 경우 사료가 충분치 않아 명쾌하게 그 낱낱의 행적을 기록하기 힘들다. 때문에 당시의 모든 주변 정황에 대해 사료를 근거로 빈틈없이 조사·숙지한 연후에 사라진 행적 역시 철저하게 검증을 거친다.
그런 차원에서 최충헌이 권력을 잡은 그 시점부터 역사서를 살펴보았었다. 만약 김취려 장군이 지속해서 조정에 머물렀다면 반드시 이름이 실렸을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다음은 거란과의 전투에서 보인 기발한 전략들과 전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보인 통솔력을 살펴보았다. 오랫동안 친위군으로 근무했던 사람의 행태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여러 번에 걸친 전투 경험이 없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다시 시선을 언양 문중의 기록으로 돌렸다. 다행스럽게 일찌감치 동북계(東北界)를 진수(鎭守)했다는 기록을 살필 수 있었고 그를 근거로 견룡이란 직위를 떼고 지유가 되는 그 시점부터 야전군으로 근무한 것으로 기술했다.
문무를 겸했던 김취려 장군은 우리민족의 성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없는 인물이다. 아니 내막을 살피면 오히려 이순신 장군을 능가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조선과 고려라는 시대적 차이와 이순신 장군은 우리민족의 숙적으로 간주하는 일본을 상대로 승리를 일구어 낸데 반해 김취려 장군은 북방의 거란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전투에 임해서는 항상 선봉에 섰고 모든 공은 오로지 수하들에게 돌렸다. 심지어 함께 참여한 전투에서 큰 아들을 잃었다. 또 아군으로부터 배신당하는 쓰라린 경험을 겪으면서도 김취려 장군은 오로지 구국이란 대의만을 내세우며 스스로를 경계했다.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될 정도로 심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수하 장졸들의 사기를 먼저 생각한 무인 중의 무인이었다. 아울러 전쟁터에서 죽어야 한다는 그의 숭고한 정신은 결국 어명에 의해서 치료하게 되는 상황까지 이른다. 이 시절 권력만을 좇는 부나방들과는 달리 오직 국가와 백성을 위해 전쟁터를 누볐던 그의 정신은 새롭게 태어나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