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지혜/암도스님

삼처전심과 인류의 목표

산울림(능인원) 2011. 5. 10. 22:43

오늘의 법문 주제는 삼처전심(三處傳心)과 인류의 3대목표이다. 21세기는

우주시대가 되어서 섬세하지만 마음을 크고, 넓고, 깨끗하게 가져야 할

것이다.


“자유자제로 수처작주(隨處作主)하라”
부처님께서 영산회상(靈山會上)에 계실 때에, 하루는 법문을 하시는데,

어느 때 부처님께서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보였다.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하고 있는데, 다만 가섭존자만이 빙그레 웃었다. 이것을 ‘영산회상의

거염화(擧拈花)’라고 하기도 하고 ‘염화미소(拈華微笑)’라고도 한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을 하는가? 그 뜻을 알겠는가?


웃음이란 참 묘한 것이다. 여러가지 웃음이 있지만 웃음이란 좋은 것이다.

이 염화미소를 화두라고도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영원히 풀어낼 수 없는

화두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현대에 살고있는 우리는 우리의 사고에 맞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염화미소의 근본은 자유라고 생각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 꽃을 든것도

자유고, 가섭이 웃은 것도 자유이다.


특히나 생명의 활동은 절대자유이다. 우리가 일제시대로부터 해방이 된 후

계속 유행한 것이 자유이다. 자유는 보장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스스로 누릴줄 알아야 한다. 자유의 글을 분석 해보면 스스로 자에 말미암을

유 자 이다. 자기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이루어 진다. 자업자득(自業自得),

자작자수(自作自受) 등에서도 알 수 있을것이다.


자유가 제대로 될려면 스스로 자주적인 생각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스스로 힘이 있어야 한다. 또 자주(自主)적으로 살려면 자조(自助)정신이

있어야 한다. 스스로 자기를 도와야 한다. 그래야 자립(自立)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의 근본 정신은 자주, 자조, 자립이다.


이러한 깊은 정신을 부처님께서는 2,500여년 전에 그렇게 보여주신 것이다.
스스로 깨닫고 무엇이든 자력으로 하려는 노력을 하여야 할 것이다.

또 부처님께서 다자탑 전에서 설법을 하시는데, 다자탑은 다자장자가

공양한 절에 있는 탑이다. 그런데 대중이 너무 많이 모여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가섭이 늦게 도착하였다. 부처님께서 가섭을 앞으로

불러 자신이 앉은 자리에 함께 앉도록 했다. 이것을 ‘다자탑전의 분반좌

(多子塔前分半座)’라고 한다.


당시만 해도 사성계급제도로 인하여 스승과 제자가 나란히 자리에 앉는

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 부처님께서 자리의 반을 양보하신

것은 그렇다 하여도 가섭 또한 태연히 앉아 있었던 것이다. 이는 무슨

이유일까? 이것은 절대평등을 보여주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항상 평등을

주장하셨다. 남녀노소, 빈부를 가리지 않으셨다. 이것은 부처님의 원만심

에서 나온 것이다. 분별심이 생기면 차별을 하게되기 때문에 분별망상을

버리라고 하셨다. 다만 분간을 할 필요는 있다. 정확한 판단은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함허득통 선사는 평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석가도 안횡비직(眼橫鼻直) 이시고 사람사람(人人)도 역안횡비직

(亦眼橫鼻直)이라.” 우리도 모두 부처님과 같이 생겼는데 우리는 왜

부처님과 같이 되지 못하는가?

우리도 누구를 대하던지 평등하게 대하고 자기도 부처님과 같다고

평등하게 생각하면 되는데 그것이 안되는 것이다. 부처님처럼 그렇게

평등하고 원만한 생각을 내지 못하고 분별하고 차별하고 시기, 질투를

하기 때문에 중생인 것이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자 부처님을 곽 속에 모시고 대중들이 슬퍼하고

있었다. 그 때 가섭이 늦게 도착하여 곽을 세 바퀴 돌고 절을 하자 곽이

열리고 부처님의 두 발이 쑥 나왔다.
이것을 ‘싸라상수 하(下)의 곽시상부(槨示雙趺)’라 한다.


이것은 또 무슨 뜻인가? 이것을 간단히 보자면 기적이지만 그렇게 보자면

공부가 되지 않는다. 부처님께서는 늘 생사일여(生死一如)라고 말씀

하셨는데, 그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이다. 그렇지만 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 마음이 가장 평화스러운 것이다. 그것이 행복이다. 그런데, 산다고

하는 것이 죽음의 근본이며, 죽음이 곧 삶의 근본이다. 생(生)은 사지본

(死之本)이며 사(死)는 생지본(生之本)이다. 윤회의 틀 속에서 부단히

움직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의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행복이고 나아가 평화가 되는 것이다.

자유는 개인의 생명 활동이며, 평등은 상호관계이고, 전체 모두는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 이들은 깊이 들여다보면 개인과 인간관계 전체의 목적이다.

이것이 인류의 영원한 화두이자 목표인 것이다.

그런데 최고의 목표인 열반의 세계, 피안의 세계, 극락의 세계 등의 행복한

생활을 하려면 전체가 화합을 하여야 한다. 화합을 하려면 마음이 합쳐져

합심이 되어야 하며, 마음이 합쳐지려면 누구나 다 심리상태가 좋아야 한다.

남이 기쁠 때 같이 기뻐하고, 남이 슬플 때 같이 슬퍼하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심리상태가 좋으려면 여래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또

이해를 하려고 노력하여야 한다.


이해라는 것은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바로 진리

이다. 항상 진리를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참 이해를 하려면 해탈을 하여야 하는데, 사람들은 고정관념을 가지고

살고 있다. 우월주의나 관념을 가지고 있으면 남을 해하려 하는 마음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해탈이라는 것은 모든 제약을 푸는 것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스스로의 고정관념이다. 아상(我相),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버려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실제의 생활에서 해탈을 하려면 탈속하여야 한다. 속탈이라고도 하는데

속물근성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물욕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석가모니께서 별을 보고 깨달으셨는데, 깨닫고 나서 물욕을 버리라고

하셨다. 이 몸도 물건의 하나이며, 나아가 모든 물건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이 시대에서 최고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라마께서도

국가를 빼앗겼지만 반항하지 않고 평화를 위해 힘쓰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물욕을 버리고 살려면 근본적으로 탐욕을 버려야 한다. 탐욕은

물욕보다 좀 거친것인데, 욕심이 큰게 탐이며, 자기 능력 이상을 바라는

것이다. 이것이 안되면 화를 내는 진심이 생긴다.


 

어리석기 때문에 탐심이 생기며, 화가 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탐진치

삼독심만 버리면 물욕을 버릴 수 있다. 물욕을 버리면 속물근성이 빠져

버리고, 속물근성이 빠지면 탈속할 수 있고, 탈속하면 해탈이 되고, 해탈이

되면 이해가 잘 되고, 이해가 잘되면 심리상태가 좋고, 심리상태가 좋으니까

합심이 잘되고, 합심이 잘 되니까 화합이 잘 되고, 화합이 잘 되면 평화

스럽게 살 수 있는 것이다. 평화의 원리는 탐진치 삼독을 버리는 것이다.


 

이것을 버리면 무명이 없어지게 된다. 12연기의 첫째인 무명은 지욕, 즉

알고자는 욕심과 또 애욕,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이다. 무명연기와 탐애

연기가 합쳐져서 12연기를 이룬다. 이 두가지를 벗어나면 생로병사가

해결이 된다.


 

우리는 목표인 해탈과 열반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말씀을 깊이

새기고 새겨서 불퇴전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